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70
1170회. 해적선 같습니다
꼬박 하루 동안 마력범선은 마의 해역을 떠다녔다.
첫째 날은 선원들도 별다른 이상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냥 넘겼다. 바람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항해사 브루노는 눈을 뜨자마자 선수의 방향부터 확인했다.
‘남서쪽이로군.’
배는 마의 해역 외곽을 에둘러 항해하고 있었다.
그는 내심 안도하며 잘 매인 돛줄을 한번 더 팽팽하게 당겼다.
아침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에 마력범선이 빠르게 물살을 갈랐다.
이 속도라면 마의 해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는 수많은 돛줄을 일일이 당겨 확인한 후에 선실로 돌아갔다.
점심 무렵.
마력범선은 반나절 만에 마의 해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위치까지 이동했다.
알트헬름 선장은 마의 해역 남단에 이르자 선수를 천천히 북쪽으로 돌렸다.
하루 동안 마의 해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했으니 이제 다시 ―남에서 북으로― 종단하려는 것이다.
쉬겠다고 나갔던 조타수 딜로스가 조타실로 허겁지겁 돌아왔다.
“선장님? 왜 선수를 돌리신 겁니까?”
“왜긴? 마의 해역을 지나가려고 그러는 거지.”
“거길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들어간다는 겁니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지나간다고.”
“어제 하루 종일 마의 해역에 있었잖습니까? 그런데 오늘 또 간다고요?”
“어제는 바람이 없어서 그랬던 거고, 오늘은 반나절이면 지날 수 있는데 뭘 그렇게 놀라.”
“반나절이라뇨? 바람의 방향이 반대구만. 자정은 돼야 통과할 겁니다.”
“그래도 하루 종일은 아니잖아.”
“그제 분명히 말씀하셨잖습니까! 마의 해역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고.”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지나가는 거지 머무르는 게 아니잖아.”
“그게 그거죠. 지금 말장난하십니까?”
“말장난이라니 말이 심하군.”
알트헬름 선장이 정색을 하자 딜로스는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선장님, 마의 해역에 또 들어가면 브루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을 잘 다독거리라고 조타수를 두는 거잖나. 자네가 잘 설득해 보게.”
마력범선에서 조타수는 선장 다음의 권력자로 선원들을 관리했다.
그러니 알트헬름 선장의 지시는 부당한 게 아니었다.
“브루노가 제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요?”
“벌을 주든 가두든 자네 맘대로 하게. 어차피 말 안 듣는 선원들은 이번 항해를 마치고 죄다 물갈이할 생각이니까.”
“알겠습니다.”
딜로스는 더 묻지 않았다.
물갈이를 거론할 정도로 선장의 뜻이 확고하다면 무조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브루노는 알겠고, 자네는 어떤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가 마의 해역을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마의 해역에 대한 소문을 믿느냐는 질문이시라면, 저는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허튼소리라고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나는 미신이라고 생각하네. 북부 귀족들과 계약을 한 것도 그래서고.”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자네도 알아 두게. 북부 귀족들은 마력범선이 마의 해역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네. 계속 마의 해역에 있으면 선원들 사이에서 분명 말이 나올 걸세. 불만을 잘 다독이고, 개선이 안 되는 자들을 유심히 봐 두게. 항구로 돌아가면 그들과 다시 바다로 나갈 일은 없을 거야.”
“예.”
“참, 이 말도 해 두게. 조만간 동원령이 내릴 텐데, 그렇게 되면 무직인 자들부터 영지병으로 차출될 거라고 말이야.”
“동원령이 내려진답니까?”
“파병까지는 아니지만 하데스 항의 병력을 늘린다고 하더군. 영지병으로 끌려가느니 배에 타는 게 백번 낫지. 그렇지 않나?”
“그야 당연하지요.”
영지병에게는 돈이 지급되지 않지만 선원은 월급을 받는다.
바보가 아니라면 배에 타겠다고 할 게 분명했다.
설사 그 배가 마의 해역으로 간다 해도 말이다.
***
엘리오 일행은 선수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들은 선수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바다와 하늘을 살폈다.
보다 못한 선장이 조타수를 시켜 선수에 차양막을 설치해 주었다.
차양막 아래.
엘리오가 지루한 표정으로 머리를 휘휘 돌렸다.
마의 해역은 그 무시무시한 이름과 달리 너무도 잠잠했다.
어찌나 고요한지 이제는 마의 해역에 천공성이 있는지조차 의심될 지경이다.
“느낌이 좋지 않아.”
엘리오의 중얼거림에 파비안이 반응했다.
“왜요?”
“속은 것 같아. 오늘이 이틀째야.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바다가 마의 해역일 리 없잖아.”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겠죠.”
“저런 날은 없어. 이런 날 뿐이라고.”
“뭘 그렇게 초조해하십니까? 수천 년간 발견하지 못했고, 마법사들도 포기한 천공성입니다.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마의 해역이 허황된 소문이면 완전히 헛다리 짚고 있는 거니까 그러지. 천공성을 찾으러 다른 데로 가야 하잖아.”
“자작님, 이제 겨우 이틀입니다. 그런 말씀은 최소한 일 년 정도 진득하니 찾아본 다음에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일 년이나 이 짓을 하라고? 아니다 싶으면 접어야지 무슨 소리야.”
“자작님도 길게 보고 오셨으면서 왜 그러십니까?”
“마의 해역이 소문처럼 날뛰어야 믿고 기다리지. 이 평화로운 바다를 봐. 어딜 봐서 여기가 마의 해역이라는 거야?”
“마의 해역이 매일 날뛰는 게 아니라잖습니까! 좋은 날이 더 많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오죽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라고요!”
답답한지 파비안이 언성을 높였다.
마의 해역은 날뛰는 날보다 잠잠한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그걸 벌써 몇 번째 말해 주는지 모르겠다.
그제야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불만이 가라앉았다.
“버티다 보면 그런 날이 오겠지?”
“옵니다. 본래 날씨라는 게 항상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나쁜 날씨 말고. 마의 해역의 날씨는 특별하다잖아.”
“특별한 날씨든, 그냥 나쁜 날씨든, 기다리다 보면 올 겁니다.”
“야 씨! 그냥 나쁜 날씨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그런 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아. 괜히 사람들만 개고생시킨다고.”
“그걸 아시면 좀 진득하니 기다려 보십쇼. 마의 해역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보채십니까?”
“누가 보챘다고 그래? 하도 잠잠하니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본 거지. 너는 바다에 나와서 그런 의심 한 번도 안 해 봤어?”
“물론 그런 건 아니지만 그걸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드러날 일인데.”
“어우! 현자 났네, 현자 났어. 너 잘났다.”
하나 마나 한 언쟁에서 파비안에게 밀린 엘리오가 툴툴거릴 때다.
조타수가 허둥지둥 갑판을 가로질러 왔다.
“나으리! 나으리!”
조타수가 호들갑을 떨자 파비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뭐라도 발견했느냐?”
“이상한 배가 우리 배를 향해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해적선 같습니다.”
“해적선?”
“예, 적국의 약탈함인지, 해적인지 모르지만……. 우리 배를 노리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이 항로를 다니는 배도 없고, 설령 있다 해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다가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파비안이 되묻자 딜로스 조타수가 빠르게 말했다.
“저희는 근해에서만 항해를 했기 때문에 전투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일단 하데스 항으로 피신해야 할 것 같아서요. 선장님이 나으리 님들의 의견을 알아 오라 하셨습니다.”
“피하면 해적선을 따돌릴 수는 있나?”
파비안이 주위를 살폈지만 해적선은 뒤쪽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으니까요.”
“해적선에 마력포가 달려 있나?”
“그런 건 전함에나 있지 해적선에는 없습니다. 갈고리로 걸고 넘어와 칼로 싸우는 게 전부입니다.”
“상대 배에 마력포가 없으면 달아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라.”
“해적선이면 우리 배로 해적들이 건너올 겁니다.”
“건너오면 다 죽는 거지. 백작님이 소드마스터시고, 자작님은 그랜드 마스터시다.”
“정말입니까?”
딜로스 조타수가 반신반의한 눈으로 북부 귀족들을 살폈다.
소드마스터만 해도 믿기 어려운데 그랜드 마스터라니?
아무리 막 내뱉는 말이라도 적당한 선을 지켜 줬으면 좋겠다.
“내가 목숨이 달린 일에 거짓말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나?”
“아, 아닙니다.”
“그럼 가서 전해.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예, 알겠습니다.”
딜로스 조타수는 허리를 숙여 보인 후 황급히 조타실로 돌아갔다.
그런 그를 보던 파비안이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이냐니? 내가 그렇게 실없는 사람으로 보였나?”
그러자 엘리오가 한마디 했다.
“그랜드 마스터가 있다니 그러지. 다음부터는 소드마스터까지만 해.”
“자작님이 섭섭해 하실까 봐 그랬죠.”
“나 그렇게 옹졸한 사람 아니야.”
“예, 나중에 다른 소리나 하지 마십쇼.”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해적선이 맞는지 아닌지나 확인해 봐. 만약에 그게 남부의 해군이면 마력포를 쏠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파비안은 주돛대를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꼭대기의 탑캐슬(topcastle)에서 선원 하나가 망원경으로 뒤쪽을 보고 있었다.
“어이! 거기 탑캐슬! 내 말 들리나!”
파비안의 외침에 망원경에서 눈을 뗀 선원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 나리!”
“누가 쫓아오고 있다면서? 해적선이냐? 전함이냐?”
“전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함이 아니라고? 확실해?”
“예! 상선을 개조한 것 같습니다!”
“상대를 알 만한 깃발은? 걸려 있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파비안은 무심코 선미로 고개를 돌렸다.
로렌 공국과 벨라누스 백작가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 두 개가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파비안은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주돛대 중간쯤 솟구친 그는 추락하기 직전 가로 방향으로 뻗은 야드(yard)를 밟고 다시 솟구쳐 올랐다.
근처에서 그를 지켜보던 선원들이 입을 쩍 벌렸다.
그들도 기사들을 만나 봤지만 저런 날렵한 움직임은 처음 본 까닭이다.
야드를 밟고 새처럼 날아오른 파비안이 탑캐슬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는 자신의 두 눈으로 정체불명의 배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북부 기사의 화려한 몸놀림에 기가 죽은 선원, 스티드는 눈을 내리깔았다.
배에서는 기사들도 절절맬 거라 생각했는데 훨훨 날아다니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망원경 줘 봐라.”
“예.”
스티드는 군말 없이 망원경을 건넸다.
파비안은 망원경으로 조금 전까지 선원이 보던 방향을 살폈다.
과연! 대형 범선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히 갑판 어디에도 대포는 보이지 않았다.
범선 좌우편에 포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뻘쭘하게 서 있던 스티드가 아는 척을 했다.
“선체가 낮은 걸 보면 전함보다는 상선에 가깝습니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군. 사략선(私掠船, privateer ship)이 아니라 해적이겠지?”
파비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함은 선체 좌우 측면에 마력포를 설치하기에 선체가 두툼하다.
하지만 아무런 표식 없이 돌진해 오는 저 대형 범선은 선체가 납작해서 마력포를 설치할 공간이 없었다.
파비안이 선원에게 망원경을 돌려주며 말했다.
“네가 발견했느냐?”
“예.”
“그렇군.”
파비안은 선원의 얼굴을 확인한 뒤, 탑캐슬 밖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