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9
129회. 지금 상방은
모닥불 주위로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노숙인지라 이번에는 늘 따로 행동하던 마부 이사까지 함께였다.
타닥. 타닥.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도 잠깐, 이내 마른나무 타들어 가는 소리만 들렸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던 진설하가 말을 걸었다.
“연 소협, 강호를 돌아다니는 게 생각보다 힘들죠?”
“그렇네요. 진 소저는 괜찮아요?”
“히잉! 저는 하루 종일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에요.”
진설하가 어린애처럼 앓는 소리를 했다.
“내일부터는 쉬는 시간을 조금 늘리도록 할까요? 어차피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닌데.”
“정말요? 저는 그렇게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나무를 주우러 다니는 게 몸을 써서 그런지 좋더라고요. 연 소협도 쉴 때마다 좀 움직여 보세요.”
“그런 거라면 저도 마부 아저씨를 도와서 몸을 쓰고 있는데요?”
말을 하면서 연적하는 이사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만 그랬지 실제로는 그의 주위를 얼쩡거리기만 해서다.
“어머, 그러셨구나. 쉬엄쉬엄하세요. 그런 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손을 녹이고 있던 이사가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혼자 일을 다 하고 저런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왠지 억울했다.
“어우! 춥다.”
이사는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비벼 댔다.
그게 마부인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정 표현이었다.
연적하는 괜히 머리를 긁적였고 심통은 듣지 못한 척 딴청을 했다.
잠시 후 설차수가 마차에 실려 있던 건량들을 가지고 왔다.
딱히 할 일이 없던 사람들은 하나 둘 건량을 손에 쥐고 물어뜯었다.
겨울의 건량은 이가 아플 정도로 딱딱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한참 우물거리던 이사가 벌떡 일어나 마차에서 무쇠솥을 꺼내 왔다.
“헤헤, 물을 좀 끓일까 해서요.”
사람들이 빤히 보자 이사는 헤픈 웃음을 지으며 변명처럼 말했다.
다들 그래 주었으면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검 남궁천이 한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 아래로 조금 내려가면 개울이 있습니다.”
“예, 예.”
이사는 솥을 들고 남궁천이 가리킨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그동안 설차수와 유근식은 솥단지를 걸 수 있게 모닥불 주위를 손보았다.
이사는 일각(15분)쯤 지나 돌아왔다.
그는 물 담긴 솥단지를 모닥불 위에 걸치고 쌀을 적당량 집어넣었다.
김이 오르고 보글보글 죽 끓는 소리가 나자 사람들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사는 쌀죽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지 마차에서 이것저것 가져와 넣었다.
그럴수록 더욱 오묘한 냄새가 났다.
모두의 시선에 솥단지에 고정되어 있을 때다.
멀리서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의아해하는 얼굴인데 구천노도 심통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그 모습을 본 연적하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심 노인, 지금 솥이 눈에 들어와? 저 소리를 듣고도?”
“흐흐. 유명교 놈들이라면 은밀하게 움직였을 겁니다. 보나 마나 시정잡배들이 뛰어다니고 있을 텐데 뭘 그렇게 신경 쓰십니까?”
“그, 그런가…….”
연적하는 계면쩍은 얼굴로 나뭇가지를 발로 톡톡 밀어 모닥불에 넣었다.
탁탁 튄 불씨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심통의 말에 남궁천이 탄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 노선배의 말이 맞다. 고수들은 저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불빛을 보고 뛰어오는 걸 게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두 남자가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런데 누구와 싸우다가 왔는지 두 사람의 행색이 처참했다.
상체를 피로 물들인 삼십 대 남자, 건원이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연적하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는 솥단지와 마차를 보고서야 조금 안심한 얼굴로 물었다.
“하아, 하아! 잠시 쉬었다가 가도 되겠습니까?”
설차수는 저도 모르게 심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심통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거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설차수가 일행을 대신해 답했다.
“그러십쇼. 그런데 두 분은 뭐 하는 분들이십니까?”
삼십 대 남자가 윗사람인 듯 나섰다.
“저희는 추성에 있는 복성상방의 사람들입니다. 저는 통천대의 대주인 건원이라 합니다. 동행인은 제 수하인 조정이고요.”
“조정입니다.”
이십 대 후반의 남자가 읍을 해 보였다.
간단히 소개를 마친 건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건 모가 협객님들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설차수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건원을 바라보았다.
협객님들이라고 하는 걸 보니 죄다 정파 무사인 줄로 생각한 모양이다.
별수 없이 설차수는 자신의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정주 천도문의 설차수입니다. 저쪽은 금검문의 유근식, 그리고 창인문의 진설하.”
그는 다른 사람들은 그냥 생략했다.
허락도 없이 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어서다.
건원과 조정은 세 사람의 소개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더 묻지 않았다.
그때 이사가 쌀죽을 떠서 연적하에게 공손히 바쳤다.
곧이어 심통, 남궁천, 남궁연의 순이었다.
수고한 이사를 생각해 설차수 일행은 그들의 죽을 직접 퍼 담았다.
피 칠갑을 한 두 사람이 불쌍해 보였는지 이사가 다가와 슬쩍 말했다.
“나리님들, 많이 남았으니 드시고 싶으면 드셔도 됩니다.”
“아, 예. 감사히 먹겠습니다.”
건원과 조정은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사양하지 않고 죽을 퍼 왔다.
죽이 식기를 기다리는 동안 설차수가 물었다.
“그런데 상행 중에 도적이라도 만난 겁니까? 이 근방에 도적들이 있었나요?”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건원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그러자 멀리 떨어져 있던 심통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건원을 쏘아보았다.
‘헉!’
그제야 건원은 무조건 성실하게 답해야 하는 자리임을 깨달았다.
“실은 제녕에 있는 만리상방과 상권 문제로 한 달째 싸우고 있습니다.”
“허! 한 달이나 싸우고 있다고요?”
설차수는 건원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림 방파도 아닌 같은 상방끼리 왜 그렇게 오래 싸운단 말인가?
은원이 아니라 상권 문제라니 더 그랬다.
“예. 이전에는 정의맹에서 중재해 줘서 상방 간에 큰 싸움이 없었습니다.”
“아!”
정의맹의 일원인 설차수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 모든 건 사실 낙양의 백세상방 때문입니다. 그들이 여러 상방을 건드렸는데, 누구도 중재를 해 주지 않았지요. 그때 다른 상방들이 깨달은 겁니다. 각자도생 적자생존이라는 것을요.”
“그럼 다른 곳들도 싸우고 있습니까?”
“유명한 상방치고 칼을 뽑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유명교나 정의맹에 발을 걸치고 있어서, 이제는 중재도 불가능한 상황이지요.”
“허! 그럼 진짜 무림 방파 간의 싸움 못지않겠습니다?”
조용히 죽을 먹던 조정이 끼어들었다.
“그보다 더합니다. 이 싸움에 관여되지 않은 무림 방파가 없다시피 하니까요. 심지어 칠파이문의 속가제자들도 동원되고 있거든요.”
“야아! 그건 또 몰랐네요. 우리가 정주에 있을 때만 해도 조용했는데.”
그러자 유근식이 한마디 했다.
“그건 설 사형이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래요. 정주도 상방 간에 싸움이 많았어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아니, 상방이면 장사나 하지. 왜 싸운대?”
“돈벌이가 잘되는 걸 날름 삼키려다 보니까 그런 거죠. 천도문은 도와주는 상방이 없었나 봐요? 우리 금검문은 그 문제로 아주 골치가 아팠는데.”
“어. 우리는 상방과 함께 일할 정도의 규모가 아니잖아. 제자도 별로 없고.”
자조 섞인 그의 말에 진설하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저런! 그래서 모르셨구나. 상방들 지금 장난 아니에요. 정사대전 저리 가라라니까요.”
“그 정도야?”
연적하가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설차수 일행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지금쯤이면 산에서 내려간 의형제들 대부분이 자리를 잡았을 게다.
직접 문파를 세우지 않는 한 무인들의 일자리란 뻔하다.
그중 상방과 관계되지 않은 게 없다.
얼마 전까지 풍연초와 탁고명의 삶을 목격한 그였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심통이 죽을 퍼먹다 말고 말했다.
“후루룩. 쩝, 쩝. 별일 없을 겁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가 열 배, 백 배로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쯧! 심 노인의 말은 나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만 알아 둬.”
연적하가 혀를 찼다.
잘 지내기를 바라는데 복수라니?
일이 생긴 다음에 복수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 공자님이 직접 손을 쓰시게요? 번거롭지만 그것도 괜찮지요.”
“어허! 그런 뜻이 아니야. 복수할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알겠어?”
“쯔읍, 쩝. 그들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공자님께서 애를 태우셔도 어차피 다 팔자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 더러워. 이 사이에 뭐 좀 꼈다고 쩝쩝거리지 좀 마. 듣는 사람 입맛 달아난다고.”
“쯔읍. 제가 그랬습니까?”
“진짜! 이 늙은이가!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 맞지?”
“어이쿠! 절대 아닙니다. 일부러 그랬다면 제가 벼락을 맞아 죽습니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내가 심 노인 머리 위로 벼락을 떨어뜨릴 줄 알아.”
연적하는 정말 심통의 머리 위로 전뢰검기를 떨어트릴 작정이었다.
찔끔한 심통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건원과 조정의 식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불청객들이 몰려왔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열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만리상방의 무사들이었다.
건원과 조정이 대경실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하들을 이끌고 추격해 온 만리상방의 무사 경첨이 소리쳤다.
“건원! 여기에 숨어 있었구나! 뛰어 봐야 벼룩이지. 이제 그만 포기하고 투항해라!”
그러나 건원과 조정은 슬그머니 설차수 일행 속으로 섞여들었다.
순간 경첨이 눈을 찌푸렸다.
일곱 명의 남녀가 복성상방과 어떤 관계인지 몰라 손을 쓰기 애매했던 것이다.
일곱 명의 남녀를 쓸어 보던 경첨이 가장 앞쪽에 있는 설차수에게 말했다.
“나는 제녕 만리상방의 소천대 대주 경첨입니다. 복성상방과 분쟁 중인데, 당신들은 그들과 관계가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던 것뿐입니다.”
그 말에 경첨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아 그러시군요. 우리가 저들을 잡아가려 하는데 협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설차수가 애매한 얼굴로 경첨과 연적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의맹에 몸담은 지도 어언 삼 년이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무슨 협조를 해 달라는 겁니까?”
“보다시피 저들이 당신들 뒤에 숨어 있습니다.”
진설하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더러 이 두 사람을 당신에게 내주라는 건가요?”
“…….”
여자의 냉랭한 말에 경첨은 머뭇거렸다.
솔직히 그 비슷한 말을 하려고 했는데 분위기를 보니 틀린 것 같다.
하기야 처음부터 무리한 부탁이었다.
정파인들치고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해 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연적하에게 한 소리 듣고 뻘쭘해 있던 심통이 다시 기가 살아 ‘흥!’ 하고 냉소를 쳤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는구먼. 뻔뻔하게 남을 이용하려는 놈들이나,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놈이나.”
그의 한마디에 건원과 조정은 물론 경첨 일행의 안색까지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