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89
1289회. 누님이 있는 곳이 고향이고, 집이에요
파비안이 사지타 바이퍼에 물린 뒤 엘리오 일행은 가급적 산길을 택해 이동했다.
뱀에 물린 뒤로 파비안이 풀숲이라면 치를 떨어서다.
그의 호들갑으로 엘리오 일행은 덩달아 뱀 공포증에 걸릴 정도였다.
다행히 파르톤 산은 약초꾼들에 의해 산길이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었다.
선두에 선 타인록이 야인 출신이라 무턱대고 풀숲으로 들어갔지 메르데프였다면 어떻게든 산길로만 다녔을 터였다.
뒤늦게 엘리오 일행은 산길로만 다녀도 산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위험천만한 풀숲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덕분에 사지타 바이퍼의 공포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사지타 바이퍼에 물린 파비안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했다.
파비안은 갑자기 ‘마물이다!’ 소리치며 뛰어가거나, 멀쩡하게 잘 쉬다 말고 ‘악! 그루브다! 피해! 잘라! 찍으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그럴 때마다 엘리오가 격공타혈로 날뛰는 파비안을 잠재웠다.
꼬박 하루 동안 파르톤 산을 뒤졌지만 신전이나 신상과 관계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게 아닌지라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파르톤 산과 페트라 산은 미개척지로 넘어가기 전 ―왠지 그냥 떠나기 아쉬워서― 들러 보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엘리오 일행은 파르톤 산 밑에서 야영을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 둘 모닥불가에 모여들었다.
무료한 얼굴로 앉아 있던 하워드 솔론 남작이 문득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형님, 낮에 그루브라고 소리 지르던데……. 그루브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며칠 전 파비안이 하워드 솔론 남작과 크레아에게 형제자매처럼 지내자고 제안한 뒤로 하워드 솔론 남작은 그를 형이라 불렀다.
“내가?”
환각과 환청 상태에서의 기억이 전혀 없는 파비안이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그루브라고 했어?”
그러자 크레아가 끼어들었다.
“그루브다 하시더니 피해! 잘라! 찍어!라고 소리쳤어요.”
“돌겠네.”
파비안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글라체스 요새의 전투를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사람들의 이목이 파비안에게 쏠렸다.
저 능글맞은 파비안이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파비안의 입은 선뜻 열리지 않았다.
글라체스 요새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기억인 까닭이다.
그런 그를 대신해 엘리오가 말했다.
“북부의 글라체스 요새에서 마족 군단과 전쟁을 벌인 적이 있어요. 그루브는 그때 동원된 마물들 중에 하나예요. 입에서 뻗어 나온 촉수에 가시가 촘촘하게 박혀 있어 보기만 해도 끔찍한 놈이죠. 휴식을 취하다가 놈의 먹이가 된 사람도 많았어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모양이네요.”
한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북부 왕국의 군대가 마족을 물리쳤다는 것만 알았지 과정은 몰랐다.
그런데 파비안을 보니 상상 이상으로 치열했던 것 같다.
파비안을 응시하던 하워드 솔론 남작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존경합니다. 형님.”
그러자 파비안이 뻘쭘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존경은 무슨. 나는 말단 기수에 불과했는데.”
“아닙니다. 북부 왕국군의 희생 덕분에 대륙의 평화가 지켜진 겁니다. 제국과 남부 왕국들이 왜 그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워드 솔론 남작의 말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륙이 북부 왕국과 마족 군단의 전쟁에 대해 쉬쉬했기 때문이다.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가 입을 열었다.
“그건 북부 왕국들의 희생으로 지켜진 평화를 제국과 남부 왕국이 깨트렸기 때문일 게요. 지금의 풍파가 가라앉으면 북부 왕국들의 노력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될 것이오.”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요. 마족 군단을 물리친 북부 기사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하워드 솔론 남작과 크레아의 말을 듣고 있던 파비안이 말했다.
“대우는 받았어. 그 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으니까.”
“오라버니, 제 말은 제국과 남부 왕국들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리였어요.”
“아, 감사는 굳이 하지 않아도 돼. 영지나 돈을 준다면 모를까.”
파비안이 속물 근성을 당당하게 드러내자 크레아는 더 말하지 않았다.
엘리오가 루나 마일러스에게 속삭였다.
“누님, 파비안을 보면 누가 떠오르지 않아요?”
“심 노인?”
“그렇죠? 누님도 파비안과 심 노인이 닮았다고 생각하죠?”
“그러네. 저 하워드는 우리 오라버니를 닮았고.”
“크레아 씨는 진 소저(진설하)를 닮은 것 같지 않아요?”
두 사람은 일행 중에서 강호의 지인과 비슷한 사람을 하나씩 열거했다.
그러기를 한참 만에 엘리오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완전히 다른 세상인데 살아가는 모습은 왜 이렇게 닮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루나 마일러스도 엘리오의 말에 완전히 공감했다.
아득한 상계와 하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처럼 닮았다니.
이쯤 되니 도대체 상계와 하계가 왜 나누어졌는지 모르겠다.
기, 영기, 마나처럼 만물의 근원만 다를 뿐 나머지는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람이 득도를 해서 상계로 올라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엘리오의 물음에 루나 마일러스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왕들의 하늘’이나 ‘네 번째 하늘’을 보면 확실히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만에 그녀가 답했다.
“우리가 상계를 다 아는 게 아니잖아. 상계를 나누어 놓은 어떤 이유가 있을 거야.”
“거름망 같은 거로 조금씩 걸러 내서 위로 올려 보내는 걸까요?”
기상천외한 그의 말에 루나 마일러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상계로 올라갈수록 약자가 살아남기 어려워지니까. 만물의 근원도 달라지고.”
“영기와 마나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 그 둘은 우리가 살던 강호의 기보다 월등하게 뛰어나잖아.”
“그렇기는 해요. 이곳에서 영기가 맥을 못 쓰는 걸 보면. 야인들만 수련한다고 하니 말 다했죠.”
루나 마일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로 돌아가자마자 자신의 영기는 세상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봉인당했다.
하지만 네 번째 하늘에서는 그 대단한 영기가 천대받고 있다.
네 번째 하늘보다 더 뛰어난 곳은 또 다른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까?
더 깊게 고민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애써 생각을 멈추었다.
초월적인 지혜는 여신과의 합일을 앞당길 뿐이니까.
엘리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더 묻지 않았다.
“누님.”
“응?”
“나한테는 누님이 있는 곳이 고향이고, 집이에요.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내 옆에 오래 있어 줘요.”
솔직히 엘리오는 그녀만 곁에 있다면 지금의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샤스 운드라를 찾지 못한다 해도 그녀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래.”
루나 마일러스는 강호에 두고 온 딸에게 미안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
파르톤 산 정상.
깊은 밤.
헬독, 바이퍼, 슬라터 용병단 단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듯 합법적인 일과는 거리가 먼 용병단들이다.
용병단장들의 얼굴도 용병단의 이름만큼이나 거칠게 생겼다.
헬독 용병단장이 다른 두 용병단장들을 보며 말했다.
“추격조가 돌아왔소. 놈들은 산 아래에서 숙영 중이오. 내일 아침에 파르톤 산을 떠날 것으로 보이오. 툼스톤에서 미개척지에 대해 묻고 다녔다고 하니 파르톤 산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거요. 어느 방면으로 튈지 모르니 파르톤 산에서 끝을 봅시다.”
하지만 바이퍼와 슬라터 용병단장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답답해진 헬독 용병단장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있소. 시간을 끌다가는 도리어 우리가 당할 수도 있소.”
흑마법사 찰스 맨슨은 교활하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경지를 소드마스터로 속였다.
괜히 그랜드 마스터라고 했다가 용병들이 지레 겁먹고 의뢰를 받지 않을까 봐 그런 것이다.
무덤덤한 얼굴로 듣던 바이퍼 용병단장이 입을 열었다.
“어비스에서는 탐색 마법의 거리에도 제한이 있소. 마검사가 설사 그랜드 마스터라도 거리를 넉넉히 두면 알아차리지 못할 거요. 우리가 어비스에 들어온 지 이제 사흘이오. 삼십 골드로는 계산이 맞지 않소.”
그러자 헬독 용병단장이 반박했다.
“되돌아가는 날까지 치면 사십에서 오십 골드까지 받을 수 있소.”
“뜻을 더 크게 품읍시다. 이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닌데, 푼돈이나 받고 끝낼 거요?”
“대체 목표 금액이 얼마요?”
“적어도 백 골드 이상은 받아야 하지 않겠소? 슬라터 용병단장은 어떻소?”
슬라터 용병단장의 생각도 바이퍼 용병단장과 다르지 않았다.
“그 정도는 받아야지.”
슬라터 용병단장이 은근슬쩍 말을 놓았지만 바이퍼 용병단장은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반말이 입에 밴 사람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두 용병단장의 말에 헬독 용병단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미개척지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하기 어렵소. 그런데도 시간을 질질 끌자는 말이오?”
바이퍼 용병단장이 바로 답했다.
“누가 미개척지까지 따라 들어가자고 했소? 이곳에서 가까운 미개척지로 가는 데만도 이틀은 소요될 거요. 하루 이틀만 더 두고 보자 이 말이오.”
슬라터 용병단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파르톤 산에서 한차례 암습에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나. 저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파르톤 산에서는 경계를 할 거라 이 말이야. 상대의 경계심이 풀려 있을 때를 노려야지.”
나름 일리 있는 슬라터 용병단장의 지적에 헬독 용병단장은 반박하지 못했다.
한차례 암습이 실패한 곳에서 또 암습을 하는 것도 맞지 않았다.
“알겠소. 다른 장소를 노리자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오. 하지만 미개척지까지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맙시다. 우리 헬독 용병단은 미개척지까지는 따라가지 않을 거요.”
“우리 바이퍼 용병단도 미개척지까지 따라갈 생각은 없소.”
“거기는 가래도 안 가. 돈 벌러 왔지 죽으려고 온 게 아니잖아.”
슬라터 용병단장의 반말이 귀에 거슬렸는지 헬독 용병단장이 한마디 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자꾸 반말이오?”
“누구? 나?”
“그래, 당신. 우리가 언제 봤다고 반말을 툭툭 하는 거요?”
“혼잣말도 못하나?”
“지금까지 혼잣말을 한 거요?”
“당연하지.”
“지금 내 말에 계속 반말로 대답하고 있지 않소!”
헬독 용병단장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바이퍼 용병단장이 나섰다.
“소리를 낮추시오. 우리가 여기 있다고 광고라도 할 셈이오? 그리고 슬라터 용병단장도 아무에게나 반말 찍찍 하는 버릇은 좀 고칩시다.”
“혼잣말이라니까.”
“거참.”
“아, 씨발!”
계속된 반말에 ‘울컥!’한 헬독 용병단장과 바이퍼 용병단장이 슬라터 용병단장을 쏘아보았다.
그래도 슬라터 용병단장은 꿋꿋하게 두 사람을 마주 보았다.
끝내 태도에 변화가 없자 헬독 용병단장과 바이퍼 용병단장은 고개를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칼부림을 하고 싶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여기서 소란을 피웠다가는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결국 헬독 용병단장과 바이퍼 용병단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불법적인 일을 도맡아 하는 용병단치고 정상적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슬라터 용병단장은 진짜 병신 중에 상병신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