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24
1224회. 훌륭한 판결이오!
피닉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가드와 마차 세 대는 성문을 통과했다.
안드리아 지터는 허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뜨내기 모험가라고 생각했는데 백작이란다.
그것도 변경백이 기사단장까지 보내 모셔 갈 정도로 지체가 높으신 분이다.
남작가의 일원에 불과한 그에게 백작은 감히 바라보기도 어려운 존재였다.
그의 처인 샤인 코울스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남작가 출신인 그녀는 대귀족들의 광포함을 잘 알고 있었다.
대귀족은 한마디로 호랑이다.
호랑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
솔직히 그녀는 싱크레어의 스승이 대귀족이라는 게 좋으면서도 두려웠다.
그것은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기대와 두려움으로 혼란한 부모와 달리 싱크레어 지터는 좋기만 했다.
마스터가 뜨내기인 것보다는 백작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마차의 웨인 스코트 부부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험가의 정체가 밝혀진 뒤로 입을 열지 않았다.
체면 때문에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싱크레어 지터의 행운이 부러워서가 아니다.
백작인 줄 모르고 모험가를 비방한 것이 어떻게 돌아올지 걱정돼서다.
그건 모험가의 비방에 동참한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의 복잡한 심사와 별개로 마차는 기사단의 호위 속에 시원하게 도로를 내달렸다.
***
레그 에번스 후작성.
승객들은 물론 운송 책임자와 다섯 명의 가드까지 연회장으로 안내됐다.
엘리오 일행이 입장하자 후작가의 집사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저 흉포한 마족에게서 대륙을 지키는 스쿠툼(빙벽)의 수호자! 로렌 공국 라티누스와 북부 슬래시 랜드의 적법한 지배자! 검의 적자(嫡子)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 엘리오 라고아 백작님 입장하십니다!”
그의 소개가 끝나자 대기하던 바르도스들이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다.
웅장한 음악이 연회장을 뒤흔들었다.
짧은 연주가 끝나자 연회장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미친 듯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변경백 레그 에번스 후작이 환하게 웃으며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다가갔다.
“라고아 백작, 어서 오시오. 나는 오데사의 영주인 레그 에번스 후작이오. 관문 도시 오데사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그는 지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엘리오 라고아입니다.”
엘리오와 인사를 나눈 레그 에번스 후작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두 분이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이겠구려. 만나서 반갑소.”
“라르바 오마르 백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입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레그 에번스 후작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 일행을 상석으로 이끌고 갔다.
레그 에번스 후작과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나란히 앉고, 그 옆으로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이 자리를 잡았다.
후작가의 하인들이 우두커니 서 있는 승객들을 한쪽에 마련된 자리로 데리고 갔다.
이 특별한 연회를 준비한 레그 에번스 후작이 먼저 운을 뗐다.
“말씀은 많이 들었소. 이제 스쿠툼은 안전하오?”
“예, 균열이 본래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 들었습니다. 차라트(저주가 새겨진 뼛조각)를 제거하니 창조신의 권능이 다시 살아났다 하더군요.”
“아아! 잘됐구려. 듣자 하니 마족 군주들과도 싸웠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대단하구려. 마족 군주가 소드마스터보다 강하다지요?”
레그 에번스 후작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이십 대 중반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랜드 마스터 소리를 듣고 있으니 놀라운 뿐이다.
“많이 강하죠.”
엘리오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마족 군주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고 봐야 한다.
자신도 구천검령이 아니었다면 땅에 묻혔을 것이다.
어느 정도 궁금증을 푼 레그 에번스 후작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참! 공왕 전하로부터 크로우 자작가가 라고아 백작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소리를 들었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제가 여행 중에 어린 제자를 하나 거둬들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두고 크로우 자작가의 귀족이 저를 변태인 것처럼 욕하더군요. 심지어 제자의 부친은 그에게 얻어맞기까지 했습니다.”
“허어! 어찌 그런 일이. 그 미친 자가 이곳에 있습니까?”
“예.”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지 왜 그런 자를 지금까지 살려 두셨소?”
레그 에번스 후작이 황당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귀족이라 해도 대귀족의 눈 밖에 나면 죽는다.
법이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지라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평범한 귀족들이 대귀족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제국에서 크나우프 대공가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왜 그런 죽어 마땅한 자를 살려 두었는지 모르겠다.
“아, 그 정도면 죽여도 되는 겁니까?”
순진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반문에 레그 에번스 후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죽여도 되냐고 했소? 대귀족들은 상대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죽이오. 하물며 욕을 했다면 말할 것도 없지.”
“그렇게 사람을 막 죽이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까?”
“무슨 그런 순진한 말씀을. 법은 저 아랫사람들이 지키라고 있는 것이오. 대귀족들이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데, 누가 대귀족에게 죄를 묻겠소?”
“와. 놀라운 세상이네요.”
엘리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렇게 개판인 세상이 상계(上界)라니?
이 순간만큼은 상계와 하계(下界)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레그 에번스 후작은 자기 말이 좀 심했다고 생각했던지 사족을 달았다.
“물론 너무 과하게 사람들을 죽이면 아무리 대귀족이라도 곤란해질 수 있지만 말이오. 험, 그렇다 해도 대귀족을 모욕한 죄는 중범죄니, 죽어 마땅하오.”
“오늘 많이 배웁니다.”
“그래, 그 죄인들을 어찌하실 생각이오?”
레그 에번스 후작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이곳에 스코트 남작이 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있소. 혹시나 싶어서 크로우 자작가의 사돈인 스코트 남작과 코튼 남작을 잡아 두었소. 혹시 라고아 백작을 모욕했다는 죄인이 웨인 스코트와 이라이자 크로우요?”
레그 에번스 후작의 눈이 반짝였다.
오데사에 크로우 자작가의 사람이 없어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스코트 남작을 잡아 두었는데, 눈치를 보니 제대로 짚은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그 두 부부가 앞장서서 저와 제자를 비방했습니다. 제가 돈을 주고 어린 여자애를 산 변태라나 뭐라나…….”
“허! 그 정도면 교수형이 아니라 화형에 처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게요. 베르트 폰스 백작! 들었나? 당장 중범죄자들을 체포…….”
“잠깐만.”
엘리오가 레그 에번스 후작의 말을 끊었다.
레그 에번스 후작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나서자 베르트 폰스 백작을 뒤로 물렸다.
“제가 원래 자기가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아! 실례했소. 내가 너무 흥분해서 그만 선을 넘고 말았구려. 라고아 백작의 뜻대로 하시오.”
“일단 스코트 남작을 불러 주세요.”
그러자 레그 에번스 후작이 기사단장 베르트 폰스 백작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연회장을 빠져나간 베르트 폰스 백작은 금방 초로의 노인과 돌아왔다.
초로의 노인, 그리언 스코트 남작은 레그 에번스 후작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후작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그리언 스코트 남작의 절규에 연주가 멈췄다.
뒤늦게 자신의 부친을 발견한 웨인 스코트는 황급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레그 에번스 후작이 불쾌한 듯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라고아 백작에게 죄를 짓고, 왜 나에게 살려 달라 하느냐?”
그리언 스코트 남작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머리를 돌렸다.
“라고아 백작님! 살려 주십쇼!”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웨인 스코트가 부친의 옆에 나란히 무릎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웨인 스코트를 내려다보던 엘리오는 승객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얗게 질린 이라이자 크로우를 발견한 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엘리오의 입이 열렸다.
“스코트 남작. 제국에서는 대귀족을 모욕하면 어떤 벌을 받나?”
“죄의 정도에 따라 구금이나 강제 노역, 노예형, 교수형 등에 처합니다.”
“누군가 나를 개변태에 쓰레기 새끼라고 욕했다면, 어떤 벌을 내려야 하지?”
그리언 스코트 남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는 동안 기사단장에게서 대충 들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교수형입니다.”
“좋아, 정직한 사람이군. 남작은 누가 교수형 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나? 자식을 잘못 키운 남작인가? 아니면 나를 욕한 남작의 아들인가?”
한참을 망설이던 그리언 스코트 남작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답했다.
“……성인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잘못 키운 남작에게는 죄가 없고?”
그러자 그리언 스코트 남작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저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만, 다른 자식들은 바르게 자랐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소리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웨인 스코트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부친을 보았다.
엘리오가 이번에는 웨인 스코트에게 물었다.
“웨인 스코트. 너는 이번 일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를 잘못 가르친 남작의 잘못이냐? 아니면 남작은 잘 가르쳤는데 너만 삐뚤어진 거냐?”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아버지입니다.”
그건 사실이다.
지금 웨인 스코트는 자신을 죽이라고 한 부친에게 절망한 상태였다.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엘리오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잘 알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는데 아주 좋은 답을 주었다. 후작님, 두 사람이 서로 상대의 잘못이라 주장하니 둘 다 죄를 지은 게 분명합니다.”
레그 에번스 후작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전 너무 과하게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했는데 아버지와 아들을 죽일 기세라니.
“허면 백작은 저 둘을 교수형에 처하기를 바라오?”
“교수형은 조금 지나친 것 같고, 저 둘을 노예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노예가 된다면 남을 비방하거나 욕하지는 못하겠죠?”
“훌륭한 판결이오! 나는 진심으로 라고아 백작에게 감동했소.”
레그 에번스 후작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자, 연회장에 있던 귀족들이 따라서 박수를 쳤다.
잠시 후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레그 에번스 후작이 기사단장에게 명했다.
“죄인들의 작위와 귀족 신분을 박탈하고, 오데사의 노예로 등재해라.”
“예!”
이윽고 베르트 폰스 백작이 주변의 호위기사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네 명의 기사가 다가와 스코트 남작과 아들의 팔을 단단히 잡고 끌어냈다.
레그 에번스 후작이 바르도스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다시 연주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