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21
1121회.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부터 해야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탁자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오자 칼슨 겔러거 자작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오금에 밀린 의자가 우당탕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거침없이 걸어오던 엘리오가 탁자 맞은편에 우뚝 멈춰 섰다.
순간 칼슨 겔러거 자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멈추시오! 나는 에스카토스 왕국의 자작이자 둠스톤의 영주요. 신분에 걸맞게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오.”
엘리오는 대답 대신 과일 접시에서 포도 한 알을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우물거리던 그가 포도 씨를 아무 데나 풋풋 뱉고 난 후에 말했다.
“왜?”
“내가 적법한 절차로 작위를 승계받았기 때문이오.”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말과 함께 엘리오는 눈으로 과일 접시를 훑었다.
고기만 먹다가 과일을 먹으니 입안이 개운한 게 계속 당겨서다.
“귀하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할 것 같아서 그랬소.”
엘리오가 손가락으로 과일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내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마음에 드는 게 없는지 엘리오의 손이 다시 포도로 향했다.
“그건 내가 히르헤라의 기사들을 돼지인 것처럼 묘사했기 때문이오.”
순간 엘리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가 들고 있던 포도알이 마력탄처럼 칼슨 겔러거 자작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상석 뒤편 벽에 박혔다.
꽈앙―!
마치 마력포에 맞은 것처럼 상석 뒷면의 벽이 허물어졌다.
소드마스터들도 하기 어려운 기예에 귀족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칼슨 겔러거 자작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자칫 머리통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었던 상황인 까닭이다.
이윽고 엘리오가 허공을 움켜잡자, 칼슨 겔러거 자작의 몸이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커헉!”
멱살을 잡힌 칼슨 겔러거 자작의 입에서 수치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금사자 기사단장과 기사단원은 발만 동동 구를 뿐 감히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제지하지 못했다.
엘리오는 그 상태에서 칼슨 겔러거 자작의 얼굴을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얼굴이 거의 맞닿을 정도가 됐다.
엘리오가 이마를 칼슨 겔러거 자작의 얼굴에 들이밀며 말했다.
“어이, 자작 아저씨.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부터 해야지. 뭐? 귀족 대우를 해 달라고? 그런 썩어 빠진 정신머리로 무슨 예술을 한다고 나대?”
“자, 잘못했소. 내가 실언을 했소.”
그제야 엘리오는 칼슨 겔러거 자작의 얼굴에서 머리를 떼었다.
그리고 ‘이걸 어떻게 할까?’ 망설일 때다.
칼슨 겔러거 자작의 장자인 아델 겔러거가 석조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히르헤라의 기사들을 모욕한 아버지를 용서해 주십시오!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가 히르헤라로 가겠습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칼슨 겔러거 자작의 가족들이 놀란 눈으로 아델 겔러거를 보았다.
그건 ‘히르헤라 주둔군에 합류하겠다’는 소리였다.
평생 예술만 추구해 온 겔러거 자작가 사람들에게 그의 발언은 상상하지도 못한 충격이었다.
뚱한 얼굴로 아델 겔러거를 내려다보던 엘리오는 잡고 있던 칼슨 겔러거 자작을 뒤로 내던졌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칼슨 겔러거 자작이 바닥을 굴렀다.
기사단장이 쓰러진 칼슨 겔러거 자작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칼슨 겔러거 자작이 황망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된 뒤로부터 방금까지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꿈인가?’
그는 실감이 나지 않는지 머리를 여러 차례 흔들었다.
그런 그에게 엘리오가 말했다.
“나는 히르헤라에서 수많은 기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마수, 마물, 마족과 싸우더군. 그들이 히르헤라를 지켜 주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마물의 먹이가 됐을 거다. 그런데 북부의 평화를 지켜 준 기사들에게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히르헤라의 기사들을 돼지라고 모욕해?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여기서 예술인지 지랄인지를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
칼슨 겔러거 자작은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만약 이 소식이 왕궁에 전해진다면 중벌을 면치 못할 터였다.
‘나도 미쳤지. 히르헤라의 기사들을 앞에 두고 그런 소리를 하다니.’
분위기에 취해 깜빡했다.
미녀 바르도스 앞에서 큰소리를 친다는 게 선을 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슬쩍 눈을 굴려 아들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히르헤라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 나간다던데, 검술 실력도 변변찮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올지 걱정이다.
보내면 자칫 죽을 수도 있지만, 안 된다고 막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이, 자작 아저씨.”
“예.”
“닐 크로우 백작에게 전해. 보름 안에 히르헤라 주둔군에 합류하지 않으면, 내가 백작가를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릴 거라고. 알겠어?”
“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귀족의 특권을 누리려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라고. 바로 옆에서 기사들이 북부를 지키겠다고 싸우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띵가띵가 놀아? 그러고서 뭐어? 예술을 사랑해? 썅놈의 새끼들, 콱 다 죽여 버릴까 보다.”
엘리오가 내뿜는 살기에 칼슨 겔러거 자작은 어깨를 움츠렸다.
전에는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 부끄러웠다.
그동안 예술을 핑계로 북부의 위기를 외면한 것은 사실인 까닭이다.
씩씩거리던 엘리오가 만찬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작, 여기 있는 귀족들 싹 다 히르헤라로 보내. 알겠어?”
“예.”
장자를 히르헤라로 보내게 된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귀족들은 사색이 됐다.
막 돌아서려던 엘리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무릎 꿇은 자작의 아들을 내려다보던 엘리오가 손을 휘저었다.
무형의 기운이 아델 겔러거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엘리오는 그를 일으켜 세운 뒤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자리에 앉자 파비안이 아쉽다는 얼굴로 말했다.
“영주의 머리를 탁자에 처박을 줄 알았는데 왜 참으셨습니까?”
“잘못했다고 하잖아. 힘 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마족과 다를 게 뭐냐. 뭐든 적당한 게 좋은 거야.”
“제가 꼭 그걸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평소와 달라서 여쭤 본 겁니다.”
“다르긴 뭐가 달라. 내가 얼마나 여리고 착한 사람인데.”
“여리고 착하다고요? 농담이 심하십니다?”
“아 나, 이 자식은 자기 생각하고 다르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 전생이 개였냐?”
“전생이 뭡니까?”
이세계의 사람인 파비안은 전생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몰라도 돼 인마.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나자.”
“잠깐 만요. 여기 와인이 제법 맛있습니다. 드셔 보십쇼.”
맛있다는 말에 엘리오도 빈 잔에 와인을 따라 마셨다.
과연!
달콤쌉싸름하면서 새콤한 게 입맛에 맞았다.
엘리오는 일어나자고 했던 것을 잊고 와인에 빠져들었다.
그러는 동안 만찬장에 있던 귀족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갑자기 히르헤라에 가게 된 터라 놀고먹을 마음이 식은 것이다.
잠시 후 넓은 만찬장에는 엘리오와 파비안, 기사단, 칼슨 겔러거 자작의 가족, 그리고 초대받아 온 바르도스들만 남게 되었다.
공연이 끝났지만 바르도스들은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칼슨 겔러거 자작의 눈치만 살폈다.
밤이 깊어지자 에리카가 나타샤 벨라 자작에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 공연은 끝난 것 같은데…….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다. 원래는 제도(帝都)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다른 계획이 있으세요?”
“히르헤라에서 공연을 좀 해 볼까 한다. 네가 있는 곳이 크리소페디오라고 했지?”
“네.”
“그곳에 우리가 머물 방이 있겠느냐?”
“주인에게 말하면 그 정도는 마련해 줄 거예요.”
“그곳 분위기는 좀 어떠냐?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 간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그러하냐?”
“마족과의 전쟁 전에도 일반 거주 지역은 안전했어요. 마족 군단이 물러간 뒤로는 한동안 마물도 뜸하다고 하더라고요.”
“안전하다는 얘기구나.”
“예.”
“별문제가 없다면 당분간 히르헤라에 머물러야겠다.”
“히르헤라 주둔지의 기사와 병사 들에게는 희소식이겠네요. 하지만 제도의 대귀족들이 선생님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히르헤라에서 공연을 한다고 하면 그들도 뭐라 하지 않을 게다. 히르헤라에 제국군도 있으니까.”
“저야 선생님이 오신다면 좋지만……. 괜히 무리하지는 마세요. 우리는 기사가 아니라 바르도스잖아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말을 들으며 반성 많이 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바르도스라는 핑계로 북부의 위기를 모른 척했으니까. 우리가 칼을 들 힘은 없지만, 그래도 기사와 병사 들을 위로할 수는 있지 않느냐. 바르도스니까 무리하지 마라가 아니라, 무리가 되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에리카는 고개를 숙였다.
스승의 말을 들으니 단지 돈벌이를 위해 히르헤라에 갔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나에 비하면 너는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히르헤라에서 공연을 하다니. 어지간한 바르도스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네가 바르도스의 체면을 살렸구나.”
‘아니에요. 돈을 더 많이 준다고 해서 응한 것뿐이에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에리카는 꾹 눌러 참았다.
“그런데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는 어떤 사이냐?”
“크리소페디오의 단골들이세요.”
“단지 그뿐이냐?”
나타샤 벨라 자작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에리카를 보았다.
“저는 더 친해지고 싶은데……. 바르도스나 저에 대한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으세요. 철벽이에요. 철벽.”
“후후. 철벽이라는 걸 보니 들이대기는 했던 모양이구나.”
“마음의 문을 안 열어 주더라고요.”
“칼슨 겔러거 자작에게 하는 걸 보니 그러고도 남겠더라.”
“꽉 막혔죠?”
“그래도 자작을 심하게 대하지 않은 걸 보면……. 배려심 깊은 사람이다.”
“배려심요? 뭘 봐서요?”
“기사단 부단장의 머리를 탁자에 처박았지만……. 칼슨 겔러거 자작은 그렇게 화가 났으면서도 그냥 두었잖니. 자작의 가족들 앞이라 그랬을 게다.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
에리카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자리를 힐끔 보았다.
스승의 말대로 칼슨 겔러거 가족들 때문에 봐준 거라면 정말 존경할 만했다.
대귀족들은 죄인의 가족들까지 몰살시키는데 오히려 그 반대라니?
“선생님, 저 자작님과 한잔하러 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에리카.”
“네?”
“너는 바르도스의 재능만 있는 게 아니라, 여자로서도 매력이 넘친다. 그러니 지레 겁먹고 포기하지 말거라.”
“저분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네요.”
“남자들이 보는 눈은 똑같다. 젊은 귀족들이 너에게 환호하지 않든. 그도 결국은 남자라는 걸 잊지 마라.”
“그 말을 들으니 힘이 나네요.”
에리카는 나타샤 벨라 자작에게 묵례를 해 보인 후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저도 한잔 주세요.”
에리카는 자연스럽게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엘리오는 에리카를 쳐다보지도 않고 와인이 든 병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에리카는 조금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빈 잔에 와인을 가득 따랐다.
에리카는 두 손으로 커다란 황동잔을 움켜잡았다.
둘 중에 하나가 만취해 쓰러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 오늘 한번 끝까지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