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79
1279회. 라고아 백작님에게 배울 수 있을까 싶어서요
잠자리 준비가 끝날 즈음, 타인록이 하워드 솔론 남작에게 말을 걸었다.
“솔론 남작. 당신은 왜 라고아 백작의 곁에 있는 거요?”
하워드 솔론 남작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야 백작님에게 빚이 있어서잖습니까.”
“빚이라……. 라고아 백작이나 남작이나 돈 얘기는 하지 않는 것 같던데.”
“기사가 돼서 빚을 졌으면 갚아야지요.”
“아직도 기사 타령이오? 이제는 용병이 됐다고 생각하는데.”
어딘지 가시가 돋친 그의 말에 하워드 솔론 남작은 멈칫했다.
가문에서 축출되었으니 정상적으로 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는 새 주인을 찾아 섬기든, 용병으로 떠돌아다녀야 할 터였다.
새 주인을 찾아 섬긴다는 건 꿈과 같은 이야기다.
고위 귀족의 주변에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넘쳐날 테니 말이다.
“용병이라고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달아날 수도 있지 않소.”
“얼마 가지 않아 잡힐 겁니다. 백작님의 경지를 아시지 않습니까.”
“달아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오?”
“…….”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하워드 솔론 남작은 이를 악물었다.
맞다.
달아날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다.
자신이 라고아 백작의 옆에 있는 건 단지 빚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는 타인록 님은 왜 떠나지 않으십니까? 어비스가 목적지 아니었습니까?”
타인록이 듣지 못한 척 딴청을 하자 하워드 솔론 남작도 더는 묻지 않았다.
간이 침상과 탁자, 의자까지 들여놓은 뒤에 세 사람은 잠시 숨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메르데프가 말했다.
“라고아 백작님의 아공간 창고는 눈으로 봐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마법 경지는 얼마나 높은 걸까요?”
하워드 솔론 남작과 타인록은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이어 세 사람은 두 개의 천막을 더 쳤다.
하워드 솔론 남작 일행과 메르데프, 그리고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 성기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날 밤.
불침번을 서고 있던 파비안은 인기척에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하워드 솔론 남작이 쭈뼛쭈뼛 다가오고 있었다.
“잠이 안 옵니까?”
그렇지 않아도 무료하던 파비안이 먼저 말을 건넸다.
하워드 솔론 남작이 멋쩍은 얼굴로 답했다.
“그러네요.”
이윽고 그는 파비안의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가 진 에브리마 평원은 쌀쌀해서 모닥불이라도 피워야 불침번을 설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에 모닥불이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불길이 조금 가라앉자 하워드 솔론 남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던졌다.
모닥불을 멍하니 보던 파비안이 문득 물었다.
“세 분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귀족과 야인과 용병의 조합이 흔한 게 아니라서.”
“아! 타인록 님은 제 호위 기사였고, 크레아는 태번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마음이 맞아 동행하게 된 겁니다.”
“크레아 씨가 매력이 있죠.”
파비안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하워드 솔론 남작을 보았다.
하워드 솔론 남작이 가문에서 축출당한 뒤 호위 기사였던 타인록은 거리를 두고 있지만 크레아는 여전히 그의 곁에 남았다.
바보가 아니라면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죠.”
“두 사람 잘 어울립니다.”
파비안이 빙글빙글 웃었다.
처음에만 해도 자유분방한 귀족과 그를 따르는 아가씨 정도로 여겼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워드 솔론 남작과 크레아라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을 터였다.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하워드 솔론 남작이 씁쓰름한 얼굴로 부인했다.
크레아와 함께 다니고 있지만 남녀 간의 애틋함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파비안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가문으로 돌아갈 계획입니까?”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의 친분을 내세우면 솔론 후작가도 그를 어쩌지 못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솔론 후작가를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아니요. 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과 다시 잘해 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느니 이참에 독립을 하는 게 맞겠지요.”
“아하.”
파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하워드 솔론 남작 정도 되는 마검사면 굳이 가문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클라우드 남작님은요? 라고아 백작님과 어떻게…….”
“만났느냐고요?”
“예.”
“히르헤라에 주둔해 있던 부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라고아 백작님이 제가 모시던 중대장님이셨습니다. 처음에는 기수로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부관처럼 모시게 됐지요. 그러다 함께 제대를 하고, 그분의 가신이 됐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하워드 솔론 남작이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내친 김에 파비안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의 만남도 들려주었다.
“……그러다 어비스까지 함께 오게 된 겁니다.”
“그럼 오마르 백작님도 라고아 백작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겁니까?”
“저처럼 대놓고는 아니지만 조금씩요.”
“그…… 저…….”
“왜요?”
머뭇거리던 하워드 솔론 남작이 힘겹게 입을 뗐다.
“저도 라고아 백작님에게 배울 수 있을까 싶어서요.”
“흐음.”
파비안은 답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답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까닭이다.
“역시, 안 되겠지요?”
하워드 솔론 남작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라고아 백작에게 빚이나 잔뜩 지고 있는 주제에 가르침을 청하다니!
누가 알면 비웃을 일이었다.
무엇보다 라고아 백작과 같은 경지에 오른 이는 아무나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오마르 백작과 클라우드 남작은 축복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쎄요. 제가 라고아 백작님이 아니라서 된다 안 된다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그 말에 약간의 희망을 얻은 하워드 솔론 남작이 미련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클라우드 남작님 보기에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진짜요?”
하워드 솔론 남작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가르침 받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애초에 우리에게는 솔론 남작님 일행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라고아 백작님은 솔론 남작님 일행을 동행으로 받아 주었지요. 제 느낌이지만 솔론 남작님과 타인록 씨가 라고아 백작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저와 타인록 님이요?”
“라고아 백작님은 야인 출신의 마검사입니다. 그것만 해도 특별한 인연이 아닙니까?”
“아,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그래서 받아 주신 걸까요?”
“아무튼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뭐, 말씀드려 보면 알겠죠.”
“제가 라고아 백작님께 감히 그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워드 솔론 남작이 풀 죽은 얼굴로 모닥불을 들쑤셨다.
내기 빚만 아니었어도 미친 척하고 들이밀어 보겠는데 영 자신이 없었다.
“될 겁니다. 귀족들 중에 라고아 백작님에게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둘입니다. 나와 솔론 남작님밖에 없습니다.”
“아…….”
하워드 솔론 남작의 입에 헤 벌어졌다.
자신도 라고아 백작에게 그만큼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났다.
“기회를 봐서 라고아 백작님에게 슬쩍 말씀드려 보십쇼.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예, 그래야겠습니다.”
하워드 솔론 남작이 결의를 다질 때 파비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다음 불침번이 솔론 남작님이죠? 수고하십쇼. 먼저 들어갑니다.”
“아…….”
하워드 솔론 남작은 미련 없이 떠나가는 파비안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시간 때우기에 이용당한 느낌이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 대한 이야기를 믿어도 되나 모르겠다.
다음 날.
엘리오 일행은 일찌감치 일어나 출발 준비를 했다.
하워드 솔론 남작과 타인록, 메르데프는 부지런히 천막을 걷었다.
잠시 후 짐마차 한 대분의 천막과 간이 침상, 탁자, 의자 따위가 가지런히 정렬됐다.
엘리오가 쌓인 짐을 마하담(공간 창고)에 집어넣자, 타인록과 메르데프는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선두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따르던 파비안이 하워드 솔론 남작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타인록 씨도 보기와 달리 의리가 있네요.”
무슨 소린가 싶어 쳐다보는 하워드 솔론 남작에게 파비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솔론 남작님은 내기 빚이 있고, 메르데프는 지은 죄가 있어서 잡일을 맡고 있지만……. 타인록 씨는 그러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그런데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아…….”
고개를 끄덕이던 하워드 솔론 남작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앞서가는 타인록을 보았다.
그런 건 생각하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타인록은 겉으로 매몰차게 행동하지만 항상 자신을 돕고 있었다.
천막을 치고 걷는 일만 해도 그렇다.
그건 자신과 메르데프의 일이었지만 어느새 타인록도 함께하고 있다.
그와 결별한 뒤로 크레아에게 정성을 쏟고 있는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하아! 이기적인 놈.’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멀리서 한 무리의 용병들이 허공에 마력총을 쏴 대고 있었다.
펑! 펑! 퍼엉―!
태풍급 바람에 육지 깊숙이 쓸려 갔던 하늘고래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던 교수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늘고래, 얌전히 떠다닌다고 만만하게 생각하지 마라. 중대급 정규군이 아니면 감당하지 못한다. 헤비 워터, 그거 별거 아닌 것 같지? 지랄맞은 다른 마물들과 비교하면 약해 보이지만, 그건 오산이야. 높이를 생각해야지. 200미터, 300미터 높이에서 헤비 워터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물에 휩쓸려 굴러다니다 팔다리가 부러지면 다행이지. 물에 직격당해 목이 부러지고, 허리가 부러질 수도 있어. 괜히 상급 마물로 분류해 놓은 게 아니야. 사람들이 주제를 알아야지. 욕심에 눈이 멀면 안 된다. 알겠나!
저 멀리 보이는 용병단의 숫자는 많았지만 마력총은 그렇지 않았다.
마력총을 쏘는 사람이 다섯.
한 개 중대에 총병이 열두 명쯤 있으니 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다.
멀리서 용병단과 하늘고래의 싸움이 시작되자 선두가 멈춰 섰다.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
“못 잡을 겁니다.”
“마력총을 저렇게 쏴 대는데?”
“턱도 없습니다. 하늘고래 덩치를 보십쇼. 이쑤시개에 찔린 정도일 겁니다.”
“와아! 고래가 거꾸로 섰다. 저렇게 해도 안 떨어지네? 미쳤다 정말.”
“헤비 워터를 쓸 모양입니다.”
파비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고래의 입에서 파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폭포수보다 더한 물벼락이 용병들 머리 위에 떨어졌다.
그것으로 싸움은 끝났다.
용병들이 개미 떼처럼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물은 홍수가 난 것처럼 평원 위를 쓸고 가다가 수십 개의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물에서 빠져나온 용병들이 부상당한 용병들을 한곳에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하늘고래는 유유히 바다 쪽으로 구름처럼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