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2
122회. 고수와 인간 백정
결국 구천노도 심통이 말했다.
“공자님, 정의맹이 같은 식구인 삼장을 포기한 것이나, 저 세 아이들을 딸려 보낸 것은 공자님에게 거는 기대가 있어서일 겁니다. 정파 놈들은 절대로 거저 무언가를 해 주는 법이 없거든요.”
“훗! 우리는 뭐 공짜로 해 주는 게 있어?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한 거야. 너무 색안경 끼고 보지 마.”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여하튼 다른 이들은 공자님이 유명교와의 싸움에 선봉으로 나섰다고 생각할 겁니다. 당장 유명교만 해도 그렇게 생각할 거고요.”
“괜찮아. 탁 형님이 그랬어. 남들 눈 신경 안 쓰는 게 녹림이라고. 나만 아니면 된 거지.”
“그럼 공자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어떻게 해? 앞으로 네 개 산채만 더 정리하면 끝이지. 알잖아?”
“공자님께서 그 일을 잘 해내시면, 녹림이나 정의맹에서 공자님을 놔주지 않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심통은 그게 걱정이었다.
만약 자신이 총재주나 정의맹 맹주라고 해도 그렇게 할 테니까.
“뭘 아직 오지도 않은 일로 고민이야? 골치 아픈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돼.”
“예? 미리 대비를 하셔야…….”
심통은 연적하의 내일로 미루기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아 몰라. 난 잘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정말 연적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반쯤 일어나 있던 심통도 덩달아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이건 꿈이다!’
연적하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손에 죽은 유명교 사람들이 시뻘건 눈으로 달려드는 게 꿈이 아니면 뭔가 말이다.
꿈이란 걸 알았지만, 그들에 맞서 싸워야 했다.
현실에서는 구천세법과 구천구검으로 이겼는데 꿈에서는 쉽지가 않았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한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검에서 한 치 정도 비껴 났다.
공격이 실패할 때마다 그들은 훅 하고 다가와 한목소리로 악을 썼다.
“나에게 왜 그러는 거냐!”
“나는 참월검객 연무룡의 아들이다! 그게 이유다!”
그러면 그들은 슬쩍 뒤로 물러났다가 또다시 와락 다가와 소리쳤다.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나에게 이러는 이유가 뭐냐?”
“나는…….”
연적하는 대답하려 했지만 혀가 뻣뻣하게 굳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연무룡의 아들이야! 유명교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그러니까 더 이상 바보 같은 질문을 하지 마!’
그러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갑자기 네 사람이 시커먼 괴물로 변했다.
괴물들은 손과 입으로 불을 뿜으며 달려왔다.
저럴 때는 구천구검을 쓰면 되는데 하필이면 검이 보이질 않는다.
별수 없이 연적하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봉산과 눈에 익은 객점, 주루, 기루 사이를 미친 듯 달리는 연적하 앞을 괴물들이 막아섰다.
그리고 두 손을 뻗어 연적하를 움켜잡으려 했다.
‘으으으!’
연적하는 그림자들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헉! 헉! 헉!”
연적하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미지근한 땀방울이 머리를 타고 턱으로 흘러내렸다.
심통이 몸을 뒤척이며 잠에 취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님, 왜 안 주무시고…….”
“어, 꿈을 꾸었어. 계속 자.”
“예…….”
연적하는 칠흑처럼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해도, 같은 사람을 죽이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살인의 여파는 악몽이라는 이름으로 예고 없이 찾아왔다.
사실 그는 협이니 대의니 하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래서 정의맹 사람들처럼 유명교를 쳐 죽여야 한다는 사명감이 없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유명교에 대한 원한이 강한 것도 아니다.
부친과의 관계가 남달리 돈독했다면 혹 모르겠다.
부친에 대한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새삼 무슨 은원이란 말인가?
뭔가 있다면, 그래도 가족이라고, 은근히 차오르는 불쾌감 정도가 전부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살인에 대한 정당성이 부족했다.
사마단 이전까지 그가 죽인 유명교도는 어쩌다 얽힌 사람들이었다.
예컨대 매검을 하다가 마주쳤다거나, 그들이 죽이겠다고 찾아와 피치 못하게 싸운 것이다.
살기 위해서 상대를 죽인 일로도 마음이 무거운데, 하물며 사마단은 노리고 찾아가 죽였다. 단지 그가 유명교도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니 ‘유명교와의 전쟁에서 선두를 선 것이다’라는 말에 그가 질색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건 계속해서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어쩌다 녹림 총순찰의 직함을 가지게 됐지만, 그는 아직 마음 여린 스무 살의 애송이에 불과했다.
***
다음 날 아침.
연적하와 심통은 느긋하게 객점 식당으로 내려갔다.
남궁천 남매와 설차수 일행은 언제 왔는지 한참 먹는 중이었다.
별수 없이 연적하와 심통은 빈자리를 찾아 따로 앉아야 했다.
객점 식당의 아침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특히나 같은 지역일 경우에는 더하다. 돼지고기 볶음과 청채들, 밥, 생선탕 등이 주로 나오고 어쩌다 닭이나 오리고기가 첨가될 때가 있다.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도 비슷하다.
점심이나 저녁때와 달리 아침은 좀 조용한 편이다. 대부분 잠에서 막 깬 탓에 기분이 착 가라앉아서 그렇다.
그건 연적하나 심통도 다르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돼지고기 볶음과 밥을 대충 버무려 입안으로 밀어 넣던 심통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공자님, 어제는 잠자리가 좀 불편하셨습니까?”
“아니, 왜?”
“주무시다가 몇 번 깨시는 것 같아서요. 이번에는 또 누가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었습니까? 지난번에는 풍 형제와 탁 형제가 그러더니.”
“심 노인은 지금까지 죽인 사람들 얼굴이 기억나?”
“아니요. 제가 죽을 수도 있었던 싸움의 상대 정도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기적이야. 양심이 있으면 자기가 죽인 사람 정도는 기억해 줘야 되는 거 아냐?”
“제 머리가 나빠서 그렇습니다.”
심통은 면목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다 보니 기억이 뒤죽박죽 돼서 정말 끔찍했던 싸움 외에는 잊혀져 버린 것이다.
뒤늦게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연적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나 많이 죽였어?”
“그런 걸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으니까요.”
“만약 지금까지 죽인 사람들을 꿈 속에서 만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잠시 식사를 멈추고 생각하던 심통이 답했다.
“다시 죽일 겁니다.”
“다시 죽인다고?”
“예,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죽일 겁니다. 어쩌면 그게 제 업보일지도 모르니까요. 끔찍해도 제가 감당해야지요.”
“대단한 건지, 역시 마두다운 건지 모르겠네.”
“흐흐. 하지만 제가 어차피 그럴 각오인 걸 알아서 그런지 한 번도 꿈에서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혹시 공자님은 그런 꿈을 꾸셨습니까?”
심통이 야릇한 눈으로 연적하를 바라보았다.
지난밤의 일을 되짚어 보니 왠지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적하가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어떨 것 같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생긴다면?”
“기가 허해서 그런다 생각하시고 약이라도 한 채 지어 드십쇼.”
“왜 나에게는 죽이라고 하지 않아?”
“그런 독심이 있으시다면 그런 꿈을 꾸지도 않으실 테니까요. 저는 그런 마음 오래도록 변치 않으시길 바랍니다.”
“사실은 내가 비리비리하다고 비웃는 거지?”
“어이쿠! 절대로 아닙니다. 정사파를 막론하고 고수들은 칼 휘두를 일이 자꾸 생깁니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체면 때문에, 의리 때문에, 정 때문에 자꾸 사람을 베더군요. 베어 버린 사람의 수만큼 감정도 무디어지는 게 당연한 겁니다. 사파인들이 유명한 대협일수록 더 무서워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사람을 베거든요. 또 그래야 검 끝이 날카로워지기도 하고요.”
“결국 고수가 되려면 인간 백정이어야 한다는 거네?”
“곁가지를 다 떼어 내면, 그렇습니다.”
“인간 백정은 돼야 마음도 편안해지고?”
“예,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워낙 조용한 아침 식사 자리다 보니 연적하와 심통의 목소리는 제법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그러나 연적하나 심통 모두 다른 사람의 이목은 별로 생각지 않는 사람들인지라 거리낌이 없었다.
남궁천과 남궁연은 웃으며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설차수 일행은 연적하와 심통 모두 뛰어난 고수인지라 그 속에 심오한 뜻이 있으려니 하고 넘겼다.
그러나 손님들 모두가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간 것은 아니다.
구석 자리에서 냉소가 흘러나왔다.
“흥! 정파의 협객들을 인간 백정이라고 하다니. 인간 말종이 따로 없군.”
심통이 뒤쪽으로 힐끔 고개를 돌렸다.
노인 둘과 청년 둘이 마주 앉아 있는데 넷 다 도검을 찬 걸 보니 무림인이다.
저걸 어쩔까 생각하고 있는데 연적하의 음성이 들렸다.
“그래, 그건 심 노인이 잘못한 거야. 사람한테 인간 백정이 뭐야.”
“저 공자님, 인간 백정이라는 말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아, 그랬어? 설마 나에게 인간 말종이라고 한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연적하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음식을 집어 가는데 노인이 다시 말했다.
“자청아, 악인 하나를 죽이면 백성 열 명을 구한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니 싹수가 노란 인간 말종을 만나면 사정 봐줄 것 없이 베어 버려라. 알겠느냐?”
제남 백검문의 원로 백절검 이신웅이 제자 원자청에게 말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청년 원자청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이신웅의 사형인 백화검 소무진이 가볍게 한마디 했다.
“사제. 아침부터 흥분하지 말고 식사나 하시게. 일을 수습하러 가는 사람이 그러면 되나.”
백검문의 원로인 소무진과 이신웅은 제자들과 함께 하협점촌으로 가는 중이었다.
하협점촌은 백검문의 문주인 산동일기 하선동의 고향이기도 하다. 최근 하협점촌이 인근 구선산의 도적들에게 약탈당하자 백검문에서 네 사람을 보낸 것이다.
“사형, 우리가 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저런 자들과 관계된 것 아닙니까? 어쩌면 구선산의 도적들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소무진이 노인과 청년을 슬쩍 살폈다.
자요진에서 하협점촌은 고작 한 시진(2시간) 거리라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인 까닭이다.
소무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눈빛이나 소지한 무기를 보니 구선산의 도적들 같지가 않아서다.
녹림에도 들지 못한 구선산의 도적들이 저렇게 고급스러운 도검을 들고 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그쯤 했으면 하네.”
“언제 도적들이 얼굴에 도적이라고 써 붙이고 다닙니까? 협객을 인간 백정이라고 비하하는 걸 보면 분명 좋은 자들이 아닙니다.”
이신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인간 백정이라는 말에 감정이 상한 상태였다. 그게 꼭 자기를 두고 한 말 같아서다.
그렇지 않아도 산동에서 백절검을 백정검이라 부르는 사파인들이 많았다.
“좋은 자들이 아니라고 해서 상대가 꼭 사파의 마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 점에 있어서는 이신웅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렇게 잠깐 끓어올랐던 분위기가 다시 차분히 가라앉을 즈음이다.
연적하가 불쑥 물었다.
“아니 꼭 인간 백정이 돼야 고수가 될 수 있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어?”
“공자님이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인간 백정이 고수가 되는 게 아니라, 고수 소리를 듣는 자들 치고 인간 백정이 아닌 자가 없다는 소리였습니다.”
계속된 ‘인간 백정’ 소리를 자신에 대한 놀림으로 받아들인 이신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이 무도한 자들을!”
쿠당탕.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평온하던 식당은 한순간 긴장으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