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3
123회. 나이 먹은 게 벼슬이야?
버럭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백절검 이신웅은 한순간 멈칫했다.
식당 손님들 반응이 영 시큰둥해서다.
당장 앞자리의 세 남녀는 한번 힐끔 보더니 실실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옆자리의 두 남녀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치 귀머거리 세상에서 홀로 외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당사자인 늙은이와 청년은 더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일인 양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몇몇 손님이 있는데 식당 분위기가 차분해서 그런지 그냥 먹고만 있다.
이신웅은 한순간 자신이 바보처럼 생각됐다.
‘인간 백정’이라는 단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다.
마음 한구석으로 ‘어쩌면 저들은 정말 무사도를 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다시 앉을 수는 없었다. 그건 정말 멍청이가 되고 마는 거니까.
이신웅은 노인과 청년의 자리로 성 큼성큼 걸어갔다.
“듣자 하니 아까부터 계속 협객을 인간 백정이라고 폄하하는데…….”
순간 연적하가 그의 말을 끊었다.
“듣자 하니 아까부터 계속, 노인장과 전혀 관계없는데 왜 그렇게 흥분하세요? 대협이세요? 고수세요?”
“뭐, 뭐라?”
이신웅은 직설적인 청년의 말에 당황했다.
산동에서 백절검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다. 그런데 이놈은 그런 자신을 대협도 아니고, 고수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지만 이신웅은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기 입으로 나 대협이요, 고수요 하고 다닌단 말인가?
어린놈과 말 섞어 봐야 손해라고 생각한 이신웅은 노인으로 상대를 바꾸었다.
“이보시오. 당신은 누구기에 협객을 인간 백정이라고 하는 거요? 칼을 찬 걸 보니 무림인 같은데 그 잘난 별호나 들어 봅시다.”
구천노도 심통이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예의가 없는 늙은이로군. 자기가 누군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 아닌가.”
순간 이신웅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노인의 지적이 딱히 틀린 게 아닌지라 그는 이를 악물고 답했다.
“노부는 백검문의 백절검 이신웅이라 하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오?”
“너는 몰라도 된다.”
“큭! 나를 감히 놀리는 게냐!”
성난 이신웅이 노호를 터뜨렸다.
쩌렁쩌렁한 소리가 식당을 한차례 들었다 놨다.
구석 자리의 손님들 중 몇은 놀란 얼굴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불안한 얼굴을 보니 자리를 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다.
분위기가 격해지자 백화검 소무진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신웅에게 다가갔다.
“사제, 잠시만 참으시게.”
소무진은 이신웅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흥분을 가라앉힌 뒤 노인 쪽으로 돌아섰다.
“노형, 노부는 백검문의 백화검 소무진이오. 굳이 싸우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상대를 이렇게까지 자극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흥! 자극은 그 늙은이가 했지 내가 한 게 아니다. 공자님과 나에게 시비를 걸고도 무사한 걸 행운으로 알아야지. 어디 감히 백정검 따위가.”
사실 심통은 백절검의 별호를 오래 전에 들은 바가 있다. 백절검은 성급 고수라 하남성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진 까닭이다.
‘백절검’은 정파인들이 붙여 준 별호로 ‘그가 사파 고수를 그만큼 죽였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사파인들 사이에서 그는 ‘백정검’으로 불렸다.
백정검이라는 말을 듣자 소무진과 이신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특히나 소무진은 새삼스레 노인과 청년의 도검을 살폈다.
백절검을 백정검으로 부르는 이들은 사파인들밖에 없다. 이신웅의 추측대로 구선산의 도적들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었다.
소무진이 검 손잡이로 손을 뻗어 갈 때다.
보다 못한 설차수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소무진과 이신웅에게 읍을 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노선배님들. 저는 정의맹 정주 지부의 설차수라 합니다.”
소무진은 동작을 멈추고 의아한 눈으로 설차수를 보았다.
여기에서 왜 갑자기 정의맹이 튀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다.
“저의 일행 두 사람도 정의맹 정주 지부에 속해 있지요.”
“아, 그러신가? 만나서 반갑구먼. 우리 백검문도 정의맹의 일원이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저희들은 저 두 분을 모시고 모종의 임무를 수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없던 일로 하심이 어떨는지요?”
“자네들이 정말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내가 어떻게 알고?”
옆에 있던 이신웅이 끼어들었다.
“정의맹이 사파인들과 뭔가를 도모할 리가 없지. 너희들은 누구기에 정의맹을 사칭하느냐!”
“사칭이라니요? 정말 맹주님의 명을 받고…….”
그러나 이신웅은 설차수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흥! 점입가경이라더니 이젠 맹주님까지 입에 올리는구나. 맹주님께서 사파인들과 일을 할 리가 있나! 설혹 그런 일이 있다 한들 너희처럼 애송이들을 앞세울 리가 없다.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이신웅의 계속된 추궁에 설차수는 눈만 끔뻑거렸다.
처음에는 정의맹이 사파와 일을 할 리가 없다더니, 이제는 나이가 어리다고 믿지를 않는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던 연적하가 심통에게 말했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나이 먹은 게 무슨 벼슬이야? 젊다고 믿지를 않네. 심 노인은 저렇게 살지 마. 알았지?”
“흐흐, 예. 본래 능력 없는 것들이 나이를 앞세우는 법이지요.”
두 사람의 비꼬는 대화에 마침내 소무진도 이성을 잃고 말았다.
“뭐라! 능력 없는 것들이라고! 너희가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그가 적의를 드러내자 그의 제자 주윤성과 이신웅의 제자 원자청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때 청운검 남궁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 대협, 이 대협, 고정하시지요.”
또 다른 사람이 끼어들자 소무진은 금방 노기를 가라앉혔다.
가만 보니 수적으로 열세인지라 적과 아군의 구별을 먼저 해야 할 듯 싶어서다.
“그대는 또 누군가?”
소무진은 상대의 나이가 삼십 대로 보여 조금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풍기는 기도마저 예사롭지 않아 자연 조심스러웠다.
“저는 청운검 남궁천이라 합니다.”
청운검 남궁천이라는 말에 소무진과 이신웅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남궁세가는 정파의 명가인지라 여차하면 자신들을 도울 것 같아서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소무진과 이신웅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설 소협 일행은 정의맹 분들이 맞습니다. 그리고 저 세 분이 맹주님께서 특별히 지시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건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실은 저희도 같은 일행입니다.”
소무진은 남궁천을 찬찬히 살폈다.
눈에 가득한 정광과 평범하지 않은 예기를 보니 자신의 아래가 아니다.
‘좋지 않군. 좋지 않아.’
재빨리 눈으로 세어 보니 사파인 둘에 정파인 다섯, 모두 일곱이나 된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애써 마음을 수습했다.
백검문의 적은 저들이 아니라 구선산의 도적이다.
괜히 여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정작 해야 할 일을 못 할 수도 있었다.
“허허. 남궁세가에서 보증하는 일이니 믿겠소이다. 아무쪼록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오.”
소무진은 덕담까지 건네고 돌아섰다.
씩씩거리던 이신웅도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더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네 사람이 자리로 돌아갈 때다.
연적하가 들으라는 듯 한마디 했다.
“아니, 누가 말할 때는 애송이라고 안 믿더니. 천 형님이 남궁세가 사람인 건 어떻게 믿는데? 기준이 없어. 완전 자기 마음대로야.”
“흐흐, 공자님. 그러려니 하십시오. 본래 힘이 없으면 눈치가 늘게 마련입니다.”
소무진은 주먹을 말아 쥐었지만 돌아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씩씩거리는 이신웅의 팔을 잡아끌고 자리로 돌아갔다.
어차피 이 자리만 피하면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사람들이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
다가닥. 다가닥.
관도 위로 네 사람이 말을 달리고 있다.
하협점촌을 돕기 위해 가는 소무진 일행이다.
약간 뒤처져 있던 이신웅이 박차를 가해 선두의 소무진에게로 다가갔다.
그에 맞춰 소무진이 달리던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사형, 아직 마차가 따라오고 있소. 저들의 정체와 속셈을 모르겠소.”
뒤를 힐끔 보는 소무진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요진의 객잔에서부터 줄곧 그들이 탄 사두마차 한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저 가는 방향이 같은 걸 게다.”
소무진은 그러기를 바랐다.
만약 저들이 구선산의 도적들과 관계가 있다면 좋을 게 없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쩌실 생각이오?”
“글쎄…….”
소무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적당히 대응할 만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헛! 사형! 연기요! 갑자기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소! 마을에 변고가 생긴 게 틀림없소!”
이신웅의 말에 소무진이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아무 일 없었는데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적들이 또다시 마을을 약탈하는 모양이다. 서두르자!”
앞서 달려가는 소무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문주에게 들은 것보다 상태가 더 심각한 것 같아서다.
‘하협점촌 근방에 도적들이 들끓으니 가서 정리하라’고 해서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시커먼 연기를 보니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대체로 일반적인 도적들은 저렇게 보란 듯 방화까지 저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형의 뒤를 따라가던 이신웅이 근심 어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 정체불명의 무림인들을 달고 도적 떼에 달려가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하협점촌.
마을 중앙에 오연하게 서 있는 잔혈도부(殘血屠夫) 곡일기 앞으로 적염라 장예가 촌장을 질질 끌고 왔다.
“어이쿠! 살려 주십시오!”
장예가 빙글빙글 웃으며 답했다.
“이 늙은이야, 누가 너를 죽인다고 했느냐? 두목님이 묻는 말에 대답이나 잘하거라.”
“예, 예. 말씀만 하십시오.”
촌장은 손에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는 오십 대 남자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얼마 전 수하들 중에 누군가가 말하더구나. 이곳에서 돌로 된 둥글고 납작한 물건을 보았다고. 여덟 개의 방울 모양이 조각된, 그것이 있느냐?”
촌장이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곡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장예가 마을 주민 하나를 끌고 와 촌장 앞에서 목을 날려 버렸다.
“으헉! 왜, 왜 이러십니까요?”
곡일기가 다시 물었다.
“네 입에서 내가 원하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으면, 그때마다 한 사람씩 죽이겠다. 다시 묻겠다. 팔방에 여덟 개의 방울 모양이 조각된, 둥근 물건이 있느냐?”
“소인은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촌장이 답답한 얼굴로 도적을 올려다보았다.
뭐라도 원하는 건 다 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뭘 원하는지 알아야 줄 게 아닌가 말이다.
“촌장님! 살려 주십쇼! 제발요! 아악!”
그러는 동안 또 한 사람의 목이 잘렸다.
곡일기가 살기등등한 눈으로 촌장을 노려보았다.
“입이 꽤 무거운 놈이로군. 판돈을 올려서 이제부터는 두 명씩으로 해야겠다.”
십여 명의 도적들이 모녀로 보이는 여자 둘을 끌어냈다.
여자가 어린 딸을 끌어안고 바들바들 떨었다.
곡일기가 말했다.
“대답해라. 팔방에 여덟 개의 방울 모양이 조각된 물건은 어디 있느냐?”
“소인은 정말……. 헛!”
말하다 말고 촌장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을 외곽의 토지신묘(土地神廟)에서 그 비슷한 걸 본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