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64
1164회. 믿는 구석이 있었군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무덤덤한 얼굴로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을 응시했다.
홍염의 검, 제국을 떠받치는 일곱 기둥 중에 하나.
오래도록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묘하게 투쟁심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하지만 심장까지 뛰지는 않았다.
자신이 아직은 파가누스 백작의 상대가 아님을 아는 까닭이다.
“그런 일 없소.”
순간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아무리 뻔뻔해도 그렇지 대귀족이 대놓고 거짓말을 할 줄이야!
“키넌 가이어 남작을 공격한 적이 없다는 거요?”
“그렇소.”
“귀하의 그 거짓말을 들으니 테러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알겠다. 북부 기사들은 다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가?”
그의 노골적인 조롱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라곤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로 향했다.
기사들 간의 대화가 이 정도 수위에 이르면 반드시 어느 한쪽이 머리를 숙여야 끝나기 마련이다.
그들은 북부의 대귀족이 꼬리를 내릴 것이라 생각했다.
이름도 없는 그가 제국의 소드마스터에게 맞설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모욕을 받았음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척 봐도 못 들은 척하므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수작이다.
그건 상대에게 굴복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행동인지라 아라곤의 기사들은 역겨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입이 열렸다.
“귀하의 주장은 잘못됐소. 키넌 가이어 남작을 공격한 사람은 없소. 하지만 키넌 가이어 남작의 마차를 부순 사람은 있소. 그건 내가 아니라 내 일행이 한 일이오.”
“흥! 이제야 시인하는군. 아랫사람이 한 일은 윗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을 모르나? 북부에서는 대귀족이 그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나 본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누군가 끼어들었다.
“아랫사람 아닙니다. 백작님은 베일럼 왕국 분이고, 나는 에스카토스 왕국의 영주입니다. 에스카토스의 영주가 한 일을 왜 베일럼의 백작에게 책임지라고 합니까?”
엘리오의 말에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파랗게 어린 자작이 뚱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네가 가이어 남작을 공격했다는 게 사실이냐?”
고작 북부의 자작이 공국 백작의 가신을 공격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단칼에 죽이고 싶지만 시비를 가리는 게 우선이었다.
“가이어 남작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엘리오가 황당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는데 공격이라니 기가 막혔다.
멈칫하던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살을 조금 더 붙였다.
“너의 공격으로 백작가의 마차가 파괴되었다. 아니라고 할 셈이냐?”
“애매하네.”
“명백한 증거가 있거늘 무엇이 애매하다는 것이냐?”
“검문소 앞에서 마차 한 대가 사람 둘을 치었습니다.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팔이 부러졌죠. 그런데 1실버를 땅바닥에 던지고 그냥 가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했더니 자기는 파가누스 백작가 사람인데 공무 수행 중에는 괜찮다나? 뭐라나? 진짜 파가누스 백작가 사람들은 일할 때 마차로 사람 치어 죽이고 다녀도 돼요?”
“그래서 가이어 남작을 공격했나?”
“아뇨.”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 참았다.
한편으로 ‘공무 수행’으로도 덮을 수 없는 잘못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그랬나?”
“그 싸가지 없는 사람이 우리보다 늦게 와 놓고 새치기를 하지 뭡니까? 누군 할 일이 없어서 30분이나 기다린 줄 아나? 그래도 내가 워낙 인격자라서 알아듣게 주의를 줬습니다. 뒤로 가지 않으면 마차 부숴 버릴 거라고. 그랬는데도 시건방지게 그냥 가지 뭡니까? 파비안, 그때 네가 뭐라고 했지?”
“‘좋은 말로 할 때 뒤로 가십쇼.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가는 수가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 아랫사람이 그렇게까지 설명했는데 개무시를 하더라고요. 그때 죽였어야 하는데, 요즘 옆에서 하도 성질을 죽이라고 해서, 꾹 참고 마차만 부쉈습니다. 역시 그냥 죽였어야 했나요?”
엘리오가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의견을 구하는 그 눈빛에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한순간 당황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파가누스 백작가의 귀족을 공격했다는 것이냐?”
“귀에 문제 있어요?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마차만 부쉈다니까.”
“…….”
북부 왕국 자작의 도발에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갔다.
한순간 뭔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전 내가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한 짓을 따라 하고 있는 건가?’
설명할 길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렇다는 확신이 들었다.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제국이 북부 왕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 봐야 상대는 자작이다.
자작 하나의 죽음으로 제국과 북부 왕국의 관계가 파국을 맞이할 일은 없다.
극도로 화가 나자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도리어 차분해졌다.
“자작의 망언 잘 들었다. 북부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제국에서 자작이 대귀족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죽는다. 기회를 주지.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빌어라.”
그러자 엘리오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되물었다.
“내가 빌면 없던 일로 해 줄 겁니까?”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군. 칼을 뽑아라. 무장도 하지 않은 자를 베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 그 말은 내가 칼을 안 뽑으면 안 베겠다는 소리네? 맞아요?”
그 말에 답하듯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이 칼을 뽑았다.
안 뽑아도 죽인다는 뜻이다.
막상 칼을 뽑았지만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이 착잡하다 못해 더러웠다.
기사와의 싸움이 아니라 마치 똥을 앞에 둔 느낌이다.
이 순간만큼은 ‘더러워서 똥을 피한다’는 말이 뼈에 와 닿았다.
“네놈도 기사라면 칼을 뽑아라. 마지막은 명예롭게 가야 할 것 아니냐? 물론 네놈이 명예가 뭔지 알 리 없지만.”
파가누스 백작의 조롱에 엘리오가 천둔검을 뽑으며 화답했다.
“피차 초면에 욕은 하지 맙시다. 나라고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 존중해 주는 건 아니니까. 마검사라고 들었는데 시작부터 거리가 너무 가까운 거 아닙니까?”
자작의 지적에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잠시 망설였다.
아닌 게 아니라 마법을 생각하면 가까운 건 사실이었다.
마검사들은 ―물론 몇 안 되는 숫자지만― 원거리에서 마법을 쓰다가, 결정적인 순간 거리를 좁혀 싸우는 방식을 선호한다.
소드마스터가 한낱 자작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랬다는 건가?’
선입견을 버리고 상대를 살피던 백작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놀랍게도 상대는 영기 수련자였는데, 영기의 양을 측량할 수 없었다.
경지란 산에 오른 것과 같다.
위에 있는 자가 아래 있는 자의 수준을 어렴풋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데 파가누스 백작은 자작이 가진 영기의 크기를 알 수 없었다.
마나와 영기의 우열 관계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영기가 많다는 뜻이겠지.’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상대를 다시 평가하기로 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군.”
“그럼,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치안대까지 따라왔겠습니까? 대귀족이라 철이 덜 드셨나? 세상을 너무 말랑말랑하게 보시네.”
“내가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면……. 그대도 소드마스터인가?”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의 말투가 변했다.
눈빛은 더 무거워졌고 몸에서 무지막지한 투기가 흘러나왔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하던 아라곤의 기사와 병사 들이 그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엘리오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상상력이 부족하시네. 어떻게? 바로 칼질 들어가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거리를 벌렸다.
이윽고 그는 암암리에 자신에게 5서클 마법인 그로스(Growth)를 시전했다.
한순간 힘, 민첩, 체력 등이 높아지자 가슴이 웅대해졌다.
이게 마검사의 무서운 점이다.
소드마스터인 그가 마법으로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자, 그가 내뿜던 투기도 덩달아 강해졌다.
고오오오―.
아라곤의 기사와 병사 들은 갑작스럽게 이명(귀울음)이 들리자 다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준비를 마친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이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둘렀다.
마나 블레이드 대신 엘리오 주변의 공기가 폭발을 일으켰다.
4서클 마법 에어밤(Air Bomb)을 펼친 것이다.
펑! 펑! 펑―!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귀까지 먹먹할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폭발에서 벗어난 엘리오가 반격에 나섰다.
그가 검을 수평으로 휘두르자 반월형 오라 블레이드가 백작에게 날아갔다.
쓰아아아―.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도 눈 뜨고 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나 블레이드를 일으켜 상대의 오라 블레이드를 파괴했다.
두 사람 사이에 공방전이 펼쳐졌다.
한참 마법을 난사하던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더블 버닝 핸즈(Double Burning Hands)를 사용했다.
갑자기 허공에서 불타는 거대한 손이 나타나 엘리오를 움켜잡았다.
엘리오가 이형환위로 피했지만 또 다른 손이 뒤에서 그를 덮쳤다.
화르르륵―!
손에 있던 불길이 엘리오의 몸으로 옮겨 갔다.
상대가 버닝 핸즈에 걸려들자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벼락처럼 달려갔다.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 그의 롱소드가 검붉은 불길에 휩싸였다.
순간 멀리서 지켜보던 아라곤의 기사와 병사 들은 ‘홍염의 검이다!’를 외쳤다.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버닝 핸즈와 자작을 양단할 듯 롱소드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검이 닿기도 전에 ‘꽝!’ 소리와 함께 버닝 핸즈가 터져 나간 것이다.
버닝 핸즈에서 풀려난 엘리오가 천둔검으로 떨어져 내리는 홍염의 검을 쳐 냈다.
콰앙―!
폭발과 함께 홍염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떨어져 나간 불꽃들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고 지옥의 겁화처럼 계속해서 타올랐다.
화르르륵―.
그 모습을 본 엘리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휴우! 호신강기로 튕겨 냈기에 망정이지 무시하고 맞았으면 홀랑 탈 뻔했네.’
저런 기괴한 수법을 보면 상계는 상계다.
홍염의 검이 실패하자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다시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걸 구경만 하고 있을 엘리오가 아니다.
그는 즉시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천둔검을 던졌다.
쐐애액―!
천둔검이 화살처럼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을 향해 날아갔다.
깜짝 놀란 백작이 블링크로 피했지만 천둔검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검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은 돌아서서 검으로 힘껏 쳐 냈다.
‘챙―!’ 소리와 함께 튕겨 났던 검이 또다시 날아왔다.
그 짓을 열 번이나 반복하자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챙! 챙! 챙! 채앵―!
땀을 뻘뻘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과 달리 엘리오는 제자리에서 검결지만 까딱거렸다.
바다처럼 마르지 않는 영기를 지닌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 기괴한 싸움을 지켜보던 파비안이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속삭였다.
“백작님, 저건 검술인가요? 마법인가요?”
“검술이네.”
“마법처럼 보이는데요?”
“라고아 경의 손가락과 검이 영기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네. 검을 저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니 놀랍군. 놀라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입에서 연신 탄성이 흘러나왔다.
함께 다니면 조마조마하지만 이럴 때만큼은 그를 따라다니길 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