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28
1128회. 페르모사 에스텔라(빛나는 별)로 모시겠습니다
테살로스 협곡 좌우편 숲이 우박처럼 쏟아진 진검강에 초토화됐다.
아름드리 나무는 산산조각 났고, 땅거죽에도 구멍이 숭숭 뚫렸다.
암습자들은 쓰러지고 부러진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소드마스터의 능력이라고?”
그럴 리 없다.
자신이 소드마스터에 근접했기에 알 수 있다.
물론 비슷한 결과물을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이토록 짧은 시간에 협곡 양쪽을 저렇게 작살낼 수는 없다.
소드마스터 두 명이 칼춤을 춘다면 혹 모를까?
군신(軍神)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이 되살아난다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옆에 있던 파비안이 한마디 거들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대단이라고? 아니 그 이상이네. 단언컨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소드마스터가 아니네. 그는 아마도…….”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말끝을 흐렸다.
‘그랜드 마스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건 아직 소드마스터도 되지 못한 자신이 거론할 단어가 아니었다.
협곡을 쓸어 보던 엘리오가 짧게 소리쳤다.
“죽은 척하지 말고 튀어나와! 안 튀어나오면 다시 한번 갈아엎는다.”
그의 협박에 양쪽 협곡에서 꾸물꾸물 생존자들이 기어 나왔다.
총사가 다섯이고 기사가 넷이었다.
엘리오의 시선이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기사들에게로 향했다.
“마일로 워커 자작?”
엘리오의 말에 마일로 워커 자작이 움찔 몸을 떨었다.
“도둑인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래? 자작에게 총사대가 있을 리는 없고. 총사대 누구 거야?”
“용병으로 고용한 사람들이오.”
“헛소리 하지 말고. 당신 누구 밑에서 일해?”
“나는 최근까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위해 일했소.”
마일로 워커 자작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엘리오는 답답해 하지 않았다.
분근착골이라는 좋은 수단이 있는데 뭐가 아쉽다고 화를 내냐 말이다.
“내가 ‘힘줄을 나누고 뼈를 어긋나게[分筋錯骨]’ 하는 고문수법을 알고 있거든? 이걸 쓰면 백이면 백 다 불게 되어 있어. 순순히 말할래? 아니면 그 방법을 써 줄까?”
마일로 워커 자작이 피식 웃었다.
아무렴 소드 익스퍼트의 기사가 고문 따위에 굴복할까.
“마음대로 하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오가 손가락을 튕겼다.
퍼퍼퍼퍽―!
혈도가 찍히자 마일로 워커 자작의 몸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으악! 그만! 말하겠소! 그만해! 말하겠다고!”
그의 비명에 엘리오는 격공점혈로 분근착골을 풀었다.
그리고 기막힌 얼굴로 헐떡이는 마일로 워커 자작을 내려다보았다.
분근착골을 시작하고 숨 한 번 쉴 동안 항복하다니!
지금까지 분근착골을 한 이래 가장 포기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구의 총사단이라고?”
“저들은 스벤 하우저 자작이 데리고 온 총사들이오. 물어보면 알겠지만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가의 총사들일 것이오.”
순간 총사대 대장 발테르 스카르스 남작이 소리쳤다.
“마일로 워커 자작! 신의를 저버리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기사인가!”
그러나 마일로 워커 자작은 만사 포기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 한 지점을 응시하기만 했다.
엘리오가 소리를 지른 총사에게 다가갔다.
“숨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암습이나 해 댄 사람이 어디서 큰소리야? 당신 이름 뭐야?”
“발테르 스카르스 남작이오.”
발테스 스카르스 남작은 이미 뒷배가 폭로되었기에 당당하게 자신을 밝혔다.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가의 총사대 맞아?”
“그렇소.”
“백작이 보냈어?”
“나는 백작님의 명만 듣소.”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이 보냈다는 소리다.
“네블라 어쩌고가 보냈다 이거지? 내가 백작과 무슨 원한이 있다고 나를 노렸대? 순 쌍놈의 새끼네?”
“백작님을 모욕하지 마시……. 악!”
엘리오의 주먹질에 주군을 옹호하던 발테르 스카르스 남작이 뒤로 나뒹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화가 난 엘리오는 쓰러진 발테르 스카르스 남작을 쉬지 않고 걷어찼다.
“이 개새끼야! 너는 뭐 착한 놈인 줄 알아? 나하고 무슨 원한이 있다고 숨어서 마력총을 쏴 대! 너는 도둑보다 더 나쁜 놈이야! 너는 모욕이라는 말을 할 자격도 없어!”
“악! 악! 아악!”
발테르 스카르스 남작은 발에 차일 때마다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 댔다.
분이 풀릴 때까지 걷어차던 엘리오가 마일로 워커 자작을 돌아보았다.
“마일로 어쩌고 씨.”
“나, 나를 부르는 거요?”
“그래 당신. 네블라 어쩌고 백작에게 가서 전해. 살고 싶으면 한 달 내에 히르헤라로 가라고 해. 가지 않으면 내가 백작가를 없애 버릴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백작에게 파병을 가라는 거요?”
“파병을 가든, 딸랑 혼자 가든, 그건 알아서 할 일이고. 히르헤라에 네블라 백작이 안 보인다? 그럼 내 손에 죽는 거야. 이 사람들 싹 다 데리고 내 눈앞에서 꺼져.”
마일로 워커 자작은 기사와 총사 들을 챙겨 달아나듯 자리를 피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이 엘리오에게 다가갔다.
파비안이 알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
“자작님, 그렇게 히르헤라가 신경 쓰이십니까? 당분간 마족 군주가 쳐들어올 일도 없지 않습니까?”
“방랑하는 마족이 떠돌아다니다가 균열을 발견할 수도 있잖아. 빙벽 주변에 마물도 많고. 미리미리 대비하는 거지.”
가만히 듣고 있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런데 자작의 검술은 난생처음 봅니다. 이름을 뭐라고 합니까?”
엘리오의 검술을 목격한 그는 말투부터 바꿨다.
소드마스터보다 뛰어난 상대에게 계속 하오체를 쓸 수가 없어서다.
“나인 스카이 검술입니다.”
“아! 나인 스카이. 혹 창시자가 누군지 알 수 있습니까?”
엘리오는 검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것을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뻘쭘한 얼굴로 물러났다.
잠시 후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엘리오 일행은 테살로스 협곡을 벗어났다.
테살로스 협곡에서 벌어졌던 싸움 이후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그의 친위대는 엘리오를 극진히 모셨다.
특히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엘리오를 공작처럼 받들었다.
말투는 더욱 정중해졌고, 매사에 그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았다.
테살로스 협곡을 벗어난 다음 날.
마침내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엘리오 일행은 백작의 성에 도착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엘리오와 파비안을 극진히 대접했음은 물론이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백작의 성에서 여독을 풀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엘리오와 파비안은 다시 길 떠날 채비를 했다.
소식을 들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자작님, 며칠 푹 쉬시지 벌써 가려 하십니까?”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페트로폴리스(제국 수도)로 간다고 하셨지요?”
“예.”
“저어, 혹시 제가 동행을 해도 되겠습니까?”
“백작님이요?”
“예, 최근 몇 년 동안 검술에 진전이 없습니다. 깨질 듯 깨질 듯 깨지지 않는 벽 앞에 선 기분이랄까요? 자작님의 옆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폐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나와 함께 가도 괜찮겠어요? 베일럼에서 백작님 입지가 좋은 것 같지 않던데.”
“베일럼에 남아 있어 봐야 상황이 더 꼬이기만 할 겁니다. 제가 소드마스터에 올라야 풀어질 일들입니다.”
엘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베일럼에 남아 대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사느니 당분간 떠나 있고 싶은 모양이다.
“동행하는 동안 내가 백작님 일에 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동행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백작은 살짝 실망한 얼굴이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함께 지내다 보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찾아오리라 믿었다.
그렇게 해서 엘리오의 제도행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추가됐다.
***
론디니움 제국.
페트로폴리스.
‘오늘날 로디나 대륙의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론디니움 제국이라 답할 것이다.
제국과 전쟁을 치른 왕국의 백성들조차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십 년 전 제국은 왕국 대통합 전쟁을 끝낸 뒤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제국에 흡수된 왕국의 문화를 압살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제국은 문화의 중심이 됐다.
제국이 발전시킨 대표적인 것이 바르도스다.
하프를 연주한다거나, 연주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로디나 대륙 사람들은 유명한 바르도스의 이름과 그들이 발표한 노래에 열광했다.
대귀족들 사이에 바르도스를 후원하는 게 유행이 됐고, 후원이라는 명목으로 바르도스를 선점해 왕가 행사에서만 노래하게 하는 왕족도 있었다.
페트로폴리스에 도착한 엘리오 일행이 가장 처음에 본 것은 바르도스의 공연을 알리는 벽보였다.
엘리오가 벽면에 빼곡히 붙은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와아! 이거 뭐야? 바르도스의 공연을 알리는 벽보가 뭐 저렇게 많아?”
“그러게요. 열 개가 넘네요?”
파비안도 벽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퇴색한 낡은 벽보 위에 새로 붙인 벽보만 열 개가 넘었다.
제도에 와 봤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다.
“그건 전부 술집 주인들이 붙인 겁니다. 귀족가의 행사는 공개되지 않으니까요.”
“그럼 바르도스의 숫자도 엄청 많겠네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질문에 백작은 잠시 계산하더니 답했다.
“페트로폴리스에서 활동하는 바르도스만 백여 명쯤 될 겁니다.”
“미쳤다.”
“그러게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놀고먹다니 뭔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엘리오의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남경에 있는 예기(藝妓)들 숫자도 그보다 많았다.
바르도스를 예기와 비교하면 도시 규모를 생각할 때 오히려 적었다.
이세계의 바르도스가 진짜 예술가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잘 차려입은 중년인이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기사님들. 혹시 아직 갈 곳을 결정하지 않으셨다면 저희 페르모사 에스텔라(빛나는 별)로 모시겠습니다.”
셋 중에 가장 신분이 낮은 파비안이 일행을 대신해 나섰다.
“페르모사 에스텔라요?”
“향긋한 술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아늑한 잠자리가 있는 곳입니다. 물론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아가씨들과의 만남도 가능하고요.”
순간 혹한 파비안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파비안이 엘리오를 힐끔 돌아보자 엘리오가 말했다.
“파비안, 우리는 마탑 근처에 방을 얻어야 해.”
“아, 맞다. 마탑.”
들떠 있던 파비안의 눈빛이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중년인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잘됐습니다. 저희 페르모사 에스텔라와 가까운 거리에 아브락사스 학파의 마탑이 있으니까요.”
파비안이 후끈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가깝답니다!”
그러자 엘리오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얼마나 가까워요?”
“저희 가게에서 아브락사스 학파의 마탑이 보일 정도입니다.”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도시에서 마탑이 보일 정도면 상당히 가까운 까닭이다.
“술, 음식, 숙소까지 다 있는 거 맞죠?”
“거기에 덧붙여 별처럼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해변가의 모래알처럼 많습니다.”
중년 사내의 뻔뻔한 말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피식 웃었다.
청년이 둘이나 있다고 시종일관 아름다운 아가씨 타령이다.
엘리오는 딱히 갈 곳이 있는 게 아닌지라 사내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가 보죠.”
그가 허락하자 중년 사내는 현란한 손놀림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