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07
1207회. 라고아 백작님에 대한 저의 충성심이라고 생각해 주십쇼
다음 날.
파비안은 어제보다 더 망가진 몰골로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제 찾는 걸 포기했는지 시간을 더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엘리오가 눈에 띄게 핼쑥해진 그를 보며 말을 걸었다.
“찾았냐?”
“전혀요. 포기했습니다.”
“비밀 공간이 없는 건 아니고?”
“있을 겁니다. 태양신이 빈털터리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필요를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르지.”
“라고아 백작님은 태양신에게 보물이 없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네가 못 찾았으면 없는 거 아냐?”
엘리오가 되묻자 파비안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시간이 넉넉했으면 찾았을 겁니다.”
“설마 시간을 더 달라는 건 아니지? 기사가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거 아니다?”
“제가 언제 시간을 더 달라고 했습니까? 저도 약속한 건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래? 네가 시간을 더 달라고 하면 줄까? 했는데, 싫다니 이제 슬슬 떠나야겠다.”
순간 다 죽어 가던 파비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정말이십니까? 시간을 더 달라고 하면 주실 겁니까?”
“약속은 지킨다면서?”
“라고아 백작님이 허락해 주시면 약속이 대숩니까? 시간 더 주실 겁니까?”
“쯧쯧! 이봐, 이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안 줘. 기사가 약속한 건 지켜야지.”
뒤늦게 파비안은 모두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한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엘리오는 파비안의 뜨거운 시선을 외면하고 돌아섰다.
잠시 후 엘리오 일행의 발밑으로 하얀 구름이 뭉글뭉글 생겨났다.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앞장서자 파비안도 마지못해 걸음을 떼어 놓았다.
이윽고 엘리오 일행을 태운 구름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
피에스트라.
하데스 항.
어둑어둑한 초저녁, 을씨년스러워 보일 정도로 텅 빈 항구로 하얀 구름이 날아들었다.
구름은 어구를 보관하는 창고 뒤편의 한적한 공터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구름에서 내린 엘리오 일행은 바닷바람 태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바닷바람 태번.
엘리오 일행이 바닷바람 태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틀 전 돌아온 마력범선의 선원들은 ‘북부 귀족들이 마의 해역에서 실종됐다’고 했다.
마의 해역에서의 실종은 곧 죽음이다.
바다 한복판에서 실종되고 이틀이 지났으니 그들의 죽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북부 귀족들이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태번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셀리가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로 주춤주춤 파비안 남작에게 다가갔다.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님? 맞으신가요?”
“맞다. 안 본 지 며칠 됐다고 벌써 단골 손님의 얼굴을 잊은 것이냐?”
“살아 계셨어요? 귀신 아니죠?”
“당연히 살아 있지. 죽어서 다시 찾아올 정도로 우리가 태번에 미련이 있을 것 같으냐?”
“없죠. 잘 오셨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셀리는 북부 귀족들을 때마침 비어 있던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파비안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아직 숙소에 우리 짐이 남아 있겠지? 죽은 줄 알고 내버렸다거나, 태웠다고 하면 전부 배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버리라는 걸 제가 며칠 더 두고 보자며 말렸어요. 방도 짐도 그대로니 걱정하지 마세요.”
“잘됐군. 저녁이나 푸짐하게 내와 봐라. 이틀 동안 전투 식량만 먹었더니 입에서 쉰내가 나는 것 같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오늘 메뉴는 스튜와 훈제 연어, 거위 통구이예요.”
말을 마친 셀리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침묵하던 손님들이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차를 마시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지금이면 남부 쪽 국경이 막혀 있을 겁니다. 라고아 경이 제국에서 작위를 받은 건 다시 생각해도 잘한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남부로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을 겁니다.”
파비안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제가 제국군이어도 북부 귀족이 남부로 간다면 의심의 눈으로 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부에서는 라고아 백작님의 방문을 상당히 싫어하겠는데요?”
“나를 왜?”
“이제는 제국 백작의 신분도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라고아 백작님이 제국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천공성이야 흑마법사의 배후를 쫓는다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지만, 어비스는 아니잖습니까? 분명히 강철 골렘에 대해 조사하러 왔다고 오해할 겁니다. 아니라고 한들 믿겠습니까?”
“그건 또 그렇네.”
엘리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파비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북부의 귀족이 드나드는 것도 싫어할 텐데, 제국의 작위까지 받았으니……. 사사건건 우리 일을 방해하려 할 겁니다.”
“설마 그 정도까지 할까?”
“하고도 남죠. 제국하고 전쟁도 벌이는 사람들인데.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겁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도 한마디 거들었다.
“파비안 남작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남부는 강철 골렘의 정보를 북부에도 숨기고 있으니까요. 라고아 경의 경우 북부는 물론 제국과도 가까우니 더욱 경계를 할 겁니다.”
“…….”
둘의 지적에 엘리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천공성을 찾는 일은 제국에서 묵인했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제국은 천공성 찾는 일을 도와주려고까지 했다.
‘천공성으로 간 흑마법사의 배후를 찾는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비스는 다르다.
우샤스 운드라를 찾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목적일 뿐이다.
게다가 ―강철 골렘을 손에 쥔― 남부 왕국은 어비스에 변화가 생기는 걸 원치 않을 게 분명하다.
자신이 우샤스 운드라를 죽이려 한다는 걸 알면 대수림의 출입을 막을지도 몰랐다.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파비안이 말했다.
“남부 귀족들에게 우샤스 운드라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십쇼. 그럼 진짜 대수림에 한 발도 못 들어가게 할 겁니다.”
“그렇겠지?”
“절대요. 제가 남부 귀족이래도 막습니다.”
“그럼 뭐라고 하냐?”
“일단 어비스에 들어가셔야 하니까 모험가 등록을 먼저 하십쇼.”
“모험가 등록? 그런 게 있어?”
“용병이 자치 조직이라면, 모험가는 중앙 정부에서 관리하는 조직입니다. 용병처럼 모험가도 따로 등록증이 나옵니다.”
“피에스트라에서도 가능한가?”
“될 겁니다. 모험가 등록은 치안대에서 등록이 가능하니까요.”
“절차가 까다롭지 않은가 봐?”
“신원 확인 절차가 까다롭지 등록은 간단합니다. 지원해 주는 건 없고, 의무만 있는 거라서요. 황제나 영주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죠.”
“무슨 의무?”
“발굴한 보물을 신고해야 하거든요. 장물 거래를 막기 위해 만든 제도라는데……. 황제나 영주가 보물을 우선적으로 취득하기 위해서 만든 절차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고하지 않아도 거래는 되거든요. 그렇게 뒷거래로 거래되는 보물이 더 많기도 하고요.”
“신고한다고 나쁠 건 없잖아?”
“영주나 황제가 눈독을 들이면 헐값에 넘겨야 하잖습니까.”
“아하!”
그제야 엘리오는 신고보다 뒷거래가 더 많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물을 발견하고 신고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누군가에게 탈취당하면 영영 못 찾습니다. 장물이지만 정당하게 거래가 되고요. 나중에 원주인이 찾아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신고하는 게 낫겠네.”
“어떤 보물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강철 골렘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강철 골렘을 발굴했습니다. 관청에 신고하면 헐값에 영주에게 넘겨야 합니다. 하지만 그걸 암거래로 팔면 어마어마한 금액을 손에 쥐게 되겠죠. 위험하지만 얻게 되는 이익이 그만큼 크다고나 할까요? 모험가들은 그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들 말 합니다.”
“위험이 크면 돌아오는 것도 크다?”
“그렇습니다.”
“진짜 상남자들이네. 그러다가 보물 빼앗기고 목숨도 잃으면 어쩌려고?”
“모험가들 대부분이 가늘고 길게 가느니 짧고 굵게 가는 걸 선호합니다.”
“알았어. 그러니까 등록이 쉽다는 말이잖아.”
“예, 그냥 이름만 적어 내면 모험가 증명서를 발급해 줍니다. 그것만 있으면 용병처럼 어느 왕국, 어느 영지든 무사통과할 수 있고요. 누구도 모험가의 출입을 정당한 이유 없이 막지 못합니다. 그걸 억지로 막아 보려다가 전쟁이 터진 거잖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어차피 전쟁이 났으니까 모험가의 출입을 막을 수 있잖아?”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슬쩍 끼어들었다.
“완전히 막은 건 아닙니다. 그랬다면 북부 왕국에서 들고일어났을 겁니다. 신고만 하고 자유로이 어비스에 드나들던 것을 허가제로 바꾼 것뿐입니다. 제국의 모험가에게는 좀처럼 허가를 내주지 않았겠지요.”
“그럼 우리는 북부의 모험가로 등록을 하면 되겠네요?”
“저와 파비안 남작이 모험가로 등록하려면 북부 왕국에 가야 합니다. 제국 치안대에서 북부 왕국 귀족들을 모험가로 등록시켜 주지는 않으니까요. 라고아 경의 경우는 제국 모험가로 등록이 될 겁니다.”
“이런!”
엘리오가 탄식을 터뜨렸다.
북부 모험가면 남부 왕국이 딴지를 걸기 어려울 텐데 곤란하게 됐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도 저와 파비안 남작의 경우 대수림 출입에 제한은 없을 겁니다. 아직은 동맹인 북부의 귀족이니까요. 경계를 할지언정 출입까지 막지는 못할 겁니다.”
“그럼 저도 모험가 등록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어비스의 출입은 모험가들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파비안 남작이 모험가 등록을 하시라고 한 겁니다.”
“아, 파비안 너는 그걸 알면서 왜 북부에서 모험가 등록 얘기를 안 했냐?”
파비안이 계면쩍은 얼굴로 답했다.
“그 전에 천공성을 찾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수천 년간 누구도 천공성을 찾지 못해서, 어비스는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모험가 등록증을 구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남부 왕국에서 발행해 주냐?”
“전혀요. 그들이 저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걸 발행해 주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구해?”
“대수림에 모험가들의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 암시장에서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가짜 모험가 등록증을 사겠다고?”
“가짜가 아니라 진짜입니다. 다른 사람이 발급받은 걸 제가 사는 거죠.”
“그게 그 소리지. 신분이 다른데 그게 가능해?”
“출입구를 지키는 사람들이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험가 증명서의 진위 여부만 확인하고 말겠죠. 인생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엘리오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남의 증명서를 사서, 사기를 치겠다는 거잖아?”
“사기라뇨. 정당하게 돈 주고 구입한 증명서를 왜 사기라고 하십니까? 그럼 저희를 대수림에 남겨 두고 혼자 어비스에 들어가시든지요.”
“와아! 너 진짜 얼굴 두껍다.”
“라고아 백작님에 대한 저의 충성심이라고 생각해 주십쇼.”
파비안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방법이 없다면 모를까?
모험가 마을의 암시장에서 구하지 못할 게 없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