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
13회. 첫 산행(山行)
싸움이 길어지자 탁고명은 풍연초 채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신체 조건은 천기덕이 월등히 앞서는데 작고 왜소한 연적하를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연적하가 이기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것 같았다.
곧이어 두 사람이 엉켜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 한심한 꼬락서니를 유심히 지켜보던 풍연초가 입을 열었다.
“고명아.”
“예.”
“대충 분위기를 보다가…….”
어느 한쪽을 승자로 선언하라고 하려는 순간 ‘뻑’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멈췄다.
잠시 후 연적하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천기덕에게로 향했다.
재수 없게도 그는 튀어나온 돌에 머리를 찧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상황 파악이 끝난 탁고명이 이철산과 한채연에게 물었다.
“이번 싸움은 적하가 이겼다. 너희도 그에게 도전해 볼 테냐?”
그러자 이철산과 한채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저런 꼴이 되느니 그냥 윗사람으로 모시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침내 탁고명이 선언하듯 말했다.
“천기덕이 패했고, 다른 아우들이 승복했으니 연적하가 일곱째다. 새로 가족이 된 사람들은 그를 윗사람으로 여기고 잘 따라야 할 것이다.”
“예.”
“네.”
서열 정리가 끝나자 채주 풍연초가 나섰다.
“이제 채연이가 막내니까 적하를 대신해서 점심 준비를 하도록 해라. 빨래는……. 사람이 늘었으니 기덕이에게 맡기면 되겠다. 이상! 알아서들 쉬어.”
그제야 산채 식구들이 하나 둘 흩어졌다.
이철산은 친구인 천기덕을 들쳐 업고 방안으로 옮겼다.
우두커니 서 있던 연적하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첫 싸움의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내공을 배제한 격렬한 몸싸움 끝이라 그런지 개운하면서도 착잡한 기분이 든다.
‘젠장!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는데…….’
아까 이철산이라는 남자가 ‘어리바리해 보인다’고 놀릴 때 갑자기 심화가 끓어올랐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살기가 치솟았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하아!”
장탄식을 터뜨리는데 뒤에서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연 오라버니! 저보고 점심을 준비하라는데……. 좀 가르쳐 주세요.”
“…….”
연적하는 누나뻘인 한채연이 오라버니라고 부르자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서열이 그렇게 정해졌으니 그냥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멈칫하던 연적하가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채연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
“어디 가세요?”
“주방.”
연적하의 말은 짧았다.
아직 서열이 몸에 배지 않아 반말하기가 불편해서다. 물론 한채연처럼 아름다운 여자와의 대화도 처음이라 그런 것도 있다.
짧은 기루 생활로 사내를 알게 된 한채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 귀여우셔라.’
굵직굵직한 인상의 청장년들 속에 이처럼 파릇파릇한 소년이 있을 줄이야!
연적하는 주방에 들어가 자신이 그동안 해 오던 일을 한채연에게 가르쳤다.
“……물은 계곡에 내려가서 떠야 하는데 힘드니까 내가 도와줄게요. 아니 도와줄게.”
한채연이 배시시 웃으며 ‘네에’라고 길게 대답했다.
“그럼 이만.”
연적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주방 밖으로 나갔다.
산채의 앞마당을 가로지르는데 탁고명이 불렀다.
“적하야, 이리 오너라.”
“예!”
연적하가 다가오자 탁고명이 허름한 박도(朴刀) 하나를 건넸다.
“큰형님이 너 주란다. 오늘 네 녀석이 싸우는 모습에 감명받았다고 하시더라. 내일부터는 너도 산행에 데리고 가기로 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적하가 허리를 넙죽 숙였다.
“그래, 오늘 기덕이랑 싸울 때처럼만 해. 그럼 너도 영웅호걸이 될 수 있어.”
“헤헤! 예.”
연적하의 멍든 얼굴을 바라보던 탁고명이 ‘쯧쯧’ 하고 혀를 차다가 말했다.
“어험! 특별히 네놈에게 본인의 항마도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마. 눈먼 칼에 맞아 죽고 싶지 않으면 틈나는 대로 수련해야 할 것이다.”
“항마도법요?”
“그래, 내가 소싯적에 절밥 먹은 건 알지?”
“예.”
“그때 배워 둔 거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네놈 인생이 불쌍해서 가르쳐 준다. 맞아 죽지 말라고. 너 인마, 맨손이라 그 정도지 만약 칼싸움이었으면 열두 번도 더 죽었어.”
연적하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칼이었다면 눈 감고도 이겼을 텐데…….’
“잘 봐. 전부 해 봐야 삼 초식밖에 안 되니까 금방 익힐 수 있을 게다.”
이윽고 탁고명이 삼 초식의 항마도 법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좀 어렵지? 처음에는 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다시 한 번 보여 줄까?”
탁고명의 말에 연적하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다 외웠는데요?”
“응? 한 번 보고 다 외웠다고? 진짜?”
“예.”
“해 봐.”
탁고명의 말에 연적하는 박도를 들고 움직였다.
항마도법은 벼락처럼 위에서 내려치고, 아래에서 위로 베어 올린 뒤에, 동서쪽의 머리 부위를 찌르는 비교적 간단한 세 가지 동작이 전부다.
그가 익힌 ‘구천구검’에 비하면 이건 정말 누워서 물 먹기라고 할 수 있다.
쉬익. 쉭. 쉭. 차라락. 쉬이익.
가을 햇살을 받은 도광이 눈부시게 번득였다.
연적하는 십 년간 ‘구천세법’과 ‘구천구검’을 연성하여 상승의 검리가 몸에 익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항마도법을 펼치자 단순한 세 개의 초식은 더 이상 단순하지 않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탁고명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아! 천잰데?”
“헤헤.”
삼 초식의 항마도법을 끝냈지만 연적하는 숨소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험험, 그거 하나 배웠다고 자만하지 말고 부단히 수련해라. 알겠냐?”
“예.”
연적하는 박도를 눈높이까지 받쳐 들고 머리를 숙였다.
어린 시절에 본 와룡장 무사들의 행동을 무심코 따라 한 것이다.
탁고명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 이놈! 자세 나오는데? 그러니까 우리도 전통 깊은 산채 같구나! 푸하하핫!”
“헤헷!”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런데 둘째 형님, 큰형님은 무슨 무공을 익히신 거예요?”
평소 풍연초의 도법이 워낙 독특해서 물어본 것이다.
“큰형님은 저잣거리에서 약 파는 노인에게 천지도법을 배웠다고 들었다.”
“천지도법요?”
“널리 알려진 도법이지만 큰형님의 신력이 뛰어나서 이 근방에서는 당해 낼 자가 없다.”
“와아!”
연적하는 다소 과하게 놀란 시늉을 했다.
그렇게라도 큰형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싶어서다. 사실 풍연초와 탁고명은 생명의 은인이라 연적하에게는 혈육만큼이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기절한 천기덕은 초저녁에야 깨어났다.
그래도 사내라고 천기덕은 연적하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했다.
하지만 완전히 승복하지는 않은 듯 구시렁거렸다.
“연 형님, 나중에 칼 들고 정식으로 한판 붙어 봅시다.”
“그러든가.”
연적하는 맨손보다 칼이 더 편했다.
검법이나 도법을 연마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풍연초는 산채의 식구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험, 험. 남양현에서 주구현으로 가는 상방(商幇, 상인들의 조직)이 하나 있다. 남양(南阳)에 본점이 있는 남양상방인데 호위가 일곱이라더라.”
셋째 마형도가 자신 없는 소리로 말했다.
“큰형님, 일곱이면 좀 빡센 거 아뇨?”
“그거야 싸울 때 얘기고. 녹림을 앞세우면 그들도 싸우려 하지 않을 게다.”
“그, 그런가…….”
마형도가 찌그러들었다.
“만일의 경우 한두 명에게 화살을 먹이면 된다. 다섯으로 숫자를 줄이면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다.”
“그런데 누가 활을 쏩니까?”
넷째 허임달의 물음에 풍연초가 천기덕과 한채연을 바라보았다.
“기덕이와 채연이가 활을 쏠 줄 아니까 두 사람에게 맡길 생각이다.”
“아!”
산채의 식구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천기덕과 한채연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적하는 나서지 말고 둘째 옆에 붙어 있도록 해라. 적하와 신입들은 내일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하면 될 게다. 알겠느냐?”
“예.”
네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남양상방이 통행세를 내면 다른 상방들도 줄줄이 낼 거다. 그럼 우리도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가 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실수하지 마라. 알겠느냐?”
“예!”
“걱정 마십쇼.”
풍연초가 흐뭇한 눈으로 식구들을 둘러보았다.
상대는 소규모지만 나름 이름이 알려진 남양상방.
그들은 오봉산을 석 달에 한 번 꼴로 넘어갔지만 지금까지 통행세를 낸 적이 없다.
마구잡이식의 산적질도 지쳤다.
녹림에 가입하고, 식구도 늘었으니 슬슬 통행세라는 걸 받아 볼 생각이다.
그렇다고 다른 녹림들처럼 큰돈을 바라는 건 아니다. 소액이나마 싸우지 않고 통행세를 받는 게 목표다. 남양상방이 머리를 숙이면 다른 상방도 그렇게 할 것이었다.
***
다음 날 오전.
삼십여 명의 상인들이 오봉산 초입에 들어섰다.
남양상방의 상인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산을 넘으려는 잡상인들이다.
남양상방에 소속된 호위무사 일곱이 선두를 지켰다.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걷던 풍운대주 왕인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아! 아득한 한 산 비탈진 돌길 오르니 흰 구름이 이는 곳에 인가가 있네.”
두목(杜牧)의 시 산행(山行)에 나오는 구절이다.
곁에서 나란히 걷던 행수 임오군이 말을 받았다.
“하하! 왕 소협, 우리도 수레를 세우고 잠깐 풍광을 즐기다 갈까요?”
“그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다른 상인들이 저를 잡아먹으려고 할 겁니다. 얼른 산을 넘어야…….”
휘리리릭. 퍽.
왕인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쪽에 창 하나가 날아와 박혔다.
임오군 행수는 놀란 얼굴로 풍운대주 왕인걸의 뒤로 물러났다.
왕인걸이 날카로운 눈으로 창을 살폈다.
나무를 다듬어 만든 평범해 보이는 창대에 녹색의 깃발이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다.
깜짝 놀란 왕인걸의 얼굴이 굳었다.
강호에서 녹색 깃발은 녹림의 상징인 까닭이다.
‘뭐지? 오봉산에는 녹림의 산채가 없는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무성한 잡목 숲에서 산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채주인 풍연초가 박도를 어깨에 들쳐 메고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 오봉산의 주인에게 인사도 없이 그냥 갈 생각은 아니겠지!”
왕인걸은 대답 대신 일단 산적들을 찬찬히 살폈다.
상대는 모두 여덟.
험한 얼굴에 박도와 도끼를 들었지만 조금 어설퍼 보이는 느낌이다.
조금 여유를 되찾은 왕인걸이 담담하게 말했다.
“본인은 남양상방에 속한 풍운대의 대주 왕인걸이오. 오봉산의 주인이라고 하는 분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시오?”
“나는 오봉산채의 채주인 풍연초다.”
순간 왕인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풍연초라는 이름이 귀에 익어서다.
‘오봉산에 있는 작은 도적패의 두목이라고 했던가?’
그때 숲 속에서 대뜸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쉬익. 퍽.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왕인걸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 뒤쪽의 거목에 박혔다.
‘헉! 이건 또 뭐지? 피를 보자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