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30
1130회. 어느 정도 각오가 필요할 게요
론디니움 제국에는 열세 개의 마법 학파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게 헤르메티카, 파라바하드, 타불라 학파고, 사람들은 그들의 마탑을 삼대마탑이라 불렀다.
삼대학파를 제외한 나머지 학파들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형국이었다.
제국전쟁 이후 마법사 지망생들이 삼대학파로만 몰린 결과다.
마법사 지망생들이 삼대학파로 몰려간 이유는 간단하다.
삼대학파가 ‘신성마법’과 ‘원소 마법’, 그리고 ‘연금술’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헤르메티카 학파’는 마나 프트라스 교단의 사람들에게만 신성마법을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타 학파와의 경쟁도 없었다.
‘파라바하드 학파’는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전투마법사를 양성했다. 제국전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것도 파라바하드 학파의 마법사였다.
‘타불라 학파’는 ―황실 편에 선 파라바하드 학파와 달리― 대귀족들과 손을 잡았다. 그들은 대귀족들의 후원 속에 연금술(마공학)로 마력총, 마력포, 골렘을 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외의 마법 학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들도 뒤늦게 전투 마법과 마공학에 매달렸다.
하지만 삼대 마법 학파와 다른 마법 학파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졌다.
제도 북구의 아브락사스 학파의 경우 최근 마공학에 뛰어들었지만, 마탑의 재정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아브락사스 마탑 1층.
마탑 안내인 클라라는 마력이 담긴 아티팩트의 감정을 위해 마탑의 2인자이자 아티팩트 제작가인 5서클 메이지 크랙 엘마레를 모시고 왔다.
크랙 엘마레의 시선이 빠르게 젊은 기사를 훑었다.
청년의 전신에서 숲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영기 수련자다.
다만 영기가 어찌나 깊은지 대수림(大樹林)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보통은 아니라는 거군.’
크랙 엘마레는 대략적으로 상대의 정보를 추측한 후에 입을 열었다.
“나는 아티팩트 제작가인 메이지 크랙 엘마레요. 그쪽을 뭐라고 부르면 되겠소?”
“엘리오 라고아 자작입니다.”
크랙 엘마레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기의 깊이를 생각하면 그 정도 작위는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제국의 자작은 내가 어느 정도 꿰고 있는데……. 왕국 출신이오?”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작위를 받았습니다.”
“역시 그랬군. 특별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 들었소.”
엘리오가 품에 넣었던 수정 목걸이를 다시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트레듀서라는 이름의 아티팩트입니다. 마족의 언어를 통역해 준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사용도 했지만 엘리오는 ‘들었다’고 했다.
타메이온에 가서 벌인 일들을 끄집어내고 싶지 않아서다.
크랙 엘마레도 클라라처럼 검은 수정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에 흠칫했다.
하지만 5서클 메이지답게 그는 즉시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뒤이어 4서클 마법 ‘진실의 눈’으로 목걸이를 관찰하던 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고대의 중첩 마법진인가!”
한참 들여다보던 크랙 엘마레가 목걸이에서 눈을 뗐다.
몽롱한 눈빛이 꽤나 감명을 받은 것 같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가 말했다.
“통역이 마족 언어 한정이라면 아티팩트의 성능은 중급이라 할 수 있소. 그러나 고대의 중첩 마법진은 그 자체로 귀한 보물이오. 우리가 구매하고 싶은데……. 솔직히 경이 원하는 금액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소.”
클라라는 찍소리도 하지 않고 옆에서 구경만 했다.
메이지들에게 마법을 배우는 디사이플이 끼어들 자리가 아닌 까닭이다.
크랙 엘마레가 아쉬운 얼굴로 목걸이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아까도 옆에 계신 분께 말했지만 꼭 팔겠다는 생각을 가진 건 아닙니다.”
크랙 엘마레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클라라를 보았다.
“탑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방문하신 거랍니다. 경비병이 들여보내 주지 않아서 거래를 할 수도 있다고 하신 거고요.”
“아하.”
잠시 생각하던 크랙 엘마레가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말했다.
“이러면 어떻소. 탑주님과 만나게 해 줄테니, 이 목걸이를 열흘간 우리 마탑에 임대해 주시오. 임대 기간 동안 목걸이를 파손하면 그에 합당한 금액으로 보상해 드리겠소.”
“좋습니다.”
엘리오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다시 사용할 일도 없는 목걸이로 이게 웬 횡재인가 싶다.
크랙 엘마레는 마법사답게 그자리에서 꼼꼼하게 두 장의 임대 계약서를 작성했다.
***
아브락사스 마탑 최상층.
탑주 집무실.
원탁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엘리오와 아브락사스 마탑의 당대 탑주 5서클 메이지 발테르 오드다.
간단한 소개를 마치자 발테르 오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나와 만나자고 하셨소?”
상대가 같은 자작인지라 발테르 오드는 하오체를 사용했다.
“천공성에 대해 여쭤 보려고요.”
“천공성이라면 태양신 카마 데비아스의 거처를 말하는 것이오?”
“예, 만나는 사람마다 ‘천공성을 찾으려면 마탑으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흐음! 나도 그런 소문은 들었소만……. 어느 마탑을 말하는 건지 모르지만, 일단 나는 잘 모르오. 내가 알고 지내는 탑주들도 나와 비슷할 거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건가요?”
“그렇소.”
“다른 탑주님들을 다 만나 봐야겠네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래야 할 게요. 그런데 천공성을 왜 찾으려는 거요?”
“개인적으로 카마 데비아스와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요.”
개인적이라는 말에 발테르 오드는 더 묻지 않았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실망한 듯하자 그가 말했다.
“아티팩트까지 임대해 주었는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오.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제도 북구에 있는 탑주들과 만날 수 있게 해 드리리다.”
“아, 감사합니다.”
“제도 북구에 있는 마탑은 모두 5개요. 북구 지역 탑주들의 정례 모임이 다음 달에 있소. 장소와 날짜, 시간이 정해지면 초대장을 보내 드리리다. 머무르는 곳이 어디요?”
“페르모사 에스텔라에 있습니다.”
“아! 거기라면 숙박료가 만만치 않을 텐데. 돈이 많은가 보오? 영지라도 있소?”
“슬래시 랜드의 영주이긴 합니다만, 이번 여행의 경비는 다른 사람이 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구려. 알겠소. 구체적인 날짜가 정해지면 그곳으로 초대장을 보내리다.”
“예.”
“탑주들 중에는 성격이 괴팍한 사람도 있으니……. 어느 정도 각오가 필요할 게요.”
“각오라고 하심은?”
“상대가 다소 지나친 행동을 해도 참고 넘기라는 소리요. 그래도 초대한 사람의 체면이 있으니 선은 넘지 않을 것이오.”
“주의하겠습니다.”
“누워서 침 뱉기지만, 마법사들 중에 워낙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 험, 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아쉬운 사람이 참아야지요.”
엘리오는 정말 어지간하면 마법사들의 비위를 맞춰 줄 생각이었다.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발테르 오드가 말했다.
“그런데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왔으면 히르헤라의 일도 좀 아시오?”
“예. 그곳 영주인 코드란테스 백작님과도 안면이 있습니다.”
“오! 정말 창조신의 스쿠툼(Scutum, 방패)에 구멍이 뚫렸소?”
“구멍이라기보다는 양쪽으로 쫙 갈라졌습니다. 북부에서는 균열이라고 부릅니다. 마수와 마물이 떼로 드나들 정도로 큽니다.”
“마족 군단이 쳐들어온 걸 물리쳤다고 하던데. 그것도 사실이오?”
“사실입니다. 희생자도 많이 나왔습니다.”
“혹시 경도 히르헤라에 있었소?”
발테르 오드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하도 실감 나게 말해서 슬쩍 떠보았다.
“예.”
“아아! 어쩐지 남의 일처럼 말하지 않는다 싶었소.”
이번에는 엘리오가 물었다.
“제국의 마법 병단과 전투 사단도 지원을 왔었는데……. 히르헤라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보다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제국인들이 대륙 북부에 관심이 없는 것도 있지만……. 황궁에서 의도적으로 히르헤라의 정보를 차단해 그렇소.”
“황궁에서 차단했다고요? 오히려 널리 알려 대비하게 해야 하지 않나요?”
“북부 왕국들이 마족의 침공을 잘 막아 낸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남부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요. 지금 히르헤라의 일이 공개되면 남부에 있는 병력을 모두 북부로 돌려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은 게요.”
“그러니까 남부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려고 북부 소식을 차단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소.”
엘리오는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그보다는 ‘탑주가 어떻게 남부의 상황을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탑주님은 마법사인데 제국군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
“우리 마탑에서도 군대에 전투마법사를 파견하기 때문이오. 삼대마탑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그래도 제국군의 동향 정도는 알 수 있소.”
“아! 그러시구나.”
엘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탑에서 제국군에 전투마법사를 파견한다는 건 몰랐다.
코르보 마법 병단의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도 그런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었다.
마탑을 마법사들의 단체라고만 생각했는데 황궁과 그런 관계라니 놀라울 뿐이다.
‘북부 왕국들이 히르헤라를 잘 지켜 주니까 남부에서 발을 안 뺐구나.’
아니 어쩌면 마족의 침공보다 어비스의 유물에 더 관심을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심이란 이렇듯 한심하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제국도 초토화됐을 텐데.
‘쯧쯧! 멸망이 비껴 간 걸 모르고 남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대화는 흐지부지 끝났다.
탑주는 북부의 일을 더 묻지 않았고, 엘리오도 남부의 사정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
페르모사 에스텔라.
마탑을 나선 엘리오는 해거름 무렵 페르모사 에스텔라로 돌아갔다.
일찌감치 식당에 나와 있던 파비안이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엘리오는 파비안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갔던 일이 잘 안 됐습니까? 표정이 영 아닌데요?”
“잘 안 된 것도 아니고, 잘된 것도 아니야. 꼬집어 말하라면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는 거?”
“마탑에서 뭐라고 했는데요?”
“탑주를 만났는데 자기는 천공성에 대해 아는 게 없대. 대신 다음 달 북구 지역 마탑주 모임에 초대해 주기로 했어.”
“한 달을 기다리라는 소리네요?”
“그렇지.”
“그냥 오늘처럼 마탑을 찾아가시죠?”
“야, 말도 마. 약속이 잡혀 있거나, 거래할 물건이 없으면 들어가지도 못해.”
“오늘은 어떻게 들어갔는데요?”
“부라퀴족에게 받은 목걸이를 거래한다는 핑계로 겨우 들어갔다.”
“그 목걸이로 다른 마탑도 들어가면 되잖습니까?”
“그걸 아브락사스 마탑에 열흘간 빌려주기로 하고 탑주를 만난 거야. 돌려받으려면 최소한 열흘은 기다려야 돼.”
“와아! 마법사들이 손해 보는 짓은 절대 안 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러네요? 그냥 만나게 해 주지, 뭘 조건을 걸어.”
“그러네.”
엘리오는 뒤늦게 자신이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했다. 목걸이를 임대해 주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다른 마탑을 방문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쇼. 분명히 다른 마탑도 목걸이를 빌려 달라고 했을 겁니다. 그들을 다 만나려면 최소한 50일이 걸립니다. 차라리 다음 달에 한자리에서 만나는 게 더 낫습니다.”
“그렇지? 생각해 보니 그러네. 역시 여러 사람 생각을 들어 봐야 한다니까.”
“그나저나 경비가 장난 아니겠는데요? 하루에 최소한 10실버를 써야 하는데…… 한 달이면……. 허! 300실버네요?”
“…….”
엘리오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의 전재산이 300실버 남짓이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땀에 절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독립된 수련장에서 검술 수련을 하다가 온 모양이다.
돈 얘기 끝이라 그런지 평소와 달리 엘리오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