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24
1124회.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
엘리오는 옆자리 사내를 힐끔 살폈다.
시세가 어쩌고 하면서 일행과 떠드는 것 같더니 귀를 열어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래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는 거다.
“오마르 백작이 유명한 사람이에요?”
엘리오가 속삭이듯 말하자 상인도 옆자리에서나 겨우 들릴 만한 소리로 물었다.
“어디에서 오신 기사님들이십니까?”
“에스카토스 왕국요.”
그제야 상인이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베일럼의 호랑이로 알려진 분이십니다. 북부 최강의 기사시죠.”
“북부요?”
엘리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정도 고수면 히르헤라에도 이름이 알려졌을 텐데 금시초문인 까닭이다.
“베일럼 북부요.”
“아하.”
엘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륙 북부를 말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베일럼 북부란다.
“좋은 영주인가요?”
그 질문 앞에서 상인은 멈칫했다.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지역의 주인에 대한 평가니 조심스러운 것이다.
“거기까지는 저도 모릅니다만 훌륭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상인의 대답에 엘리오는 피식 웃었다.
모른다는 말이 진심이고 뒷말은 대귀족이라 가져다 붙인 것이리라.
“이 지역 분이 아닌가 봐요?”
“그렇습니다. 저희 아미쿠스 상단은 베일럼 남부에 있습니다. 기사님들은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예.”
“그럼 히르헤라 지역에 대해서도 좀 아십니까?”
상인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엘리오도 더 이상 얻어 낼 정보가 없음을 알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조금은요.”
“히르헤라는 아직도 군대가 출입을 막고 있습니까?”
“풀린 지 좀 됐습니다.”
“아! 그럼 상단도 출입이 가능합니까?”
“오히려 환영할걸요? 도시로 바뀌고 있는 중이니까요.”
“에이! 진짜 아는 거 맞습니까? 사람도 없는 설원에 누가 도시를 건설한다고.”
상인의 말에 파비안이 끼어들었다.
“말이 심하군. 기사가 뭐 아쉬워서 상인에게 거짓말을 하겠나?”
나무라는 듯한 파비안의 말에 상인은 금세 눈을 내리깔았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놀라서 그런 거지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상인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상대가 귀족인 것 같아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히르헤라에 대한 관심은 상인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제럴드 로건 백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기사 둘이 엘리오와 파비안의 옆으로 다가왔다.
엘리오와 파비안이 돌아보자 그중 한 사람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데니스 라이브 남작이고, 이쪽은 내 동료입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실례가 아니라면 합석을 해도 되겠습니까?”
파비안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엘리오는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옮겨 앉았다.
합석을 해도 된다는 뜻이다.
거리낄 게 없던 파비안도 옆으로 옮겨 앉았다.
데니스 라이브 남작과 그의 일행이 엘리오와 파비안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낯선 두 기사가 착석하자 파비안이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나는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이고, 저쪽은 나와 동행 중인 기사입니다.”
데니스 라이브 남작과 그의 일행은 동행 중인 기사를 힐끔 보았다.
젊은 나이를 보니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의 종자가 분명했다.
데니스 라이브 남작이 동료라고 소개한 기사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와일드 바움 남작입니다. 히르헤라에 대한 말씀을 하시던데……. 정말 그곳에 도시가 들어서고 있습니까?”
파비안은 그제야 두 기사가 히르헤라에 대한 호기심으로 찾아왔음을 알아차렸다.
하기야 남작쯤 되면 한창 피가 끓을 때니 궁금하기도 할 게다.
“맞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수십 채의 석조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바르도스가 공연을 하는 술집도 있으면 말 다한 거 아닙니까?”
“오!”
“굉장하군요.”
데니스 라이브 남작과 와일드 바움 남작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사실 석조 건물의 개수보다 확실한 게 바르도스의 공연이다.
바르도스의 공연이 열린다는 것은, 그것을 즐길 상류층 숫자가 많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구 분포는 피라미드형이다.
상류층 숫자보다 열 배, 백 배쯤 많은 게 중, 하류층 숫자다.
그러니 ‘바르도스의 공연이 열린다’는 말에 두 기사가 감탄한 것이다.
젊어서 그런지 데니스 라이브 남작은 바르도스의 공연에 관심을 보였다.
“히르헤라에서 공연을 하는 바르도스가 누군지 아십니까?”
“에리카 양이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나타샤 벨라 자작도 공연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오! 미성의 에리카? 맞습니까?”
“예. 정말 목소리가 아름답더군요.”
파비안은 ‘아차!’ 싶은 얼굴로 데니스 라이브 남작을 보았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히르헤라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나 다름없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데니스 라이브 남작이 바로 물어왔다.
“혹시 히르헤라에 계셨습니까?”
“예.”
순간 엘리오가 탁자 밑으로 파비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파비안은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히르헤라 주둔지에서 복무를 했습니까? 아니면 히르헤라에 있었던 겁니까?”
“균열 감시 부대인 루퍼스 중대장을 역임했습니다.”
파비안은 딱히 숨길 이유가 없는 터라 사실을 밝혔다.
순간 데니스 라이브 남작과 와일드 바움 남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건 눈앞의 기사가 히르헤라 주둔지에서 복무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와일드 바움 남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럼 균열로 마족 군단이 쳐들어온 것도 봤습니까?”
“봤냐고요? 싸움도 했습니다. 다행히 인간의 승리로 끝났고요. 우리가 졌다면 이곳도 전쟁에 휘말렸을 겁니다.”
“와아!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어이! 아가씨! 여기 맥주 네 잔 가져와! 안줏거리도 듬뿍 가져오고.”
이어 와일드 바움 남작은 파비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고생하신 기사들을 위해 내가 사겠습니다.”
파비안은 사양하지 않고 감사의 뜻으로 가볍게 묵례를 해 보였다.
베일럼의 기사들은 히르헤라에 군대를 파병한 나라답게 전쟁영웅을 대접할 줄 알았다.
잠시 후 여점원이 새 맥주와 안주를 가져왔다.
데니스 라이브 남작과 와일드 바움 남작은 마족과의 전쟁에 대해 물었다.
비록 베일럼 왕국이 군대를 파병했지만 말단 귀족에게까지 고급 정보가 전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귀족 사회를 잘 아는 파비안은 적당한 선에서 답을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번에는 파비안이 지나가듯 말했다.
“실은 조금 전에 두 분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 두 분 목소리가 좀 커서…….”
그러자 데니스 로빈 남작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 좀 흥분을 했습니다.”
“두 분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님과 가까운 것 같던데.”
“우리가 모시는 마일로 워커 자작님이 라르바 오마르 백작님 라인이라서요.”
“아, 그쪽 라인이시구나.”
파비안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귀족들 모임의 성격은 다양하다.
동맹이나 연합이 대등한 관계라면, 라인은 상하 관계로 맺어짐을 뜻한다.
그렇다고 가신은 아니다.
가신이 영주와 생사를 함께한다면 라인은 조금 더 자유로웠다.
라인은 지향점이 같을 때만 상하의 관계를 유지했다.
‘응? 1왕자 쪽이 패했는데 아직도 라인이라고?’
파비안은 그 부분이 이상했지만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목적은 상실했어도 의리상 라인을 지속하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다.
네 기사의 술자리는 유쾌하게 끝났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그 자리에 남았고, 데니스 라이브 남작과 와일드 바움 남작은 여관 겸 술집을 떠났다.
밤이 깊어 갔다.
술집 손님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을 무렵, 엘리오가 말했다.
“근데 마일로 워커 자작은 왜 아직도 라인에 있는 거지? 뭐가 남았다는 건가?”
“인간관계가 칼로 무 자르듯 간단히 끝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고?”
“없을 겁니다. 2왕자가 왕위를 이어받았고,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2왕자 측근인 제럴드 로건 백작에게 붙었잖습니까.”
“그런데 왜 아직도 라르바 오마르 백작 밑에 있는 거야?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상황도 좋은 것 같지 않던데.”
“모르죠.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십쇼.”
“미쳤냐? 내가 베일럼 왕국 귀족들 일에 왜 끼어들어?”
“와우! 자작님에게 그 정도 분별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지랄. 내가 뭘 어쨌다고.”
“지금까지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셨잖습니까.”
“내가?”
“예, 제가 자작님을 만난 이후로 늘, 언제나, 그러셨습니다.”
“속단하지 마. 그런 걸 두고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라고 하는 거야.”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요?”
“늦었다. 자자.”
말문이 막힌 엘리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파비안은 마지못한 얼굴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뒤를 따랐다.
***
라르바 오마르 백작령.
다크포레스트.
정오 무렵.
말을 탄 두 명의 기사가 아름드리나무로 우거진 숲길에 접어들었다.
엘리오와 파비안이다.
두 사람 모두 지친 말을 위해 속도를 내지 않았다.
말의 흔들림에 맞춰 상체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숲은 오랜만이다.
촘촘하게 자란 나무들로 대낮임에도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여기가 다크포레스트라고 했지?”
“예.”
“진짜 어둡다. 대낮인데도 초저녁 같네. 도적들이 살기 좋겠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지나친 마을에서 도적을 만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도적이래도 이런 데서 살겠다.”
“상인들은 무리를 짓지 않으면 진입하지 않는답니다.”
“야아! 이건 정말 하늘이 도적질을 하라고 만들어 준 거야.”
녹림 출신인 엘리오의 입에서 연신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리가 기사인 걸 알면서도 털겠다고 덤벼들 도적이 있을까요?”
“왜? 도적을 토벌하고 싶어?”
“찾아다니지는 않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해야죠. 자작님은 안 그렇습니까?”
“뭐…… 그렇지.”
대답을 얼버무린 엘리오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서늘한 날씨에 나무 그림자까지 더해져 음산한 느낌이다.
문득 엘리오는 쫑긋 귀를 세웠다.
멀리서 희미하게 쇠붙이 부딛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싸움 났다.”
“누군가 도둑을 만났나 보군요. 어딥니까?”
파비안은 말 위에서 상체를 틀어 가며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한참 더 들어가야 돼. 이제 시작된 것 같으니까 가 보자.”
말과 함께 엘리오가 말의 배를 가볍게 찼다.
깜짝 놀란 말이 앞으로 치달렸다.
파비안도 서둘러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뒤를 따랐다.
열 명의 기사들이 거세게 저항하자 그들을 공격하던 삼십 명의 기사들은 재빨리 뒤로 빠졌다.
순간 뒤쪽에서 대기하던 열 명의 총사대가 마력총을 난사했다.
퍼퍼퍼펑―!
퍼펑―!
마력탄에 맞은 기사들의 갑옷이 ‘푹푹’ 우그러들었다.
두 명의 기사가 운 없게 마력탄을 얼굴에 맞고 절명했다.
가신들이 죽자 초로의 기사가 절규를 터뜨리며 총사대에게 달려들었다.
슈아악! 슈악!
섬전 같은 그의 칼질에 총사들이 고꾸라졌다.
연이어 다른 총사들에게 달려가던 기사가 돌연 허리를 꺾었다.
“쿨럭! 쿨럭!”
격하게 기침을 하는 그의 입에서 붉은 피가 튀어나왔다.
그사이 총사들은 허겁지겁 숲으로 달아났다.
피를 토하는 초로의 기사와 일곱 명의 기사 사이를 삼십 명의 기사가 막아섰다.
초로의 기사, 베일럼의 호랑이로 불리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마일로 워커! 이 쓰레기 같은 놈! 네놈은 기사들의 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