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71
1271회. 그래서 저주라는 거예요? 독이라는 거예요?
엘리오 일행은 일단 사막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해가 지기까지 아직 시간도 남았고, 하산길에서는 기습의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했음에도 선뜻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타인록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뒤늦게 엘리오는 어비스에 들어온 뒤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 우리가 아직 점심을 안 먹었구나! 뭘 좀 먹고 움직여야겠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파비안이 말했다.
“산 정상이라 물이 없습니다. 요리보다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에너지 볼 같은 거?”
“좋죠. 그런데 에너지 볼이 아직 남았습니까?”
“어.”
말과 함께 엘리오가 마하담(공간 창고)에서 에너지 볼이 든 상자를 꺼냈다.
그걸 본 파비안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니! 언제 그렇게 챙기신 겁니까? 제국에서 많이 까먹었는데……. 한 박스가 남아 있었습니까?”
“아직 많이 남았어.”
“와! 그 정도면 군수품 도둑질 아닙니까?”
“도둑질이 아니라 버리는 거 쓸어 모은 거야. 내가 에너지 볼 챙기기 전까지 다들 안 먹고 버렸다고.”
그건 사실이다.
에너지 볼은 버리는 식재료로 만든 것이라 히르헤라 주둔지의 기사들은 먹기를 꺼려 했다.
엘리오와 파비안이 챙기면서부터 잠깐 유행을 탔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히르헤라 주둔지의 식량 사정이 나쁘지 않아 에너지 볼을 챙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에게 외면당한 에너지 볼은 결국 잔반과 함께 가축 먹이로 보내지곤 했다.
그걸 기회가 되는 대로 챙긴 사람이 엘리오였다.
파비안이 놀릴까 봐 ‘많이 남았다’고 했지만 실은 ‘엄청나게’ 많이 남았다.
여하튼 엘리오가 꺼낸 에너지 볼로 늦은 점심 식사는 해결이 됐다.
에너지 볼을 우물우물 씹던 메르데프가 타인록에게 살짝 물었다.
“타인록 님도 라고아 모험가님이 마법사라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소.”
“아공간을 가지고 계신 걸 보면 고위 마법사이신가 봅니다?”
“아마도 그럴 거요.”
타인록이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힐끔 보았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마검사로 그랜드 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야인’이라니…….
그만 홀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다.
잊혀진 신전에서 합류한 성녀가 그를 대하는 것만 봐도 심상치가 않다.
그는 이 세계의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타인록의 귓가에 메르데프의 음성이 들려왔다.
“짐마차나 짐꾼이 없어도 될 정도로 큰 아공간을 가진 마법사라니……. 다른 용병들에게 말해 줘도 안 믿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조차도 아직 긴가민가하는 판인데.”
타인록은 ‘앞으로 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거요.’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같은 야인인데 너무 비교가 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 엘리오 일행은 산을 내려갔다.
무료한 얼굴로 산길을 걷던 엘리오가 루나 마일러스에게 슬쩍 물었다.
“누님, 쾌락을 얻기 위해 남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환각이나 환청이 생길 정도는 아닐 거야.”
“그렇죠? 역시 어비스의 저주일까요?”
“혹은 네가 말한 것처럼 알려지지 않은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지.”
“누님이 볼 때 어비스와 바깥 세상의 공기가 다른가요? 나는 별 차이를 못 느끼겠던데.”
“그건 네가 영기 수련자라서 그래.”
“예?”
뜻밖의 대답에 엘리오가 루나 마일러스를 힐끔 보았다.
‘대기의 질이 다르냐?’고 물었는데 왜 영기를 거론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루나 마일러스는 웃기만 할 뿐 설명하지 않았다.
엘리오는 자신의 특별함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다.
산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군데군데 금줄이 쳐져 있었다.
금줄을 볼 때마다 엘리오는 파비안에게 ‘약초를 찾았냐?’고 닦달했다.
산을 내려간 엘리오 일행은 숲 언저리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파비안이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다가갔다.
“왜? 가자고?”
“그것보다도요. 주변을 탐색해 보고 움직이는 게 낫겠다 싶어서요.”
“탐색을 하자고? 바로 사막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힘들어서 되겠어?”
“그렇다고 그냥 갈 수는 없잖습니까? 아침에 용병들이 뒤에서 마력총까지 쏴 댔는데. 그놈들이 따라붙었는지 정도는 확인해야죠.”
“기다려 봐.”
엘리오는 파르톤 산으로 영기를 방사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산 중턱에 이르자 영기는 더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단숨에 파르톤 산 전체를 영기로 뒤덮었을 텐데 말이다.
영기를 회수한 엘리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영기를 방출해서 산을 좀 살펴봤는데……. 산 중턱까지는 사람이 없어.”
“그럼 안심이네요. 출발하자고 하겠습니다.”
파비안은 엘리오가 왜 고개를 갸웃했는지 묻는다는 걸 잊고 모험가들에게 돌아갔다.
엘리오가 찜찜한 얼굴을 하고 있자 루나 마일러스가 물었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영기를 방사했는데 산 중턱까지밖에 안 가더라고요. 힘을 더 쓰면 정상까지 보낼 수도 있겠지만, 왠지 내키지 않아서 그냥 회수했어요.”
“그랬구나.”
엘리오는 나름 심각한데 루나 마일러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다.
“저 산이 특별한 걸까요? 아니면 어비스가 그런 걸까요?”
“저 산이 특별했다면 안전지대가 되지도 못했을 거야. 마수와 마물 들이 구경만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비스의 문제라는 거죠?”
“그걸 거야.”
“영기를 쓰는 데 어려운 이유가 뭘까요?”
“그건 네가 파비안과 하려고 했던 내기의 답이기도 해.”
“어비스의 저주요?”
“풋! 그건 치료사들이 하는 소리고.”
“저주가 아니라는 건가요?”
“우리가 살던 세계에 유명한 말이 하나 있지. 약도 과하면 독이 된다고.”
“독이라고요?”
“후후! 독이 아니라 독처럼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거야. 아무리 좋은 거라도 과하면 그렇게 된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니?”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저주라는 거예요? 독이라는 거예요?”
엘리오의 재촉에도 루나 마일러스는 빙글빙글 웃기만 할 뿐 답을 주지 않았다.
“뭐냐니까요?”
“너라면 머지않아 깨닫게 될 거야. 그걸 깨달으면 진짜 신이 될지도 몰라.”
“에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신이 뭐 옆집 개 이름인가?”
“여하튼 스스로 공부해서 알아내도록 해 봐. 내기 너무 좋아하지 말고. 알았지?”
말과 함께 루나 마일러스가 눈을 찡끗해 보였다.
엘리오는 더 이상 답을 조르지 않았다.
루나 마일러스는 자신만큼이나 스스로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인 때문이다.
하지만 눈치로 한 가지는 알아낼 수 있었다.
‘내기 좋아하지 말라고? 어비스의 저주와는 거리가 먼 모양이네. 그럼 도대체 뭐지?’
엘리오 일행은 마침내 사막에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산에서 멀어질 요량으로 빠르게 이동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부드러운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 속도는 거북이처럼 느려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 개의 달까지 머리 위로 떠올랐다.
주위가 대낮처럼 환해지자 파비안이 선두의 메르데프에게 소리쳤다.
“메르데프! 팔콘 용병단도 습격을 피하기 위해 밤에 이동했다면서! 이렇게 환한데 밤이 무슨 소용 있다고! 입이 있다면 말을 해 봐!”
그러자 메르데프도 억센 용병답게 지지 않고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쇼! 달빛이 환하지만 그래도 대낮과는 다릅니다! 가까이서나 잘 보이지, 멀리서는 대낮처럼 그렇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말 믿어도 돼?”
“믿으십쇼!”
“믿는다! 젠장, 모래는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뻘 밭을 가는 것 같네.”
파비안이 쉬지 않고 투덜거리자 보다 못한 엘리오가 한마디 했다.
“파비안! 징징거리지 마라! 그래도 북부의 눈밭을 가는 것보다는 낫잖아!”
“눈밭이 더 낫습니다. 발가락 사이에 모래가 끼어서 미칠 것 같습니다.”
“모래는 미칠 것 같지? 너 히르헤라에서는 발가락이 얼어서 죽을 것 같다고 했었다. 죽을 것 같은 거보다는 미칠 것 같은 게 나은 거야. 그러니까 닥쳐!”
그제야 파비안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눈밭보다는 모래 위를 걷는 게 백번 나았기 때문이다.
어비스 사막의 모래는 기이하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목까지 푹푹 들어갔다.
뻘 밭을 가는 것 같다던 파비안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체력의 소모가 극심해 엘리오 일행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났을까?
엘리오 일행이 어비스 사막에 익숙해질 즈음,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펑! 펑! 퍼엉―!
고요한 사막에 느닷없이 마력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대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오자 엘리오 일행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쐑! 쐐액―!
엘리오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딘지 귀에 익은 마력총 소리는 어비스 입구의 습격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앞쪽에서 파비안의 외침이 들려왔다.
“라고아 경! 마력총 소리를 들으니 아침의 그놈들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사람을 죽이려고 했으니 목숨으로 죄를 씻어야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엘리오가 뒤쪽으로 돌아섰다.
“오마르 경! 적이 더 있을지 모르니 이곳에 남아 사람들을 지키세요! 내가 가서……. 윽!”
답답한 신음과 함께 엘리오가 뒷걸음질 쳤다.
마력탄에 가슴이 적중당한 것이다.
“이런 개 같은…….”
한바탕 욕을 하려던 엘리오가 멈칫했다.
아침에는 충격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화끈한 느낌이 들어서다.
저도 모르게 가슴을 더듬던 엘리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물에 젖기라도 한 것처럼 앞가슴이 축축하다?
황급히 손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니 피냄새가 훅 하고 밀려왔다.
문득 킬리언 헤일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오십 년 전 제국전쟁 당시 마탑에서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파괴적인 무기를 구상한 적이 있네. 엑시티움이라고 남부 왕국의 소드마스터를 죽이기 위해 개발된 끔찍한 마력탄이지.
이것 역시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과의 결투 중에 맞았던 그 마력탄이 분명했다.
“엑시티움?”
그때 다시 한번 어깨와 배에 큰 충격이 전해졌다.
그러나 엘리오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에 찬 눈으로 자신이 지나온 사막의 모래 언덕을 노려보았다.
“마탑에서 만든 무기라 이거지?”
소드마스터를 죽이기 위해 마탑에서 만든 무기를 평범한 강도들이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이 개새끼들이! 죽을라고!”
분노한 엘리오는 호신강기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린 뒤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사람의 뜻대로 되던가.
돌연 좌우편 모래 언덕에서 십여 발의 마력총 소리가 들려왔다.
퍼퍼펑―! 퍼퍼퍼퍼퍼퍼펑―!
‘퍽퍽!’ 소리와 엘리오 주변의 모래가 하늘로 튀었다.
많은 수의 마력탄이 빗나갔지만 엘리오의 몸을 직격한 마력탄도 적지 않았다.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 비틀거리던 엘리오가 롱소드를 하늘로 치켜세웠다.
천백억이나 되는 ‘검의 화신(化身)’이 어비스의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천산검영(千山劍影)이다.
엘리오가 롱소드를 아래로 긋자 별처럼 박혀 있던 ‘검의 화신’들이 떨어져 내렸다.
둥그렇게 솟아 있던 주변의 모래 언덕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 평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