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78
1178회. 각하, 어젯밤의 일이 기억나십니까?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해볼 만하다’였다.
사람에게는 상성이 있다.
예컨대 처음 만남부터 은근히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만만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
어쩌다 양쪽과 싸우게 되면 놀랍게도 결과는 첫 느낌대로 나온다. 부담스럽던 사람에게는 몰리고, 만만한 사람은 압도한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이 부서져 나갔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만난 뒤 오히려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그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했다.
“나는 베일럼 왕국의 라르바 오마르 백작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에스카토스 왕국의 엘리오 라고아 자작입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가리켜 보였다.
양측의 소개가 끝나자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을 향해 돌아섰다.
소개를 해도 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다소 과장된 동작으로― 후작을 소개했다.
“한 분을 더 소개해 드리겠소. 론디니움 제국의 위대한 검문이자, 기사들의 성지인 크나우프 대공가의, ‘지고의 검’이라 불리시는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님이시오.”
대귀족의 작위 앞에 특별한 호칭이 붙는 경우, 그들이 단지 작위만 계승받은 건 아니라는 의미를 가진다.
크나우프 대공가에 대해 훤히 꿰고 있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 각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파비안의 경우 크나우프 대공가의 이름 앞에 허리까지 꺾었다.
크나우프 대공가는 케이사 콜드월 백작의 말처럼 기사들의 성지인 까닭이다.
엘리오도 상대가 후작이라는 말에 주저 없이 꾸벅 인사를 했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귀족들이라기에 뻣뻣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저렇듯 예의를 차리니 호감이 생길 정도다.
그는 본래 싸우러 왔지만 북부 귀족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케이사 콜드월 백작의 바람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여하튼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호감을 갖자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엘리오 일행과 함께 항구의 태번(tavern)으로 이동했다.
먼저 달려간 특무대 기사들이 바닷바람에 있던 손님들을 모두 내보냈다.
잠시 후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과 케이사 콜드월 백작, 그리고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4인용 탁자의 구조상 파비안은 그 자리에 끼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앉았지만, 출입이 통제된 태번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고슬링 크나오프 후작이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북부와 제국의 평화를 위하여.”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망설이지 않고 그를 따라 외쳤다.
그러자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케이사 콜드월 백작과 라르바 오마르 백작도 그를 따라 잔을 비웠지만, 엘리오는 본래 폭식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두 모금만 마시고 내렸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잔을 보며 말했다.
“라고아 경은 술이 약한 가보군.”
“술도 약하지만 뭐든 한번에 많이 먹지 않아서요.”
“매사에 신중한 성격인가?”
“아뇨. 먹는 것만 그렇습니다.”
“야인 부족들은 한번에 많이 먹어 둔다고 하던데. 경은 조금 다르군.”
엘리오는 후작의 말을 알아들었다.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은 야인 부족들이 폭식을 했던 모양이다.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 끼어들었다.
“라고아 경은 검술이 뛰어나니까요. 그의 것을 탐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겁니다.”
엘리오가 케이사 콜드월 백작을 힐끔 보았다.
자신을 띄워 주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저의를 모르겠다.
분위기가 묘해지자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라고아 경, 북부의 상황은 어떻소? 제국은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제대로 된 소식을 들을 수가 있어야지.”
엘리오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마족 군주들을 물리친 뒤로 타메이온은 잠잠해졌습니다. 빙벽의 균열도 흑마법사들이 뿌려 놓은 차라트를 제거할수록 크기가 줄어들고 있고요. 차라트를 모두 제거하면 복구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차라트? 저주가 새겨진 뼛조각을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정확히 몇 개가 뿌려졌는지 모르겠지만 매일매일 상당히 많은 숫자를 회수하고 있습니다.”
“흑마법사들도 대륙에 몸담고 사는 인간인데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혹시 그 이유를 알고 있소?”
“흑마법사는 겉모습만 인간이지 그 속에 든 것은 마물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들의 주인이 가족을 죽이라 하면 가족도 죽일 자들이라더군요.”
“주인이 시켰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흑마법사들의 주인이…… 마그눔 오프스요?”
“예, 흑마법사들은 그렇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도 그들의 주인인 마그눔 오프스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흠!”
침음성을 흘리던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다시 물었다.
“흑마법사들의 주인이 흑마법사들에게 거짓 정보를 주었을 가능성은 없소?”
“제가 마법사들의 세계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있습니다.”
“그게 뭐요?”
“각하께서는 히르헤라에 메테오 스웜이 떨어졌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 일이 있었소?”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놀란 눈으로 케이사 콜드월 백작을 보았다.
그러자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 얼른 말했다.
“각하,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겠소.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 있소?”
“그것은 히르헤라에서 체포된 딜런 던포드라는 흑마법사의 소행이었습니다. 딜런 던포드는 7서클의 흑마법사였지요. 그런 그가 어떻게 9서클의 메테오 스웜을 사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설마 그걸 가능하게 한 이가 마그눔 오프스라는 거요?”
“그렇습니다. 마그눔 오프스가 딜런 던포드에게 서클을 증폭하는 흑마법과 메테오 스웜까지 가르쳐 줬습니다. 딜런 던포드는 마그눔 오프스가 천공성으로 돌아갔다고 말했고요.”
“놀랍군 놀라워. 그 모두를 직접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니 안 믿을 수도 없고.”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책망의 눈으로 케이사 콜드월 백작을 쏘아보았다.
이렇게 되면 최소한 마그눔 오프스의 존재는 믿어야 했다.
그가 정말 천공성으로 갔는지, 다른 곳으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부터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했다.
마그눔 오프스의 존재가 확실한 지금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같은 능력자와 가까이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비단 그것뿐이 아니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과 엘리오의 기질이 묘하게 잘 맞았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형인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의 빛에 가려져 주목을 덜 받았고, 그 덕분에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더구나 여색을 밝히다 보니 격식과도 담쌓고 살았다. 그가 건드린 여자들의 신분은 황족부터 노예까지 실로 다양했다.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그의 기질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잘 어우러졌다.
한편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편한 건 엘리오도 마찬가지였다.
흔히들 감정은 상대적이라고 한다.
상대가 나에게 호감을 품었는지 적대적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엘리오는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제국의 대귀족임에도 자신에게 친구처럼 격의 없이 다가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후작은 그가 이전에 만났던 다른 대귀족들과 확실히 달랐다.
예컨대 킬리언 헤일 공작과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의 경우 근엄하기만 했다.
하지만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그런 게 없었다.
강호로 치면 유명한 정사지간의 고수를 보는 느낌이랄까?
급기야 불콰하게 술기운이 오른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말했다.
“나는 라고아 경이 마음에 드네. 다른 귀족들은 뒷배경을 보고 잔머리를 굴리는데, 라고아 경은 그런 게 없거든. 나는 라고아 경처럼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엘리오도 격식을 따지지 않고 자신에게 잘해 주는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싫지 않았다.
“저도 크나우프 후작님이 마음에 듭니다. 고향에 두고 온 형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말한 형님은 남궁천이다.
실제로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말 많고 사람 좋아하는 게 남궁천을 닮긴 했다. 여색을 좋아한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 말에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반색을 했다.
“고향에 나와 같은 형님이 있다고? 푸하핫!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니 나도 만나 보고 싶군. 경도 나를 형님으로 부르는 건 어떤가?”
순간 케이사 콜드월 백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이런 게 문제다.
공사의 구별이 없어 항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일을 만들고 만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견제해야 할 사람이 이 무슨 망발이냐 말이다.
그가 막 대화를 자제시키려는데 엘리오가 한발 빨랐다.
“그럴까요? 그럼 형님으로 부르겠습니다. 나중에 무르기 없습니다. 형님!”
술기운이 오른 엘리오는 한술 더 떴다.
그렇게 두 사람이 형님 동생하기 시작하자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속이 복잡한 케이사 콜드월 백작과 달리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후련한 표정이다.
라고아 경이 특무대를 적으로 돌리지 않은 것만도 감사할 일인데,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과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도 없었다.
***
다음 날.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느지막이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을 찾아갔다.
“각하, 어젯밤의 일이 기억나십니까?”
“어젯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침부터 콜드월 백작이 정색을 하고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각하께서 취중에 라고아 경에게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십니까?”
“무슨 말? 경도 알다시피 워낙 많은 말을 했잖은가.”
“황송하옵게도 라고아 경에게 형님이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거? 난 또 뭐라고. 그게 뭐 어때서 아침부터 죽상인가?”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으셨습니까? 우리는 엘리오 라고아 경의 일행을 감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케이사 콜드월 백작의 고압적인 말에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정색을 했다.
“콜드월 백작.”
“예?”
“시건방 떨지 마라. 백작의 눈에는 내가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할 얼간이로 보이나?”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죄송합니다. 노파심에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엘리오 라고아 경과 가까이 지내니 그를 조사하지 말라고 했느냐?”
“아닙니다.”
“나를 투견장의 개라고 생각하나?”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벤젤의 뒷조사를 하라는 명도,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다. 백작의 눈에 보이는 게 있고, 후작의 눈에 보이는 게 있다. 경의 눈높이가 나와 같다고 생각하는가?”
“제가 미처 후작 각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벤젤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는 데 사흘의 시간을 주겠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예.”
고개 숙인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결국 여자의 뒷조사로 마무리할 거면서 자신을 닦달하다니!
크나우프 대공가에서 어떻게 저런 개망나니 같은 기사가 나왔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