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99
1199회. 한 걸음 더 나아가라
알트헬름 선장과 파비안을 보던 엘리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내 고향에서 현자가 한 말이 있어. ‘삼십 미터나 되는 높은 장대 끝에 이르러 한 걸음 더 나아가라[百尺竿頭進一步]’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반드시 죽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거야말로 크게 사는 길이라는 뜻이야.”
잠시 말을 멈춘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파비안, 여기서 항해를 계속하면 죽을 것 같으냐?”
“예? 보시다시피 날씨가……. 예,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엘리오의 시선이 이번에는 알트헬름 선장에게 향했다.
“선장님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지금 날씨에서 지난번과 같은 기상이변을 만나면 배가 침몰할 겁니다.”
“삼십 미터 높이의 장대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군요?”
“…….”
긴장한 알트헬름 선장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래서 누가 봐도 죽을 자리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배를 돌리지 않고 계속 갑니다.”
“예…….”
누구 말이라고 거역할까.
알트헬름 선장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전에는 기상이변이고 뭐고 두렵지 않았으나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라고아 백작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사색이 된 알트헬름 선장에게 엘리오가 말했다.
“지난번처럼 못 보던 섬이 보이거나, 기상이변의 징조가 시작되면, 선장님은 즉시 배를 돌려 빠져나가세요.”
순간 다 죽어 가던 알트헬름 선장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저, 정말입니까?”
“그러려면 선원들이 두 눈 똑바로 뜨고 사방팔방 살펴야 할 겁니다.”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트헬름 선장은 라고아 백작이 천공성 찾는 걸 절반쯤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하기야 지난번 기상이변을 겪으셨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왜 마의 해역을 계속 돌아다니시는 거지?’
궁금했지만 그는 감히 묻지 못하고 조타실로 돌아갔다.
잠시 후 딜로스 조타수가 나와서 선원들을 닦달했다.
선내에서 쉬고 있던 선원들이 뱃전과 고물[船尾]로 흩어졌다.
겨울바람은 점점 더 거칠어질 뿐 누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뱃전을 때리는 파도에 마력범선이 좌우로 출렁거렸다.
폭풍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마음이 불편할 정도의 요동이다.
엘리오 일행의 상체도 쉬지 않고 좌우로 흔들렸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문득 한마디 했다.
“오늘 파도가 지금까지 중에 가장 높은 것 같습니다.”
“태풍이 오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럼 정말 큰일 나는데.”
파비안이 힐끔힐끔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엘리오는 요지부동이었다.
느낌이라는 게 있다.
날씨를 생각하면 마의 해역을 떠나야 함이 옳지만, 녹색 섬이 나타날 것 같았다.
‘백척간두진일보’라는 말이 떠오른 것도 그래서다.
이성적으로는 떠나야 함이 옳지만 육감은 그러지 말라 했다.
마력범선은 하루 종일 높은 파도와 싸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해가 저물 무렵에 파도는 더욱 거칠어져서 갑판 위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철썩! 철썩―!
마력범선은 이제 좌우뿐 아니라 아래위로도 들썩였다.
선체가 들썩이면 뱃머리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좌우로 끄덕이던 엘리오 일행의 몸이 이제는 아래위로 들썩거렸다.
이러다 자칫 배에서 떨어질 수도 있겠다 생각한 파비안은 슬그머니 보조 돛대 옆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
해가 완전히 진 뒤에도 파도는 가라앉지 않았다.
뱃전과 고물에 있던 선원들이 하나 둘 선실로 다시 들어갔다.
앞이 안 보이는 것도 있지만 배가 너무 요동쳐 위험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는 엘리오 일행도 선실에서 간단히 해결했다.
배가 출렁거려 제대로 된 식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친 엘리오는 다시 뱃머리로 나갔지만,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은 선실에 그대로 남았다.
파비안이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는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며 말했다.
“참 지독하신 분이에요.”
“사명감이 대단한 분이시지.”
“사명감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고향이라면 알바 누베스 산맥의 야인 부락을 뜻하는 건가?”
“글쎄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파비안을 힐끔 보았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알바 누베스 산맥 출신인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글쎄요’라니?
“라고아 경의 고향이 따로 있나 보군?”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궁금하시면 직접 물어보십쇼.”
“후후. 충성스러운 가신이군.”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기분 나빠 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파비안 남작을 입이 가벼운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다음 날.
일찌감치 눈을 뜬 엘리오는 뱃머리로 나갔다.
새벽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교대한 파비안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파도가 조금 더 세졌습니다. 뱃전을 때리는 파도 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돕니다.”
“고생했다. 잠깐 들어가서 쉬어.”
“아직은 괜찮습니다. 누워 있어 봐야 멀미만 날 겁니다.”
“힘들면 작은 하늘 회로(small heavenly circuit, 小周天)를 돌려 봐. 그럴 때 돌리면 효과가 더 좋으니까.”
“해 봤는데 배가 출렁거려서 자꾸 끊어집니다.”
“어, 그래도 계속해.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질 거야. 그때부터가 진짜라고.”
“백작님도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셨습니까?”
“그거야 기본이지. 나도 태어날 때부터 지금 같은 경지는 아니었다고.”
“알겠습니다.”
파비안은 이를 악물고 ‘작은 하늘 회로’에 집중했다.
하지만 배가 아래로 쑥 꺼질 때마다 작은 하늘 회로는 툭툭 끊어졌다.
그럴 때마다 심장의 마나홀이 찢어질 것처럼 뻐근했다.
‘이러다 잘못되는 거 아닌가?’ 걱정됐지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된다고 하니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가슴의 마나홀이 갈기갈기 찢어지다 못해 너덜너덜한 느낌이다.
물론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만약 정말 마나홀이 찢어졌다면 멀쩡하게 서 있지도 못했을 게다.
파비안은 마나홀의 통증이 심해지자 조마조마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무리를 하면 폐인이 될지도 몰랐다.
마나홀은 계속해서 위험 신호를 보냈다.
파도 소리나 배의 출렁거림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폐인이 되느냐 마느냐’를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만둘까? 한번 더 시도해 볼까?’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잘못 물어뜯었는지 화끈거리더니 피 맛이 났다.
순간 파비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는 어느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그때 문득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말이 떠올랐다.
―내 고향에서 현자가 한 말이 있어. ‘삼십 미터나 되는 높은 장대 끝에 이르러 한 걸음 더 나아가라[百尺竿頭進一步]’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반드시 죽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거야말로 크게 사는 길이라는 뜻이야.
이제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삼십 미터나 되는 높은 장대 끝에 서 있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마나홀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기사에게 그건 죽음만도 못한 일이다.
‘라고아 백작님, 정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까?’
파비안의 눈에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균열의 기사이며 히르헤라의 수호자.
모든 신들에 맞서 홀로 싸우려는 기사.
그가 말했다.
계속하다 보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질 거라고.
그를 믿고 한 발 더 나아갈 수도 있고, 여기서 멈춰 마나홀을 지킬 수도 있다.
‘가자.’
파비안은 눈을 꾹 감고 ‘작은 하늘 회로’를 또다시 돌렸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던 마나홀은 터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털썩!’ 하고 마력범선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당연히 가슴이 탁 막혀 올 줄 알았는데, 거짓말처럼 마나가 작은 하늘 회로를 따라 유유히 돌아갔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말처럼 숨을 쉬는 것같이 편안했다.
그때, 주돛의 탑캐슬에서 견시 선원이 외쳤다.
“섬이다! 3시 방향에 섬이 보입니다!”
눈을 번쩍 뜬 파비안은 급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3시 방향의 수평선에 큰 점이 하나 찍혀 있는 게 보였다.
눈이 갑자기 좋아졌는지 깨알 같은 크기건만 선명했다.
조타실을 박차고 나간 알트헬름 선장은 뱃머리로 달려갔다.
“나으리, 그때 그 섬입니다! 배를 반대편으로 돌려도 되겠습니까?”
엘리오가 확인하듯 물었다.
“로도스 섬이 아닌 거 맞죠?”
“예! 우리가 있는 곳은 마의 해역입니다. 여기에 섬 같은 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배를 돌려 마의 해역에서 빠져나가세요.”
“예, 예!”
알트헬름 선장은 신바람 난 얼굴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엘리오가 보조 돛대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파비안에게 소리쳤다.
“파비안! 오마르 백작님을 모시고 나와! 늦으면 혼자 간다!”
“예!”
그러나 파비안이 선실로 가는 일은 없었다.
파비안의 대답과 동시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갑판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때마침 마력범선이 급격하게 선회했다.
엘리오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이 좌우편에 서자 즉시 운종술을 펼쳤다.
뱃머리에 하얀 구름이 몰려들었다.
강풍에 옷깃이 세차게 펄럭였지만 구름은 흩어지지 않았다.
엘리오가 구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윽고 엘리오 일행을 태운 구름이 마력범선 위로 둥실 떠올랐다.
견시 선원 토트는 기이한 느낌에 망원경에서 눈을 뗐다.
‘응? 뭐지?’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토트의 입에서 ‘어!’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얀 구름 속에 라고아 백작과 북부 귀족들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라고아 백작과 북부의 귀족들이 하얀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부드럽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잘못 봤다고 생각한 토트는 두 손으로 제 눈을 비볐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봐도 그대로였다.
파비안은 견시 선원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토트는 얼떨결에 마주 손을 흔들어 보인 후, 힘껏 소리쳤다.
“어디로 가십니까!”
파비안은 대답 대신 구름의 진행 방향인 3시를 가리켰다.
토트의 외침을 들은 선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뒤늦게 하얀 구름을 발견한 선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곧이어 3시 방향의 바다 위에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기상이변이 시작된 것이다.
“안갭니다! 안개가 밀려옵니다!”
선원들은 더 이상 하얀 구름과 북부 귀족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처럼 높은 파도에 기상이변까지 겹치면 배가 전복될 게 뻔해서다.
선원들의 외침에 다급해진 알트헬름 선장은 마력 기관까지 가동했다.
우우우웅―.
안개가 마력범선을 잡으려는 듯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마력범선의 고물이 안개에 닿기 직전, 어디선가 불어온 강풍에 마력범선은 미끄러지듯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촤아아아―!
마력범선이 저만치 멀어지자 안개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뒤늦게 기상이변에서 벗어났음을 알게 된 선원들이 펄쩍펄쩍 뛰며 환호했다.
“살았다!”
“와아! 죽는 줄 알았네!”
잠시 후 흥분이 가라앉자 뒤늦게 북부 귀족들 이야기가 나왔다.
“북부 귀족들은 어떻게 된 거야?”
“구름을 타고 갔잖아.”
“기상이변이면 곧 폭풍우가 칠 텐데 구름이 견딜지 모르겠네.”
“다 죽겠지.”
“북부 귀족들이 죽으면 우리도 개털 되는 거 아냐?”
“그러네. 씨발.”
살았다고 기뻐 날뛰던 분위기가 이내 무겁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