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06
1206회. 인연이라는 게 종잡을 수가 없네요
엘리오가 사나운 얼굴로 죽어 가는 카마 데비아스에게 소리쳤다.
“살아 있을 때 심장을 가르라고? 씨발! 내가 못 할 것 같아?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알아? 나 진짜 이기적인 놈이라고!”
“시간이 많지 않다…….”
카마 데비아스의 숨소리가 점점 약해져 갔다.
태양신이니 버텼지 인간이나 마족이었으면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엘리오는 참담한 눈으로 카마 데비아스를 보았다.
자신에게 그는 ‘이세계에서 만난 괜찮은 신(神)’이지만, 그에게 자신은 청명신주(靑冥神呪)의 영향으로 혈육과 같은 존재이리라.
그가 아는 한 처음 만난 인간을 위해 자신의 심장까지 내어줄 신은 없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카마 데비아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윽고 파비안이 중얼거렸다.
“라고아 백작님이 상남자 같지만 속이 여리신 분인데……. 제가 가서 대신 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려 볼까요?”
“자기 심장은 강철인 줄 아는 모양이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그가 보기에 두 사람의 심성은 오십보백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오마르 백작님이 대신 해 주시든지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번 일은 그럴 수 없네.”
“왜요?”
“태양신이 자신의 심장을 내어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나?”
“코어를 가져가라고 그런 거 아닙니까?”
“그건 핑계고, 천공성과 마의 해역을 유지하는 게 코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요?”
“태양신은 자신의 후계자로 라고아 경을 택한 게 틀림없네. 그런 단 한 번뿐인 고귀한 의식에 제삼자가 끼어들면 안 되지.”
“거기에 그런 뜻이 담겨 있다고요?”
“생각해 보게. 만약 라고아 경이 코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천공성은 지금처럼 남아 있을 걸세. 수천 년간 전설로 내려온 천공성의 새 주인이 누군가?”
“라고아 백작님?”
“그런 걸 후계자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하나?”
“아하! 그런 뜻이었군요.”
파비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오마르 백작이 왜 그것을 ‘고귀한 의식’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말했다.
“끝난 것 같군.”
그 말에 파비안은 황급히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손짓으로 땅을 파, 그곳에 카마 데비아스를 묻고 있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엘리오가 자신이 만든 작은 봉분 앞에서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이런 걸 보면 신도 인간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라고아 경과 함께한 뒤로 세상이 조금씩 달리 보여 큰일입니다. 하하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말끝에 가볍게 웃었다.
물론 분위기를 전환해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눈치 빠른 파비안도 한마디 거들었다.
“라고아 백작님, 천공성의 주인이 되셨는데 성안에 뭐가 있나 한번 둘러보셔야죠?”
그 제안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천 년간 전설로 내려온 천공성에 뭐가 있는지 그도 궁금한 까닭이다.
“그럴까? 어차피 오늘 하룻밤은 묵어야 할 것 같으니까.”
엘리오도 반대하지 않았다.
성 내부를 탐색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당장 밤이슬을 피할 곳이 필요해서다.
잠시 후 엘리오 일행은 천공성 안으로 들어갔다.
천공성 내부 구조는 여느 대귀족들의 성과 다를 게 없었다.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내성 중앙 홀에 자리 잡고 쉬었지만, 파비안은 굶주린 쥐처럼 천공성 내부를 쑤시고 다녔다.
그러다 자정쯤 되어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침실로 가려 할 때― 터덜터덜 돌아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라고아 백작님은 재물과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재수 없는 소리에 엘리오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천공성을 아무리 뒤져 봐도 금은보화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거집니다, 거지.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성은 처음 봅니다.”
“카마 데비아스 못 봤냐? 금은보화를 밝힐 신같이 안 생겼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창고가 텅 비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도둑놈이 와서 싹 쓸어 간 것처럼 모든 창고가 비어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천공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잖아. 외부와 교류를 하지 않는데 금은보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 없는 게 당연하지.”
“라고아 백작님은 억울하지도 않으십니까? 이건 빛 좋은 개살구라니까요.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게 전붑니다. 뭐 하나 돈 될 게 없습니다.”
“내가 뭐 돈 벌려고 여길 왔냐? 뭐가 억울해?”
“그래도 수천 년 전설의 천공성을 차지하셨는데……. 빈손으로 나가야 하니 그러죠. 금으로 된 술잔 하나 없다니까요!”
“인마,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야. 넌 너무 욕심이 많아.”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타박하자 파비안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끌어들였다.
“오마르 백작님! 제가 욕심이 많은 겁니까? 천공성이 알고보니 빈껍데기인 게 너무한 겁니까? 한 말씀 해 주시죠.”
그러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 말대로 천공성에 돈이 될 만한 게 없다는 건 조금 아쉽군. 그러나 우리가 천공성에 온 목적을 달성했으니 억울할 이유는 없다고 보네.”
“오마르 백작님은 조금 아쉬운지 몰라도 저는 무척 아쉽습니다. 그래도 저는 천공성에 보물이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남작가의 창고를 털어도 이보다는 나을 겁니다.”
파비안이 계속해서 징징거리자 엘리오가 눈을 부라렸다.
“뭐? 남작가의 창고를 털어? 인마, 우리가 도둑이냐? 그리고 왜 보물이 없어? 금은보화보다 더 값진 태양신의 코어를 얻었는데.”
“그건 그렇지만……. 이왕이면 부스러기라도 좀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어서……. 남부로 가실 거잖습니까?”
“가야지.”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습니까.”
“날씨가 따뜻해서 남부 사람들은 수렵과 채집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다며?”
“수렵과 채집을 하면서 가시게요?”
“정 아쉬우면 못 할 것도 없지.”
“시간을 아끼셔야죠. 고향의 가족분들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
“태양신의 코어가 있잖아. 시간 맞춰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수렵과 채집을 직접 하실 것도 아니잖습니까! 다 저를 시키실 거면서.”
“내 기사라며? 내가 떠나면 내 소유물을 다 네가 가질 텐데, 그 정도도 못 해?”
“해야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말해 주는데 천공성은 잊어버려. 어차피 나 떠나면 바닷속에 가라앉을 테니까.”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고요?”
“마의 해역과 천공성을 떠 있게 하는 게 태양신의 코어 때문이잖아. 그게 부서지면 마의 해역은 사라지고, 천공성도 바다에 떨어지게 될 거야. 바다 아래로 잠기는 거지.”
“우리가 천공성의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자가 되는 거네요?”
“그런 셈이지.”
“아깝네요. 천공성이라도 건졌으면 했는데.”
“이걸 어디다 쓰게? 비공정도 없으면서. 넌 줘도 못 가져.”
“그렇긴 해도 아직 찾지 못한 비밀 공간이 남아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게 영원히 바닷속에 묻힌다 생각하니 배가 아프네요.”
“비밀 공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모든 귀족들의 성에는 비밀 공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마르 백작님?”
파비안의 물음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파비안 남작의 말이 맞습니다. 신분이 높을수록 비밀 공간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만들어 둡니다. 여러모로 쓸모가 있으니까요.”
그러자 엘리오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파비안에게 말했다.
“그럼 밤을 새서라도 찾아봐. 날이 밝으면 다시 돌아올 일 없을 테니까.”
“제가요? 그걸 저 혼자 밤새 찾으라는 겁니까?”
“어, 찾아서 나오는 게 있으면 절반을 줄게. 어때? 솔깃하지?”
파비안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머리를 굴렸다.
태양신의 비밀 창고라면 어마어마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게다.
비록 절반이라 해도, 왕 부럽지 않은 재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찾는다면 말이다.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번갈아 보았다.
라고아 백작은 아예 몸을 쓸 마음이 없어 보이고, 오마르 백작 역시 재력가라 그런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마저 포기하면 천공성의 숨겨진 보물은 영원히 바닷속에 잠기고 만다.
시도해 보지도 않고 그 막대한 보물을 바다에 처박는다?
그런 꼴은 죽어도 못 본다.
“제가 찾겠습니다.”
“어, 수고해.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랄게.”
엘리오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도 피식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파비안은 매의 눈으로 천공성 구석구석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다음 날.
태양이 천공성을 환하게 비추자 엘리오 일행은 안마당으로 나갔다.
엘리오가 퀭한 눈을 한 파비안에게 물었다.
“비밀 공간은 발견했고?”
“아뇨. 하루만 더 묵으면 안 되겠습니까?”
“또 삼시 세끼를 에너지 볼로 때우자고? 냄새만 맡아도 짜증이 난다면서?”
“하루만 더 시간을 주십쇼. 이대로 떠나면 남은 평생을 후회할 것 같습니다.”
“딱 하루다? 더 달라고 하면 안 돼. 그때는 너 남겨 두고 간다?”
“예, 하루면 됩니다. 저도 기산데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겠습니다.”
파비안이 믿어 달라는 듯 주먹으로 제 가슴을 퍽퍽 때렸다.
그 모습에 엘리오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동의를 구했다.
“오마르 백작님, 하루만 더 시간을 줘도 되겠습니까? 남은 평생을 후회할 것 같다는데요?”
“그러시지요. 후후훗!”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한 파비안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동의하자 죽어 가던 파비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감사합니다, 오마르 백작님. 보물을 발견하면 제 몫의 십 퍼센트를 드리겠습니다.”
“됐네. 오늘도 못 찾으면 약속대로 내일은 깨끗이 포기하게.”
“예!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오늘까지만 찾아보겠습니다.”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에너지 볼을 받자마자 성안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가 사라지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슬쩍 운을 뗐다.
“그런데 라고아 경. 태양신이 죽던 날, 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시던데……. 남들이 알면 곤란한 내용입니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대귀족답게 궁금한 점을 에둘러 물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라고 하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지그시 응시했다.
계속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세이렌을 천공성 거주민이 저주받아서 변한 거라고 했잖아요? 그게 아니랍니다. 천공성 거주민들은 태양신의 이름으로 너무 악독한 짓을 많이 해서 모두 죽였답니다. 자기가 그런 결정을 내린 걸 후회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 인간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천공성을 하늘에 올리고, 마의 해역을 만들었던 거죠.”
“아!”
“빙벽이 세워지기 전의 고대를 마도시대라고 하는데, 천공성을 띄운 게 그때라네요. 그런데 운 없게 바다 마족인 세이렌들이 마의 해역에 갇혔고, 그 원망으로 아무에게나 저주를 거는 거랍니다.”
“그랬군요.”
“제가 태양신의 코어를 깨트리면 세이렌들도 풀려날 겁니다. 카마 데비아스가 코어를 내준 게 꼭 저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라고아 경이 아니었다면 태양신도 자신의 코어를 내어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태양신과 라고아 경, 세이렌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엘리오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연이라는 게 종잡을 수가 없네요. 죽여야 할 대상인 카마 데비아스는 저를 위해 자기 심장을 내어 주었는데, 정작 믿고 의지했던 샤스트라 파라크티(구천현녀)는 저를 속였으니…….”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함께 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