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87
1187회. 귀족들이 언제 법 지키는 거 보셨어요?
하데스 항.
바닷바람 태번.
늦은 밤, 깊게 잠든 후안 카사스 남작의 어깨를 누군가 살짝 잡고 흔들었다.
“끙! 누구……?”
후안 카사스 남작이 억지로 눈을 떠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자작님?”
콜린 메스칼 자작이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세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후안 카사는 남작은 중요한 일이 생겼음을 알고 후다닥 침상에서 내려왔다.
잠시 후 콜린 메스칼 자작과 후안 카사스 남작이 바닷바람 태번을 나섰다.
콜린 메스칼 자작은 아무 말 없이 항구를 향해 걸어갔다.
후안 카사스 남작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파도가 부딪치는 방파제 앞에 선 콜린 메스칼 자작이 후안 카사스 남작에게 손을 까닥였다.
“가까이 와라.”
“예.”
후안 카사스 남작이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오자, 콜린 메스칼 자작은 좌우를 살핀 후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난번 선술집에서의 일은 자연스럽게 잘했다. 후작 각하께서 매우 흡족해하셨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와중에 후안 카사스 남작은 콜린 메스칼 자작의 안색을 살폈다.
보리스 기사단의 기사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일으킨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그 일로 보리스 기사단의 기사 윌리엄이 교수형을 당했다.
하지만 고작 그 말을 하려고 이 시간에 불러낸 것은 아닐 터였다.
“경도 내일 항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겠지?”
“후작 각하와 라고아 자작의 결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결투가 아니다.”
“결투가 아니라고요?”
후안 카사스 남작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피에스트라의 모든 귀족이 결투로 알고 있는데 아니라니?
설마 결투가 취소된 것일까?
“그렇다. 결투가 아니라 전투다.”
“전투요?”
후안 카사스 남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콜린 메스칼 자작을 보았다.
일대일의 결투를 왜 숫자의 제한이 없는 전투라 말하는지 모르겠다.
“제국의 앞날을 위해 후작 각하께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다. 만에 하나 후작 각하께서 라고아 자작에게 패하면, 북부 왕국에 그릇된 신호를 주게 되고, 그건 곧 전선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 특무대에게는 내일의 싸움이 곧 전투인 셈이다.”
“아, 예…….”
후안 카사스 남작이 석연치 않은 소리로 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내일의 결투에서 반드시 후작 각하가 이겨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왜 남작에 불과한 자신에게 하는지 모르겠다.
“내일의 전투에 경의 협조가 필요하다.”
“저어, 소드마스터들의 싸움에 이제 겨우 소드 비기너인 제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경의 사격 실력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외람된 말씀인데 소드마스터에게는 마력탄이 통하지 않습니다.”
“통하는 게 있다면?”
“예에? 그런 게 있습니까?”
얼마나 놀랐는지 후안 카사스 남작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소리를 낮춰라. 내가 경을 이곳까지 데리고 나온 것은 비밀 유지를 위해서다.”
“예. 죄송합니다. 너무 뜻밖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데 정말 그런 게 있습니까?”
“제국전쟁 당시 마탑에서 북부 왕국의 소드마스터를 암살하기 위해 마력탄을 개발한 적이 있다. 그게 엑시티움이라는 마력탄이다. 하지만 전쟁은 엑시티움이 보급되기 전에 끝났고, 엑시티움도 사장됐지.”
“아…….”
콜린 메스칼 자작이 품에서 한 뼘은 됨 직한 금빛 탄환을 꺼내 후안 카사스 남작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엑시티움을 받아 든 후안 카사스 남작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저어, 후작 각하께서도 아십니까?”
“아직 모르신다.”
“후작 각하의 결투에 허락도 없이 제삼자가 끼어들어도 됩니까? 그 일로 후작 각하께서 진노하시기라도 하면…….”
“이번 일을 명령한 분은 특무대장님이시다. 그러니 책임은 특무대장님이 지실 것이다. 네 임무는 하나다. 후작 각하께서 패할 것 같다고 생각되면, 엑시티움을 사용해라.”
“…….”
“대답은?”
“알겠습니다.”
후안 카사스 남작은 결국 명령을 받아들였다.
비겁한 짓이지만 그도 ‘북부 왕국에 그릇된 신호를 주지 않으려면 라고아 자작이 죽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
다음 날 아침.
엘리오는 평소와 같이 느긋하게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파비안과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엘리오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뭘 기다려요? 먼저들 드시지.”
“저도 그러자고 했는데 백작님이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요. 백작님, 제가 뭐랬습니까? 자작님은 이런 거 안 좋아하신다니까요.”
파비안이 툴툴거리며 탁자에 놓인 요리를 제 접시로 옮겼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라고아 경을 위해서가 아니네. 오늘과 같은 날이 흔한 줄 아는가. 역사에 기록될 날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지.”
백작의 말에 파비안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뒤늦게 크나우프 대공가의 결투가 어떤 의미인지 깨달은 것이다.
파비안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대귀족이라서 그런지 생각하는 바가 남다르다.
파비안이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안목을 부러워할 때 엘리오가 말했다.
“태번에 특무대가 안 보이네?”
보통은 한두 사람이라도 태번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지금은 씨가 말랐다.
특무대의 숙소가 바닷바람 태번임을 생각하면 보기 드문 일이었다.
“결투를 앞두고 부담스러워서 자작님을 피해 다니는 걸 겁니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고?”
“에이, 크나우프 후작은 푸토코아 백작과 다릅니다. 크나우프 대공가의 이름이 걸려 있는데 꿍꿍이라뇨? 절대 아닙니다.”
“아니면 말고.”
“자작님은 꼭 자신 없으면 ‘아니면 말고’라고 하시더라고요?”
“전략 전술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걸 그렇게 비하해야겠냐?”
“일대일의 결투에 전술 전략이 어디 있습니까? 강 대 강으로 부딪치는 거죠. 더 강한 자가 이기는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백작님?”
엘리오가 반박하자 파비안은 재빨리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답은 조금 달랐다.
“라고아 경과 크나우프 후작과의 결투만 본다면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특무대의 수장은 크나우프 후작이 아니라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지. 특무대와 크나우프 후작을 동일시해서는 안 되네.”
“그 말씀은 특무대가 자작님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러지 않을 걸세. 크나우프 대공가의 결투를 방해하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
그러자 파비안이 턱을 빳빳이 치켜들며 말했다.
“들으셨죠? 백작님도 특무대가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십니다. 자작님은 검술 실력에 비해 의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이해해라. 내가 원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사람이다.”
“그런 걸 쫌스럽다고 하는 겁니다. 자작님도 조만간 대귀족이 되실 텐데, 배포를 키우십쇼. 검술은 그랜드 마스터신데 마음이…….”
파비안은 ‘마음이 소드 비기너만도 못 하다’고 하려다가 말았다.
아무리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격의 없이 지낸다 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엘리오가 그 말을 물고 늘어졌다.
“마음이 뭐? 어떻다고?”
“모든 일에 대비하는 마음가짐이 훌륭하시다고요.”
“말투가 그게 아니었는데?”
두 사람이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때 셀리가 다가왔다.
“특무대라면 교수대를 지키고 있어요.”
“벌써? 결투까지는 아직 3시간이나 남았는데?”
파비안이 황당한 얼굴로 빤히 보자 셀리가 조금 더 자세히 말했다.
“특무대뿐 아니라 기사단도 아침부터 항구의 출입을 막고 있어요. 일반 시민들은 결투장 근처에도 가지 못할 거예요.”
엘리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야! 크나우프 후작의 위세가 대단하네. 결투 결과를 모르게 하겠다는 건가? 어차피 지면 다 까발려질 텐데?”
“그건 조금 이상하네요.”
파비안도 고개를 갸웃했다.
크나우프 대공가의 결투니 결투장 주변을 통제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항구의 출입마저도 막을 줄은 몰랐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고아 경, 제가 특무대장을 만나서 왜 그러는지 조금 떠봐도 되겠습니까?”
“아뇨. 맘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세요. 막상 싸움이 벌어지면 통제고 뭐고 의미가 없어질 테니까요.”
항구가 박살이 날지도 모를 싸움을 감추겠다니?
그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엘리오가 식사 후 일행과 차를 마실 때, 벤젤이 바닷바람 태번을 찾아왔다.
하지만 엘리오는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 그녀에게 빈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셀리가 뻘쭘한 얼굴로 서 있는 벤젤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벤젤 님, 잠깐 와 보시겠어요?”
“어? 그, 그래.”
셀리는 벤젤을 이끌고 뒷문으로 나갔다.
닭장 앞에 이르러서야 셀리는 잡고 있던 벤젤의 옷깃을 놓았다.
“왜?”
“뭘 왜예요? 보기에 민망해서 모시고 나온 거예요.”
“하아! 그랬구나. 고마워.”
벤젤은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자신에게 무관심한 엘리오 라고아 자작 옆에 멍하니 서 있는 것도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차던 벤젤이 뒤늦게 생각난 듯 물었다.
“라고아 자작님은 별말씀 없으시디?”
“아침부터 결투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제가 기사단에서 항구 출입을 막고, 특무대가 교수대를 통제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뭐라셔?”
“맘대로 하라고 그러시는 것 같았어요. 라고아 자작님은 크나우프 후작님이 무섭지 않은가 봐요? 간이 없으신 건가?”
“풋! 간이 없으면 벌써 죽었지.”
셀리의 엉뚱한 말에 벤젤은 실소를 흘렸다.
“그런데 어젯밤에 항구로 나갔다가 이상한 소문을 들었어요.”
“무슨 소문?”
“선원들이 그러는데 라고아 자작님이 폭풍우 치는 바다 위를 날아다니셨대요.”
“에이, 그건 아니다.”
“정말이에요. 폭풍우를 만나 딜로스 씨가 바다에 떨어졌는데, 라고아 자작님이 건져 주셨대요. 그 뒤로 선원들이 라고아 자작님과 눈도 못 마주친다나 뭐라나?”
“진짜?”
“진짜, 진짜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라고아 자작님과 같은 기사가 있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있으세요?”
“없어.”
벤젤은 고개를 저었다.
평민 기사의 대전사가 되어 크나우프 후작과 싸우겠다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 리 없다.
“소문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국 시민이지만, 이번 결투만큼은 라고아 자작님의 승리를 바라고 있어요.”
“쉿! 특무대가 들으면 큰일 나니까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네,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특무대가 결투장 주변에 사람들이 얼씬도 못 하게 막는다고 하더라고요. 결투가 공정하게 치러질지 의문이에요.”
“제국과 왕국의 모든 기사들이 결투를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른 짓은 하지 못할 거야.”
“그런데 왜 항구 출입까지 못 하게 막는대요? 이상하잖아요?”
“그렇긴 해도 결투는 공정하게 치를 거야. 그건 법에 의해서 보장된 권리니까.”
“에이, 귀족들이 언제 법 지키는 거 보셨어요? 대귀족들일수록 법을 안 지키잖아요. 법은 힘 없는 시민들에게나 엄격하지…… 귀족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거 아니에요?”
“네 말도 맞지만 상대는 크나우프 대공가야. 기사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들인데 결투에서 불법적인 짓을 하겠니?”
두 사람이 속삭일 때 멀리서 정오를 알리는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