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48
1248회. 세상을 흑과 백으로만 나누면 안 돼
샤스트라 파라크티 사제들은 용병과 엘리오 일행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점원에게 주문을 하면서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각각 이십 대, 삼십 대로 보이는 여자 둘과 중년의 남자 셋이다.
여자들은 아름다웠지만 사제답게 어딘가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고, 중년의 남자들은 각진 얼굴에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용병들은 미모의 여사제들을 연신 힐끔거렸지만 음담패설은 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용병들을 본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말했다.
“미녀 사제들을 보고도 용병들이 조용하네? 사제들을 희롱하면 잡혀가기라도 하냐?”
파비안이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북부에는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신전이 없기에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시 하워드 솔론 남작이 끼어들었다.
“동행한 성기사들의 눈치를 보는 겁니다.”
“성기사?”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사제는 전부 여자입니다. 사제복 입은 남자는 성기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저 셋이 성기사라는 거네?”
“맞습니다.”
“개차반인 용병들이 성기사의 눈치를 본다? 성기사가 그렇게 강한가?”
“마나 프트라스, 샤스트라 파라크티, 유스티아의 성기사들은 강합니다. 소드 익스퍼트 이상의 경지라고 들었습니다.”
“저들이 소드마스터라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성기사들의 마나는 다른 마나 유저들보다 양과 질에서 뛰어납니다. 그래서 같은 소드 익스퍼트라도 성기사가 훨씬 강합니다.”
“아하.”
엘리오는 단번에 그게 어떤 말인지 알았다.
마치 자신의 영기가 야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과 같으리라.
“마나 프트라스의 사제가 마나의 축복을 더 진하게 받은 건 알겠는데, 샤스트라 파라크티와 유스타아의 사제들까지 그렇다니 뜻밖이네.”
그러자 파비안이 슬쩍 끼어들었다.
“샤스트라 파라크티와 유스티아가 마나 프트라스의 딸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 걸 겁니다.”
“뭐? 샤스트라 파라크티와 유스티아가 마나 프트라스의 딸이라고?”
“예.”
“그럼, 마나 프트라스의 남편도 있어?”
“그건 없습니다.”
“남편이 없는데 어떻게 딸을 낳아?”
“창조신이니까요.”
잠시 황당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던 엘리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자신의 상식으로 이세계의 신을 재단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용병들도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성기사들을 두려워한다는 거지?”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신전에 찍히면 죽었다고 보면 됩니다.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성기사들이 죽을 때까지 그를 추적하니까요.”
“용병들이 닥치고 있을 만하네.”
엘리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사제들을 보았다.
처음에 여사제들이 모자를 벗었을 때는 용병들의 음담패설을 걱정했다.
하지만 말을 들어 보니 오히려 반대다.
실제로 용병들은 샤스트라 파라크티 사제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물론 음습한 눈으로 힐금거리는 건 여전했지만 말이다.
때마침 젊은 여사제와 눈이 마주치자 엘리오는 무심코 묵례를 했다.
자신도 샤스트라 파라크티와 관계가 있기에 친근감을 표시한 것이다.
여사제, 시쉬트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우연히 그 장면을 본 하미쉬가 물었다.
“아는 사람이냐?”
“아니요.”
“그런데 왜 알은체를 했느냐?”
“저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해서 받아 준 거예요.”
그 말에 하미쉬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진하게 생긴 이십 대 청년이 일행과 함께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다행히 추파를 던진 건 아닌 것 같다.
“알고 있겠지만 ‘신탁을 받은 자’는 세상일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네, 단지 인사를 받아 준 것뿐이에요.”
“낯선 사람과 말을 섞어서도 안 되고.”
“네, 네. 알아요.”
하미쉬의 말이 계속될 것 같자 시쉬트는 얼른 빈잔에 물을 채워 건넸다.
하미쉬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목이 마르기도 했지만 시쉬트가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다.
그녀는 시쉬트를 믿고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일은 하미쉬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시쉬트에게 인사를 했다는 청년이 그들의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왔던 것이다.
순간 하미쉬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먼발치에서의 인사는 용납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추근거림인 까닭이다.
‘불생의 검’으로 불리는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가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의 앞을 막아섰다.
알메트 하레브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죄를 짓지 마라. 신탁을 수행 중인 사제에게 접근하는 것은 중죄다.”
“아,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사제들과 만난 김에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알메트 하레브가 뭐라 말하기 전에 하워드 솔론 남작이 급히 다가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팔을 슬그머니 잡았다.
“모험가님, ‘신탁을 받은 자’에게 말을 걸면 안 됩니다. 성기사님, 우리 모험가님이 신전 사정에 어두워서 그랬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하워드 솔론 남작이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대신해 성기사에게 머리를 굽혔다.
알메트 하레브가 데리고 가라는 듯 하워드 솔론 남작에게 턱짓을 했다.
“모험가님, 자리로 돌아가시지요. 신탁 수행 중인 사제들은 외부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나 외부 사람 아닌데?”
“모험가님이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신도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신도래?”
“예? 그럼 뭔데요? 혹시 샤스트라 파라크티 신전의 사제 서품이라도 받으셨습니까?”
“나?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사도야.”
순간 앉아 있던 두 명의 성기사들까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합 세 명의 성기사들이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엘리오를 노려보았다.
다른 신전과 달리 샤스트라 파라크티 신전에 없는 게 있으니 그건 바로 사도였다.
사제직은 제사장이 임명하지만, 사도직은 신으로부터 직접 임명받아야 한다.
그러니 누군가 사도라 하는 것은 샤스트라 파라크티에 대한 모독이었다.
성기사들의 선임인 알메트 하레브가 노기 충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샤스트라 파라크티 신전에는 사도가 없다. 감히 ‘신탁을 받은 사제’들 앞에서 사도를 자처하다니! 그것은 신성모독의 중죄다! 너는 누구냐!”
“여긴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밖에 나가서 대화를 좀 했으면 하는데, 어때요?”
청년의 제의에 알메트 하레브는 저도 모르게 사제들을 돌아보았다.
미친 게 아니라면 진짜 뭔가 있다는 뜻인데, 성기사인 자신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문득 시선을 교환한 시쉬트와 하미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알메트 하레브는 깜짝 놀랐다.
저 두 사제는 ‘신탁을 받은 자’로 지금까지 외부인과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제들이 나설 뜻을 보이자 성기사들은 즉시 태도를 바꿨다.
세 명의 성기사는 재빨리 사제들과 함께 태번 밖으로 빠져나갔다.
멍하니 서 있던 하워드 솔론 남작이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물었다.
“모험가님, 진짜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사도십니까?”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방금 사도라고 하셨잖습니까?”
“외부인하고 대화를 안 한다잖아. 그래서 사도라고 한 거야. 사도 정도는 될 것 같아서.”
“저어, 외람된 말씀인데, 큰 실수를 하신 것 같습니다. 사도는 신의 대리인으로, 신이 직접 임명하는 특별한 성직입니다. 성직을 사칭하면 샤스트라 파라크티, 마나 프트라스, 유스티아 신전의 척살 대상이 됩니다. 모험가님이 아무리 뛰어나도 대륙의 성기사들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는 없습니다.”
“누가 사칭이래?”
“방금 모른다고 하셨잖습니까? 외부인과 대화를 안 한다고 해서 둘러댄 거라면서요?”
“그 뒷말은 왜 빼먹어? 사도 정도는 될 것 같다고 했잖아.”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도는, 신탁으로만 임명받는 아주 특별한 성직입니다. 그걸 본인이 잘 모를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직접 임명받았는데 ‘사도 정도는 될 것 같다’니요. 사도면 사도고, 아니면 아닌 겁니다.”
“이봐. 세상을 흑과 백으로만 나누면 안 돼. 애매한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심지어 흑이었다가 백이 되기도 하고, 백이었다가 흑이 되기도 한다고.”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사도의 임명은 ‘예’와 ‘아니오’가 분명합니다.”
“그래? 두고 보자고. 누구 말이 맞는지. 나는 내가 사제들과 웃으면서 돌아온다에 십 골드 걸게. 그쪽은 아니다, 대판 싸우고 혼자 돌아온다에 얼마 걸 거야?”
“지금 상황을 가볍게 보면 안 됩니다. 대륙 삼대신전 성기사들의 적이 되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적이 되면 남은 인생이 피곤해집니다.”
“그러니까 얼마 걸 거냐고?”
거듭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헛소리에 하워드 솔론 남작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백 골드요.”
“분명히 백 골드 걸었다? 파비안, 너도 들었지?”
그러자 파비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솔론 남작이 백 골드 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내기에…….”
“안 돼. 누구 등골을 빼먹으려고.”
“아, 예.”
파비안은 순순히 물러났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샤스트라 파라크티와 특별한 관계라는 걸 알지만, 사도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어 고집부리지 않은 것이다.
“그럼 잠시 후에 보자고.”
그 말을 끝으로 엘리오는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황망한 얼굴로 서 있는 하워드 솔론 남작에게 파비안이 말했다.
“직진밖에 모르는 분이라니까요.”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모험가님이 사도일 가능성도 있습니까?”
“나도 궁금합니다.”
파비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모르겠다.
고온 다습한 남부답게 라헬 안에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숲과 호수가 많았다.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사제와 성기사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들어갔다.
사도를 자처한 청년을 기다리던 알메트 하레브가 하미쉬 사제에게 물었다.
“그가 사도일 가능성이 있습니까?”
“아직 모르겠습니다.”
“…….”
순간 알메트 하레브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아직 모르겠다는 것은 사도 주장이 허튼소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때 청년이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느긋한 얼굴로 나타났다.
알메트 하레브와 두 명의 성기사들이 다시 한번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나는 ‘불생의 검’이라 불리는 샤스트라 파르크티 신전의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요. 내 왼편은 성기사 타메누크, 오른편은 셈이오.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사도를 자처하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엘리오 라고아 백작입니다.”
예상 밖의 이름에 깜짝 놀란 알메트 하레브가 확인하듯 되물었다.
“설마, 로렌 공국 라티누스와 북부 슬래시 랜드의 영주이신……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십니까?”
“맞습니다.”
“백작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까?”
엘리오가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에게 받은 ‘불패의 징표’를 꺼내 알메트 하레브에게 건넸다.
“파가누스 백작에게 받은 ‘불패의 징표’라는 건데, 알아볼 수 있습니까?”
알메트 하레브는 ‘불패의 징표’를 살핀 후 두 손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돌려주었다.
“알아보다마다요. 불패의 징표는 아르테르눔으로 제작된 물건이니까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원 확인이 끝나자 뒤에서 지켜보던 하미쉬와 시쉬트가 앞으로 나섰다.
“신전에서 다섯 번째로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신탁을 받은 하미쉬입니다.”
“여섯 번째로 신탁을 받은 시쉬트예요.”
사제들이 훅 치고 들어오자 엘리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신탁을 수행 중인 사제들은 외부인과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