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49
1149회. 시궁창의 쓰레기야
얼 그레이 기사단장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그는 젊은 자작을 마법사, 백작을 소드마스터라 착각하고 있었다.
마법사만 있으면 모를까?
소드마스터와 함께 있는 마법사는 천하무적이니 무조건 자신이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한 달 전 아에토스 백작가에서 아나이스 양의 성인식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그날 성인식에 초대받아 갔던 에스쿠도 백작가의 일공자께서 아나이스 양의 오빠인 테리 아에토스에게 모욕을 당했습니다. 이에 저희 백작님은 아에토스 백작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아에토스 백작이 거절했습니다. 그 뒤로 싸우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엘리오가 이를 갈며 다시 말했다.
“내 아티팩트에 문제가 있나? 왜 우리를 죽이려고 했냐니까 무슨 개소리야?”
“아, 그건…… 저희 영주님께서 아에토스 백작가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아에토스 백작이 무릎 꿇을 때까지 봉쇄를 풀지 말라고…….”
“단지 그 이유로 귀족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거야? 지나가는 건 다 때려죽이겠다?”
“아에토스 백작가를 고립시키고,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습니다.”
“…….”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엘리오는 노기를 삭였다.
에스쿠도 백작가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마나를 폐쇄하려고 했지만 피해자 측을 몰아붙이는 것도 좀 아닌 것 같다.
“하아! 딱 한 번 봐줍니다.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요. 다시 나랑 만나면……. 그때는 남은 평생 농사나 짓고 살아야 할 겁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과 여러분의 가시는 길에 마나 프트라스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얼 그레이 기사단장은 내심 안도하며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자작이 봐준다고 했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백작인 까닭이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물었다.
“라고아 경이 용서해 준 것 같으니 넘어가도록 하지. 우리의 목적지는 로렌 공국이네. 다시 목책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이 길을 계속 가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빠른가?”
“목적지가 로렌 공국이라면 처음 가던 길로 가는 게 낫습니다. 그쪽 길이 사나흘 정도 빠릅니다.”
“알겠네. 그만 가 봐도 좋네. 아, 참! 또다시 우리 마차를 막으면……. 그때는 이렇게 말로 끝나지 않을 걸세.”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쪽에는 제가 손을 써 두겠습니다.”
얼 그레이 기사단장은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소드마스터라 그런지 나쁜 감정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감정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에게 전해진다.
기사단장과 기사단의 정중한 태도에 엘리오 일행의 불쾌함도 깨끗이 씻겼다.
잠시 후 에스쿠도 백작가의 기사단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이 확 달아난 세 사람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죽어 가는 모닥불을 되살렸다.
문득 파비안이 운을 뗐다.
“그런데 조금 놀랍네요.”
“뭐가?”
“아에토스 백작가 말입니다. 보아하니 에스쿠도 백작가에 힘으로 밀리는 것 같은데, 잘못을 하고도 사과하지 않는 게……. 좀 그렇지 않습니까?”
“처맞기 전까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사람들 은근히 많다.”
“아, 그건 또 그렇네요.”
파비안은 반박하지 않았다.
자신도 별것 아닌 사람이 지랄맞게 굴다가 얻어터지는 걸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엘리오 일행은 다시 마차를 돌렸다.
창밖을 보며 졸다가 깨다가 하던 엘리오가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왔던 길을 또 가려니 지겹다.”
그러자 파비안이 실실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마나 프트라스의 가호를 받았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 텐데……. 어디 가서 제사라도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제사라……. 하아!”
신적 존재를 떠올리던 엘리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세계에 온 뒤로 구천현녀와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세계에 온 지도 어언 아홉 달이 넘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어찌어찌 히르헤라의 혼돈은 정리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이세계는 천자마와 금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개판이었다.
구천현녀는 천자마와 금사 때문에 이세계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처럼 말했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본래 엉망인 세상이다.
시궁창에서 조금 더 더러운 쓰레기가 천자마와 금사라고나 할까?
‘천자마와 금사는 양 우리에 떨어진 늑대가 아니라고……. 씨발.’
마나 프트라스만 해도 그렇다.
인간은 마나 프트라스의 축복으로 귀족, 평민, 노예, 야인, 수인을 나누고 착취한다.
이 얼마나 엿 같은 세상이란 말인가.
“왜 한숨을 쉬십니까?”
“시궁창의 쓰레기야.”
“예? 뭐가요?”
“몰라도 돼.”
짜증이 치밀어 오른 엘리오는 눈을 감았다.
시궁창에서 가장 더러운 쓰레기 둘만 치우고 나가면 된다.
그 이상은 생각해 봐야 짜증만 나니 더 깊이 관여할 필요가 없다.
정오 무렵.
풍광이 수려한 곳에 마차를 세운 마부는 마차에서 솥단지와 식재료 등을 꺼냈다.
백작과 함께 나무 그늘을 찾아가던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말했다.
“파비안, 너라도 가서 좀 도와 드려라. 아무리 돈 주고 시키는 일이지만, 미안해서 안 되겠다.”
“자작님 마음은 알겠는데, 제가 도와준다고 옆으로 가면 더 불편해 합니다.”
“그래?”
“저도 남작 아닙니까. 하비 씨가 제 눈치 엄청 봅니다. 솔직히 저만 해도 자작님이 저를 돕겠다고 나설 때마다 진짜 부담스럽거든요?”
라르바 오마르 백작도 파비안의 말을 거들었다.
“그건 파비안 남작의 말이 맞습니다. 육체적으로 조금 힘들지 몰라도 혼자 하는 게 편할 겁니다. 어차피 하비도 자기 입에 들어갈 음식을 준비하는 거니까, 미안해 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엘리오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엘리오 일행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1시간쯤 지났을까?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이 에스쿠도 백작가의 목책에 막혀 되돌아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에스쿠도 백작가를 원망하는 소리가 마차 안까지 들려왔다.
예정에 없이 하루나 이틀 길을 돌아가게 생겼으니 당연하다.
마침내 마차가 목책 가까이 접근했다.
마부를 확인한 에스쿠도 백작가의 병사들은 군말 없이 통나무 거마창(拒馬槍)을 치웠다.
마차가 거마창을 통과하자 주변에서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에스쿠도 백작가 병사들이 은근슬쩍 따라가려는 사람들을 차단했다.
병사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가벼운 실랑이가 일어났다.
마차에 탄 엘리오 일행은 외부의 소란을 알고도 관여하지 않았다.
이 사달의 원인이 아에토스 백작가에 있음을 알고 모른 척한 것이다.
마차가 다가오자 닫혀 있던 목책이 빠르게 열렸다.
새벽부터 목책에 나와 있던 피데스 마텔로 자작은 마차가 지나가자 허리를 숙였다.
다시 목책이 닫힐 때다.
돌연 뒤쪽에서 칼이 맞부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챙! 챙! 채앵―!
깜짝 놀란 피데스 마텔로 자작은 거마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이 두 명의 여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포위를 뚫으려는 여자들과 병사들 간에 싸움이 일어난 모습이다.
피데스 마텔로 자작은 급히 마차를 확인했다.
다행히 목책을 빠져나간 마차는 어느 틈에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그제야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세워진 거마창으로 다가갔다.
여자들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 중에 하나가 빠르게 달려왔다.
“자작님! 아에토스 백작가의 여자들입니다! 상인들 속에 섞여 있는 것을 저희가 발견했습니다!”
“아에토스 백작가라고?”
“예! 하나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다른 하나는 낸시 워커 남작입니다.”
순간 피데스 마텔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낸시 워커 남작은 아나이스 아에토스의 기사인 까닭이다.
‘설마 아나이스 아에토스가 걸려든 건가?’
한달음에 병사들에게 달려간 그의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로브 아래에 절반쯤 드러난 얼굴은 ‘포메른부르크의 꽃’이라는 아나이스 아에토스였다.
“하하하! 아나이스 양? 어딜 그렇게 살금살금 가려고 하시나!”
정체가 드러났음을 알게 된 아나이스 아에토스가 후드를 벗으며 소리쳤다.
“피데스 마텔로 자작! 음탕한 에스쿠도 백작가를 위해 봉사하다니! 기사라면 부끄러운 줄 아세요!”
“기사라면 당연히 자신의 주인을 위해 일해야 하지 않나? 기사의 본분에 충실한 나를 욕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아나이스 양 덕분에 싸움이 빨리 끝나게 생겼으니 감사하오. 뭣들 하느냐! 체포해라!”
이번에는 기사들까지 합류했다.
낸시 워커 남작이 거세게 저항했지만 결국 등에 칼을 맞고 풀썩 쓰러졌다.
호위기사가 쓰러지자 아나이스 아에토스는 저항하지 않고 칼을 버렸다.
에스쿠도 백작가의 기사들이 전리품이라도 되는 양 땅에 떨어진 칼을 챙겼다.
그사이 아나이스 아에토스는 친자매처럼 지내던 낸시 워커 남작에게 달려가 그녀의 등을 살폈다.
다행히 로브 안에 받쳐 입은 가죽 보호구로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그녀는 황급히 옷을 찢어 헝겊 뭉치를 만들고, 그것으로 상처 부위를 압박했다.
샘처럼 뭉글뭉글 솟아나던 피가 멎자 아나이스 아에토스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쁨도 잠깐, 이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자각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능욕을 당하기 전에 피하라던 부모의 명으로 백작가를 떠났지만, 끝내 에스쿠도 백작가 기사들에게 잡혔으니 최악의 결과다.
‘자결을 해야 하나…….’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아나이스 아에토스에게 피데스 마텔로 자작이 다가갔다.
“아나이스 양, 아에토스 백작가를 위해라도 전향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아. 락토 에스쿠도 공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한둘인 줄 아나? 에스쿠도 백작가의 안주인이 될지도 모를 기회라고.”
“쓰레기는 쓰레기들끼리 놀라고 하세요. 나는 그 쓰레기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어요.”
“쓰레기라니, 너무하는군. 뭐, 락토 공자의 여자가 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에스쿠도 백작가의 후계자 정도 되면 흠도 아니라고.”
“이보세요, 자작님. 당신은 출세를 위해서 당신 딸을 락토 에스쿠도 같은 인간에게 내어 줄 수 있나요?”
“미안하지만 내게는 아들만 둘이라 해당 사항이 없네.”
“락토 에스쿠도가 남자도 좋아한다고 하던데, 두 아들을 내어 주는 건요?”
“서로가 마음만 맞는다면야 반대할 것도 없지. 하지만 내 아들들은 여자를 좋아해.”
피데스 마텔로 자작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경우 한번 인정하고 나면 결국 자신만 쓰레기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 에스쿠도 백작가의 사람답게 뻔뻔하군요.”
“좋게 생각하게. 어차피 세상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라네. 겉으로는 신사인 척하지만 더하고 덜할 차이만 있을 뿐이야. 그런 면에서 보면 락토 공자는 솔직한 사람인지도.”
“백작 영애의 성인식에서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았으면, 솔직한 게 아니라 짐승이죠.”
“락토 공자가 충동을 참지 못할 정도로 아나이스 양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흥! 자작님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왔나 봐요? 나는 그런 걸 욕정이라고 배웠는데. 백작가 영애의 성인식에서 욕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정도면……. 그냥 발정 난 개 아닌가요?”
“…….”
피데스 마텔로 자작이 야릇한 눈으로 아나이스 아에토스를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락토 공자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 알 것도 같다.
땀에 흠뻑 젖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불쑥 ‘죽을 때 죽더라도 한번 품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