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55
1155회. 그게 범죄가 됩니까?
엘리오는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녹림도 다른 산채가 끼어들면 칼부림이 났는데…….’
내정간섭 어쩌고 하는 말을 들으니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자신이야 어차피 떠날 사람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로디나 대륙에서 평생 살아갈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아에토스 백작가, 파비안을 생각하면 양보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 하세요. 단 에스쿠도 백작이 폭삭 망할 정도로 확실하게 배상금을 책정해 줘요. 그것만 약속하면 손대지 않을 게요.”
“알겠소. 그런데…….”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이 신경 쓰이는 게 있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뭔데요?”
“에스쿠도 백작이 자신의 인맥으로 부당함을 호소할 게요. 그렇게 되면 대귀족들이 오늘의 일을 문제 삼을 수 있소.”
“괜찮아요. 그래 봐야 자기들만 손해니까.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야만 알 수 있다면……. 먹어 보라고 해요.”
“…….”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제국의 황제가 히르헤라에서 일어난 일을 꼭꼭 감추었기에 제국에서 엘리오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오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걸음을 옮겼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다.”
백작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드마스터끼리의 싸움에서 패해 자존심이 살짝 상한 탓이다.
“왜 진 것 같아요?”
“힘과 기술 모두 상대가 뛰어났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기분이 묘했다.
소드마스터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데, 실상은 소드 익스퍼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소드마스터 간의 우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의 앞에 섰을 때 느낌이 왔다.
자신보다 후작이 한 수 위였다.
소드 익스퍼트들은 초급, 중급, 상급으로 분명한 구별이 있다.
그에 비해 소드마스터는 그냥 소드마스터로 불린다.
그래서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소드마스터가 소드 익스퍼트처럼 초급, 중급, 상급으로 나누어져 있다면, 백 번쯤 고민하고 결투에 임했을 것이다.
“틀렸어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말에 백작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부분이 그렇습니까?”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에게 패한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어떤 말을 해 주는지 궁금했다.
“내가 볼 때 기술은 거기서 거기였어요. 차이가 나는 건 힘이죠.”
“그렇습니까? 확실히 마나의 양이 상대가 월등히 많은 것 같았습니다.”
“대귀족쯤 되면 가문마다 고유의 마나 수련법이라는 게 있다면서요?”
“맞습니다.”
“아마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의 마나 수련법이 백작님보다 더 좋을 거예요.”
“그렇겠지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엇이건 백작가의 것보다 후작가의 것이 더 뛰어난 것은 당연하다. 마나 수련법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갑자기 엘리오가 말을 멈추자 백작이 물었다.
“그걸 극복할 방법이 있습니까?”
“이미 알고 있잖아요.”
엘리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보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눈을 끔뻑이던 백작은 뒤늦게 작은 하늘 회로(small heavenly circuit, 小周天)를 떠올렸다.
“아! 제가 바보였군요. 깨우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의기소침해 있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표정이 살아났다.
생각만 해도 기쁜지 눈에서 빛이 났다.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작은 하늘 회로’의 신묘함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성문으로 다가가자 닫혀 있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백작이 뭘 깨우쳤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뭐지?’
두 사람의 대화를 되짚어 봤지만 평범한 대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금 전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환희에 찬 표정은 진짜였다.
어둡던 그의 얼굴에서 광채마저 흘러나왔다.
그건 거짓으로 꾸며 낸 게 아니다.
모든 게 다 끝난 마당에 거짓으로 꾸며 낼 이유도 없다.
고민하고 있는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에게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후작님…….”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받은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이제 어떻게…….”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눈을 내리깔았다.
만약 그가 엘리오와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 간에 오간 대화를 알았다면 얌전히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지 못한 그는 호랑이 입에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에스쿠도 백작.”
“예.”
차가운 후작의 목소리에 위기를 감지한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눈알을 굴렸다.
“소드마스터는 체스판의 폰(pawn, 졸)이 아니네. 굳이 비유하자면 퀸(Queen)쯤 되지. 백작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 말일세.”
“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나에게 밝히지 못한 것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말해 보게.”
“…….”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후작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영지전과 북부의 귀족 외에 뭐가 빠졌지?’
그는 아에토스 백작가와 싸움이 난 계기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대다수 귀족들은 여자 희롱하는 것을 가볍게 여겼고, 에스쿠도 백작 역시 아들이 벌인 짓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당연히 후작의 말을 듣고도 아나이스 아에토스를 떠올리지 못했다.
에스쿠도 백작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건만 그가 눈만 끔뻑거리자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영지전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말하라는 것이네!”
“그건 테리 아에토스가 제 아들에게 폭력을…….”
“그 전에 백작의 영애에게 백작의 아들이 한 짓은 왜 말하지 않았나?”
“아…….”
그제야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아나이스를 떠올렸다.
“아들의 범죄를 인정하나?”
“그게 범죄가 됩니까?”
“백작의 영애에게 그런 짓을 하고도 범죄가 아니라는 건가?”
“아나이스 양이 귀족인 것은 맞지만, 단지 귀족일 뿐입니다. 작위라도 받았다면 공왕 전하의 존엄을 상하게 한 일이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억울하다는 눈으로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을 보았다.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한순간 할 말이 없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백작의 아들이 백작의 영애를 추행한 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짓이지, 범죄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쯧! 대충 넘어가지 뭘 따지나…….’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답답함을 느꼈다.
만약 여기가 헤드나르 공국이었다면 백작도 무조건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포메른부르크 공국.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는 자신에게 맡겨 달라 했지만,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저렇게 나오면 딱히 방법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타국의 귀족인 까닭이다.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뒤늦게 자신이 백작을 벌하면 그것도 포메른부르크의 내정간섭이 되고 만다는 걸 깨달았다.
흥분을 가라앉힌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이 차분히 말했다.
“나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그를 대신해 이번 일을 마무리하겠다고 했네. 백작이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후작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지전에서 패했다고 그냥 순순히 끌려다닐 생각도 없었다.
“후작 각하, 저는 이번 영지전에서 이미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 아들이 아에토스 백작의 딸을 희롱한 대가를 비싸게 치렀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 이상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백작의 딸에게 장난을 친 게 범죄라면, 공국의 영지전에 북부 귀족을 끌어들인 아에토스 백작은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까? 공국의 내정에 간섭한 북부 귀족들의 죄는 어떻고요?”
‘하아!’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문득 괜히 나섰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자신의 말에 이렇게까지 토를 달 줄 몰랐다.
헤드나르 공국을 생각하고 나섰는데, 이곳에서는 자신도 외지인에 불과했다.
“내 솔직히 말하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백작이 망할 정도로 큰 배상금을 원하고 있네. 백작은 그럴 생각이 없겠지?”
“…….”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즉시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더럽게 꼬였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제길! 끝까지 배상금을 거절하면 북부의 귀족이 나서겠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일단 오늘은 받아 주고, 돌아가서 아에토스 백작과 북부의 귀족들을 고발하자.’
제국의 귀족들은 모두 자신을 지지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역으로 아에토스 백작가에 배상금을 청구할 수도 있다.
뜻을 정한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이 마지못한 얼굴로 입을 뗐다.
“알겠습니다. 후작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니 저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어진 장시간의 협상에서 로무알 에스쿠도 백작은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이 제안안 100만 골드의 배상금 지불을 받아들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을 찾아가 협상 결과를 통보한 뒤, 바로 떠났다.
***
그날 밤.
아에토스 백작성에서 승전을 축하하는 만찬회가 열렸다.
탁자 위에 진수성찬이 차려졌고, 한쪽에서는 초대받은 바르도스가 하프를 연주하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상석에 영주인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나란히 앉았는데, 그의 표정이 한여름 장마의 빗줄기처럼 오락가락했다.
웃다가, 시름에 잠겼다가 하기를 반복하는 그에게 검은 독수리 기사단장 젝 퍼셀 자작이 물었다.
“영주님, 무슨 근심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군.”
복잡한 심기가 느껴지는 그의 답에 좌중의 시선이 집중됐다.
사람들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보자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은 계속해서 말했다.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 각하의 말이 떠올라서 그러네. 각하께서 떠나시기 전에 당부를 하시더군. 에스쿠도 백작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으니 대비를 하라고.”
순간 상석 주변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아에토스 백작의 말을 듣지 못한 대다수 귀족들은 여전히 웃고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흡사 냉수와 온수가 한 그릇에 담겨 있는 듯한 모습이다.
모처럼 제대로 된 요리에 심취해 있던 엘리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에스쿠도 백작이 왜요?”
“그가 내정간섭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엘리오가 천진난만한 눈으로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을 보았다.
그게 뭐 어쨌다고 잔치 자리에서 울상인지 모르겠다.
사람의 눈치를 안 보고 산 지 오래인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에스쿠도 백작이 헤드나르 후작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답니다. 헤드나르 후작이 우리 포메른부르크가 아니라 헤드나르 공국의 귀족이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초대한 헤드나르 후작에게도 그런 사람이니, 북부의 귀족들이 영지전에 참여한 걸 그냥 넘기지 않을 거라고…….”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헤드나르 후작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티븐 아에토스 백작이 심중에 아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에스쿠도 백작이 내정간섭을 문제 삼으면……. 라고아 자작님과 오마르 백작님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