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16
1216회. 재밌는 물건이 하나 나왔습니다
하계의 어느 가을.
남직례성 합비 여강현의 소호에 인접한 원가산에는 강호에서 ‘가장 유명했던’ 장원이 있다.
삼십 년 전에 ‘천하제일인’으로 불리던 연적하가 은거한 석경장이다.
그와 한솥밥 먹던 사파에서는 그를 ‘소악마’로 여겼지만, 대다수 무인과 백성들은 ‘정사지간의 거인’으로 생각했기에 그런 별호가 붙은 것이다.
하지만 그 모두가 잊혀진 과거에 불과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하물며 삼십 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오죽할까.
유명교, 명왕교, 마교 등 강호에 혈겁을 몰고 왔던 단체를 기억하는 건 원로들뿐이었다.
이제는 설화인(说话人, 전문 이야기꾼)들조차 유명교를 언급하지 않았다.
강호의 세력 구도도 변했다.
검왕 남궁벽이 노환으로 사망한 이후 남맹은 자연스럽게 와해됐다.
검왕 남궁벽만큼의 무력과 권위를 가진 사람이 없다 보니 생긴 일이다.
그렇다고 호천맹이 강호의 주인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굵직한 사건이 없다 보니 호천맹도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걸 두고 무림의 몰락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실 도검으로 무장한 무림인들은 더 이상 조총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남직례성 합비 여강현.
석경장.
이른 아침.
석경장의 일꾼들이 마당에 가득한 낙엽을 열심히 쓸고 있을 때다.
활짝 열린 대문 앞에서 중년 남자가 점잖게 소리쳤다.
“계십니까!”
일꾼 중 하나가 빗자루를 나무에 기대 놓고 부리나케 대문으로 달려갔다.
“뉘십니까?”
짐마차를 뒤에 달고 온 중년인이 웃으며 답했다.
“나는 낙양에 본점을 둔 상조상방의 손창월 행수요. 우리 방주님께서 석경장의 안주인께 전하는 물건이 있어 찾아왔소.”
손창월은 현재 상조상방의 방주인 손학의 아들 중 하나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주인에게 전하는 물건이 있다’는 말에 일꾼은 서둘러 안채로 달려갔다.
잠시 후 돌아온 일꾼은 손창월 행수를 객청으로 안내했다.
손창월 행수는 차를 마시며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요즘 사람들은 석경장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는 부친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하아! 화무십일홍이라고 하더니……. 세월 앞에 장사가 없구나.’
관리를 잘해서 객청 내부는 깨끗했지만 가구며 기둥이 한눈에 봐도 낡았다.
그가 차를 절반쯤 마셨을 때 인기척이 났다.
이윽고 안채와 연결된 월동문으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녀가 들어왔다.
그녀가 소문의 그 십전무후 남궁연임을 직감한 손창월 행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객청에 오른 남궁연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상조상방의 손님은 십삼 년 칠 개월 하고도 닷새 만이군요. 손 방주의 심부름이라고 했나요?”
깜짝 놀란 손창월 행수가 어버버한 눈으로 보자 남궁연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손 방주님은 무탈하시죠?”
“아, 예.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부인을 뵈니 십전무후라는 별호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이, 요즘 누가 십전무후를 알아준다고.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를 거예요.”
“…….”
손창월 행수는 멍하니 남궁연을 보았다.
자신이 십전무후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부친에게 듣기로 십전무후의 나이는 환갑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미녀는 많아 봐야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
남궁연은 구주에서 건곤벽(乾坤碧)의 영기를 취해 겉모습이 늙지 않았는데, 그걸 모르는 손창월은 귀신에 홀린 느낌이었다.
손창월 행수가 넋 놓고 보자 남궁연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손 방주께서 나에게 전하는 물건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아, 예, 죄송합니다. 맞습니다. 부친께서 석경장의 안주인께서 알면 좋아할 물건이라며 꼭 전해 드리라 했습니다.”
“내가 좋아할 물건이라는 게 뭘까요?”
남궁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그것도 삼십 년 전이다.
손 방주는 삼십 년이 지난 지금 새삼 책을 선물할 사람은 아니었다.
“지난해 연가무관의 연 대협(연무백)께서 와룡장이 있던 터를 저희 상조상방에 판매하신 적이 있습니다.”
“연가무관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더니 결국 그렇게 됐군요?”
“다들 도시로 이사를 가서 시골 무관은 관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래서요?”
“상조상방에서 그 자리에 새로이 장원을 짓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터 파기 공사를 하던 중에 재밌는 물건이 하나 나왔습니다.”
“재밌는 물건요?”
“예, 창고가 무너지면서 함께 묻힌 것 같은데……. 오래된 청동 거울입니다.”
순간 남궁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연적하와 구천현녀경의 관계를 알고 있던 그녀는 심장이 뛰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청동 거울이라니 깨지지는 않았겠군요.”
“그렇습니다. 통으로 제작된 것이라 녹이 슨 것 외에는 멀쩡합니다. 대장간으로 보내 청동 주괴를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방주님께서 석경장의 안주인에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다고 반대하셨습니다.”
“그럼 저 짐마차에 실려 있는 게?”
“맞습니다. 와룡장에서 발견한 청동 거울입니다. 녹을 제거할까 하다가, 그 과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 발견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아, 물론 흙은 털고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잘하셨어요. 세월의 흔적을 애써 지우려 할 필요는 없지요. 손 방주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좋은 선물을 받았네요.”
“아닙니다. 합비의 좋은 사업장들을 저희에게 넘겨주셨는데, 늦게라도 보답을 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게 연가무관의 일만은 아니다.
석경장도 그동안 합비에 가지고 있던 사업장의 절반을 처분해야 했다.
대부분 장사가 잘되지 않아서 정리한 것들이다.
때마침 합비에 지점을 내려던 상조상방에서 그걸 인수해 갔었다.
손창월 행수는 마부를 도와 짐마차에 실린 나무 궤짝을 객청 마루로 옮긴 후 돌아갔다.
그러나 남궁연은 선뜻 나무 궤짝의 뚜껑을 열지 못했다.
정오 무렵.
그녀를 빼닮은 미녀가 객청에 나타났다.
삼십삼 년 전 연적하와 남궁연 사이에서 태어난 연지안이었다.
연지안이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남궁연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응? 지안이구나.”
“아침에 손님을 만나러 가신 분이 지금까지 뭐 하세요? 손님은 금방 갔다던데.”
“손 행수? 그는 조금 전에 갔지.”
“조금 전이 아니에요, 어머니. 벌써 정오가 다 되어 간다고요. 그 사람은 한 시진(2시간) 전에 돌아갔어요.”
순간 남궁연이 깜짝 놀란 눈으로 연지안을 보았다.
“벌써?”
“그렇다니까요. 그건 손님이 주고 간 거예요?”
“응? 응.”
남궁연이 성인 키만 한 크기의 장방형 나무 궤짝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게 뭔데요?”
“청동 거울.”
“상조상방에 거울을 주문하셨어요?”
“훗! 아니. 네 친가인 와룡장에서 발굴한 청동 거울이라는구나.”
“아! 낙양 본점 사람이었나 봐요?”
“손 방주가 아들 편에 보냈더구나. 오 년 전 합비의 상가를 팔아 준 것에 대한 선물이라고.”
“그랬구나. 그런데 왜 아직 그러고 계세요?”
“이 거울은 보통 거울이 아니거든.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떨려서……. 도무지 열어 볼 용기가 나지 않는구나.”
“보통 거울이 아니라고요? 혹시 아버지가 말했던 그 거울이에요?”
연지안도 구천현녀경을 알고 있었다.
대체로 딸은 장성하면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게 된다.
꼭 그런 게 아니라도 ‘건곤벽의 영기’를 흡수했던 남궁연과 ‘마신 메누아의 원신’이 깃든 연지안의 관계는 유별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구천현녀경이 틀림없어. 와룡장에 이만한 크기의 청동 거울은 그게 유일하니까.”
“그런데 왜 안 열어 보세요?”
“너도 네 아버지가 구천현녀경을 통해 구천현녀를 만난 건 알고 있지?”
“네.”
“어쩌면…… 구천현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만나서 뭐 하시게요? 벌써 삼십 년이나 지났는데. 아버지는 삼백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어머니도 그만 포기하세요.”
“포기하라고? 아니, 네 아버지는 내 전부야.”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어머니가 아무리 장수를 하신다 해도…….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살아 계실 수는 없어요.”
“알아.”
그런데 남궁연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가 모르는 게 있군요?”
“너처럼 나도 비밀이 많은 여자란다.”
남궁연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연지안을 보았다.
그러자 연지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머니도 참, 제게 무슨 비밀이 있다고. 그건 그렇고 왜 아직 열어 보지 않으시는데요? 뭔가 방법을 찾으신 것 같은데.”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니 망설여지는구나.”
“제가 대신 열어 드려요?”
“고맙지만 내가 할게. 너는 옆에서 지켜봐 주렴.”
남궁연은 연적하와 관계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럴게요.”
연지안은 선선히 물러났다.
자신보다 어머니의 바람이 더 간절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궁연은 천천히 공들여 못을 하나하나 뽑았다.
잠시 후 궤짝 상판을 걷어 내자 표면에 잔뜩 녹이 슨 청동 거울이 보였다.
그녀는 마치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청동 거울을 꺼내 뒤집었다.
역시나!
거울 뒷면에 ‘구천현녀경’이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연적하가 창고에서 발견했다는 바로 그 거울이 분명했다.
부르르 떨던 남궁연은 거울을 들고 나는 듯이 안채로 달려갔다.
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구천현녀경을 바닥에 내려놓고 헝겊으로 열심히 닦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거울 표면에 눌어붙은 때는 지워지지 않았다.
뒤늦게 연지안이 합류해 닦았지만 소용없었다.
해가 질 때까지 두 사람이 닦았지만 때인지 녹인지 모를 그것들은 여전했다.
남궁연이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역시 그냥 청동 거울이 아니야. 그런데 적하는 이걸 어떻게 닦았지?”
“하아! 그러게요. 그냥 닦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눈곱만큼의 진전도 없자 연지안은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남궁연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거울 닦는 게 아니라 마치 생사대적과 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연지안이 말려야 하나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남궁연이 필사적으로 매달렸음에도 청동 거울은 요지부동이었다.
악에 받친 남궁연이 거울을 닦으며 말했다.
“구천현녀님! 여기에 있는 거 알아요! 그게 아니라면 진즉에 녹이 닦여 나갔겠죠! 우리 앞에 나설 면목이 없어서 그러는 건가요? 그러게 왜 그러셨어요? 삼십 년 동안이나 적하를 기다렸다고요! 삼십 년 동안이나! 이제는 뭐라고 말씀하실 때도 됐잖아요!”
서러움에 북받친 남궁연이 헝겊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연지안이 다시 구천현녀경으로 다가갔다.
연지안이 막 거울을 문지를 때다.
“모두 내 잘못이야. 내가 그를 막았어야 했어. 네 외조부와 호천맹 사이에서 너무 마음고생을 하길래, 모르는 척 가라고 보내 줬어. 상계와 하계의 시간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늦게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그쯤은 견딜 수 있다고, 멋대로 생각했지 뭐니.”
“어머니가 만류해도 갔을 거예요. 억지로 붙잡아 두면 아버지는 ‘나 때문에 상계가 멸망했다’고 평생 괴로워하셨을걸요?”
“알아. 그래도 함께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걸 택했어야 해. 내가 뭐라고…….”
남궁연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이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녹과 때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