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35
1135회. 그건 사실과 조금 다릅니다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이 열띤 얼굴로 엘리오를 보았다.
천공성의 비밀을 푸는 것은 마탑의 오랜 숙원이었다.
오죽하면 누가 지었는지도 모를 ‘천공성’이라는 고대의 시 한 편에 세 권의 연구서를 남겼을까.
게다가 후작은 개인적으로 시와 음악의 애호가다.
이래저래 그녀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혼자서 신이 난 후작을 머쓱한 얼굴로 보던 엘리오가 정중하게 요청했다.
“부탁드립니다.”
기다렸다는 듯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의 입술이 열렸다.
천공성.
누가 그곳에 있느냐?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곳, 아우로라이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히페리온의 사자(獅子)는,
바다로 둘러싸인 녹색 섬을 지키고 있다.
오 낯선 자여,
모든 신들에 맞서 홀로 싸우라.
텔레마, 불멸의 힘이여!
땅끝에서 온 너는, 어둠이 내려와도 머리 둘 곳을 찾지 못하리.
암송을 마친 후작은 마지막 구절이 주는 애잔함에 한동안 침묵했다.
엘리오의 머리는 평범한 축에 든다.
후작은 짧은 시라고 했지만 그의 기준에서는 긴 시였다.
당연히 한 번 듣고 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엘리오가 자신 없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자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이 웃으며 탁자 밑에 준비했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 자리에서 적어 줄 것처럼 말하더니 미리 준비를 해 두었던 모양이다.
“대륙 공용어로 번역한 ‘천공성’이라는 고대의 시예요.”
엘리오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짧았다.
“여기서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곳’이 아우로라이라는 거죠?”
“맞아요. 연구서에 의하면 아우로라이는 고대의 지명이에요. 대륙의 동쪽 끝에 송곳처럼 튀어나온 곳이죠.”
“히페리온의 사자는요?”
“그건 사자 몸통에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그리핀을 뜻해요.”
“그리핀요?”
“어둠의 에테르를 담고 있는 동물을 마수나 마물이라고 하잖아요? 마나를 담고 있는 동물이 신수(神獸)예요. 고대의 기록에 의하면 그리핀은 최상급 신수로 마물도 찢어발긴다고 알려져 있어요. 마족도 그리핀이 나타나면 숨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해요.”
“바다로 둘러싸인 녹색 섬은 어디를 말하는 거예요?”
“그 부분이 밝혀지지 않았어요. 동쪽 바다를 뒤져 봤지만 녹색 섬을 발견한 사람은 아직 없어요. 그래서 진짜 섬이라는 사람도 있고, 비유라는 사람도 있어요.”
“텔레마는 무슨 뜻이에요?”
“고대어로 ‘의지’라는 말이에요. 의지가 불멸의 힘이라고 말하는 거죠.”
“딱히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은 없네요?”
엘리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마법사들은 수천 년 동안 이 시의 비밀을 풀지 못했을까?
“어려운 시는 아니에요. 곡해할 부분도 거의 없고. 그런데 정작 동쪽 바다를 뒤져 봐도 녹색 섬이 보이질 않으니……. 결국 마법사들도 ‘본래 답이 없는 것이었다’ 생각하고 덮기로 한 거죠.”
“천공성이 없다는 건가요?”
“그보다는…… 그 시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디가요?”
“천공성이면 태양신과 관계된 시잖아요.”
“그렇죠.”
“그 시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보세요. ‘태양이 떠오른다’와 ‘어둠이 내려와도’.”
“그게 이상한가요?”
엘리오가 눈을 끔뻑였다.
아침과 저녁을 뜻하는 것 같은데 어디가 이상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둠이 내려온다는 건 다시 말해 ‘태양신이 패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태양신을 찬양하는 시들은 하나같이 ‘태양이 어둠을 물리친다’고 하거든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태양신을 찬양하는 게 아니면 뭘까요? 태양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 같은 걸까요?”
무심코 중얼거리던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의 말을 엘리오가 받았다.
“그럼 낯선 자에게 죽는다는 건가요?”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낯선 자, 땅끝에서 온 자……. 그에게 죽는다는 예언일까요? 모르겠네요. 이러니 연구서가 세 권이나 되는 거겠죠?”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이 지겹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엘리오가 찜찜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한 구절은 낯선 자에게 하는 말일까요?”
“그럴 거예요.”
“거기서 ‘머리 둘 곳을 찾지 못한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머리를 두려면 누워야 하잖아요. 보통은 집에서 눕죠? 그러니 고향이나 집을 의미하는 걸 거예요. 안식처 같은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태양신을 죽여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건가요? 개쓰레기 같은 시네요.”
한순간 ‘울컥!’한 엘리오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낯선 자를 자신으로 생각하던 엘리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시는 시일 뿐이니 흥분하지 마세요. 비유는 해석하기 나름이니까요. 고대 시에 몰입하는 걸 보니 그쪽으로도 재능이 있나 봐요?”
“전혀요. 그쪽으로 재능이 넘치는 사람은 제 첩니다.”
“…….”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슬픈 과거사를 알고 있던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은 얼른 말을 돌렸다.
“연구서는 읽지 않아도 될 거예요. 지금까지 자작님과 내가 나눈 대화 속에 연구서의 내용이 다 들어 있거든요.”
“네.”
엘리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은 연구서로 자신에게 또 다른 뭔가를 요구할 사람이 아니었다.
***
잠시 후 엘리오는 안내인과 함께 다시 탑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와 안내인이 6층을 지날 때다.
갑자기 멀리서 한 소녀가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 달려왔다.
“살려 주세요!”
엘리오가 깜짝 놀란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사슴처럼 머리에 뿔이 돋은 소녀는 수인(獸人)이었다.
수인을 처음 보는 엘리오가 멈칫할 때다.
복도 끝에서 바람처럼 달려나온 마법사들이 소녀를 잡아서 끌고 갔다.
소녀가 튀어나오고, 마법사들이 다시 잡아가기까지 숨 한 번 쉴 동안 일어난 일이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엘리오가 안내인에게 물었다.
“뭐죠?”
그러자 안내인 티토스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마공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수인입니다. 가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뛰쳐나오곤 합니다. 그래 봐야 이 복도를 벗어나지도 못하지만 말입니다.”
“멀쩡하게 일하는 수인이 왜 살려 달라면서 뛰쳐 나옵니까?”
“아, 그 부분은 설명이 조금 필요하겠군요. 마탑에서 일하는 수인은 중범죄자들입니다. 수인들 중에서 기술자들은 ‘제국의 감옥’과 ‘마탑에서 일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노동 교화형 같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대부분이 날수를 다 채우기도 전에 달아나려고 하고요.”
“중범죄면 몇 년이나 일을 하는 겁니까?”
“이삼십 년부터 종신형까지 다양합니다.”
“나이도 어려 보이던데……. 무슨 죄를 지었길래 중범죄자가 된 거죠?”
“대부분이 살인 아니면 반역입니다.”
“흠!”
엘리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살인과 반역이라고 하기에 소녀의 눈빛은 너무 깨끗했다.
“잠깐 탑주님을 다시 만나 봐야겠습니다.”
엘리오가 돌아서자 티토스는 그를 다시 탑주의 집무실로 데리고 갔다.
***
탑주의 집무실.
작별 인사까지 마치고 떠났던 엘리오가 갑자기 돌아왔음에도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은 반갑게 맞이했다.
“혹시 연구서가 필요하세요?”
“아니요. 한 가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뭔가요?”
“조금 전에 내려가다가 6층에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수인 소녀를 봤습니다. 사슴처럼 머리에 작은 뿔이 나 있더라고요?”
“아! 마공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기술자를 만난 모양이군요?”
“그렇게 어린 기술자도 있나요?”
“테이머는 나이가 어릴수록 야수와 교감을 잘한답니다.”
“그렇군요. 그 수인의 죄명이 뭔지 알고 싶어서요.”
“마탑에 오는 수인이면 대부분 살인 아니면 반역죄를 저질렀을 텐데……. 잠시만요. 티토스?”
후작의 부름에 뒤에서 대기하던 티토스가 허리를 조아렸다.
“예.”
“너도 자작님과 함께 그 수인을 보았겠지? 지금 마공학 연구소로 가서 그 수인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오거라.”
“예!”
티토스가 밖으로 나가자 후작은 엘리오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잠시 앉으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괜히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엘리오는 ―확실히 확인하고 갈 생각에― 사양하지 않고 앉았다.
안내인은 15분 만에 돌아왔다.
티토스가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에게 두 손으로 서류를 바쳤다.
“이름은 에밀리. 열네 살밖에 안 됐는데 살인을 두 건이나 저질렀네요? 직접 보시겠어요?”
후작이 읽던 서류를 엘리오 라고아 자작 앞에 내려놓았다.
엘리오는 굳은 얼굴로 서류를 확인했다.
역시나! 이름과 나이 그리고 끔찍한 죄명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흐음! 얼굴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의외네요.”
그러자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수인의 사고방식은 인간과 달라요. 본능을 거스르지 못해서 인간보다 훨씬 폭력적이죠. 순수하다고 하면 순수한 건데……. 여하튼 결과는 안 좋게 나왔네요.”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타불라 마탑을 떠났다.
***
제도 페트로폴리스 북구.
페르모사 에스텔라.
엘리오는 점심 식사 시간에 맞춰 페르모사 에스텔라로 돌아왔다.
때마침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식사 중이던 파비안이 엘리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리오가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파비안이 농담처럼 말했다.
“기운이 없어 보이시네요? 배가 고파서 그러시는 겁니까?”
“기분이 좀 꿀꿀해서.”
“왜요? 타불라 마탑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뭐, 조금?”
순간 화들짝 놀란 파비안이 언성을 높였다.
“예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요? 그래서, 마탑은 멀쩡합니까?”
“멀쩡하지, 내가 깨부쉈을까 봐?”
“자작님 성격에 눈 돌아가면 마탑이 문젭니까? 왕궁도 부숴 버릴 분이.”
파비안의 쓸데없는 소리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마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엘리오는 탑을 내려가다가 마주친 수인족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살인을 두 건이나 저지른 흉악범이었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눈빛도 선량했는데 역시 얼굴만 봐서는 모르나 봐요.”
“수인들은 인간과 달리 이성보다 본능이 강합니다. 그래서 간혹 예기치 않은 사고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탑주님도 비슷한 소리를 하시더라고요.”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파비안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건 사실과 조금 다릅니다. 제가 몬타노사 산맥의 레인저 부대에서 복무할 때 수인족들과 가깝게 지냈거든요. 그래서 그들에 대해 좀 압니다.”
“다르다고?”
엘리오의 반문에 파비안이 흔들림 없는 얼굴로 말했다.
“예, 사람들이 잘 모르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요. 수인족은 종족에 따라 특성이 다양합니다. 이성보다 본능이 강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애의 머리에 뿔이 돋았다고 하셨죠?”
“어. 한 뼘 정도 되는 게 어린 사슴뿔 같더라고.”
“그렇다면 사슴족이 맞습니다. 사슴족은 겁이 많아서 인간과 말도 잘 안 섞습니다. 특히나 여자들은 마음이 약해 남과 다투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슴족 여자아이가 두 건의 살인을 했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본능적으로 그럴 수도 있지 않아?”
“그 본능이 인간보다 훨씬 비폭력적이라니까요. 사슴족은.”
“아, 그래?”
단호한 파비안의 말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인족과 가깝게 지낸 사람이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작님에게 달려와서 살려 달라고 했다면서요?”
“응.”
“수인들은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죗값을 치릅니다. 사람을 둘이나 죽이고 잡혀 온 사슴족이라면 절대 안 달아날 겁니다.”
“그럼 내가 본 서류는 뭐야?”
“저도 모르죠. 그게 진짜라면 하늘이 놀랄 일이고…….”
“가짜일 수도 있다는 거야?”
엘리오가 황당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삼대마탑으로 불리는 타불라 마탑에서 설마 그런 짓을 했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