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10
1310회. 안 해! 줘도 안 먹어!
족장의 집 앞에 바글바글 모여들었던 마족들이 조용히 흩어졌다.
그다음은 엘리오 일행을 포위했던 기간타스 전사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카락 족장이 인간들을 ‘대족장에게 보내겠다’고 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엘리오의 가공할 투기를 당해 낼 재간이 없어서다.
마족에게 약육강식은 불변의 진리다.
그래서 자기보다 약한 것을 경멸하고, 강한 상대를 경외한다.
당연히 돌아가는 마족들은 더 이상 인간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 기간타스 전사들이 보인 적대감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결말이다.
일이 꼬일 것을 염려하던 크레아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끝난 건가요?”
아무도 호응하지 않자 그녀의 연인인 하워드 솔론 남작이 말했다.
“그런 것 같지? 마족들 표정이 침략자를 대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아 경, 제 말이 맞습니까?”
그래도 불안한지 하워드 솔론 남작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끌어들였다.
엘리오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프트라스와 인간, 우샤스 운드라(금사)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이세계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다.
이윽고 족장과의 대화 결과를 궁금해하는 일행에게 엘리오가 말했다.
“우샤스 운드라가 어디 있는지 대족장이 알 거라고 하네요. 저 거인이 우리를 대족장에게 데려다줄 겁니다.”
말과 함께 그는 기간타스 전사들의 리더인 쿰을 가리켰다.
때마침 인간들을 내려다보던 쿰이 엘리오에게 물었다.
“카락 님이 그대를 대족장님에게 안내해 주라고 했다. 지금 출발할 텐가?”
엘리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한두 시간만 지나면 해가 질 것 같았다.
산을 내려가면 바로 캄캄해질 텐데 지금 출발할 거냐고 물은 것이다.
“대족장이 있는 곳까지 얼마나 걸리지?”
“카르나크 산지를 따라 서쪽으로 사흘 동안 가야 한다.”
“카르나크 산지?”
“우리가 있는 이 산과 연결된 산들이 카르나크 산지다.”
엘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확한 지명이 아니라 여러 산들을 대충 뭉뚱그려 카르나크 산지라니 마족답다.
“아무튼 이 산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사흘 정도 가야 한다는 거지?”
“그렇다.”
“어차피 사흘이나 가야 하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 산을 내려가면 밤인데.”
“서두르다니? 낮과 밤이 무슨 상관인가?”
쿰이 의아한 얼굴로 인간을 보았다.
마수와 마물 들은 마족을 피해 다닌다.
심지어 저 인간은 마족 중에서도 군주급이니 행동에 제약이 있을 리 없다.
낮과 밤이 어떻다고 밤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마족은 어떤지 몰라도, 사람은 밤에는 쉬어야 한다고. 산을 내려가자마자 잠자리부터 마련해야 한다 이 말씀이야.”
“그럼 그렇게 하면 되지 않나?”
“사방에 마물과 마수가 바글거리니까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
“혹시 마물과 마수가 그대에게 가까이 가던가?”
“어. 눈치 빠른 놈은 피해 가는데, 대부분 덤벼들더라고?”
“그렇군.”
뒤늦게 쿰은 저 인간이 왜 밤을 꺼려 하는지 알았다.
마물과 마수 따위가 처음 보는 인간을 사냥하려 들었던 모양이다.
마족의 경우 그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지 않는 한, 마수와 마물이 알아서 피해 다닌다.
어비스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안 마족에 대한 공포가 각인된 탓이다.
“마족들은 다른가 봐?”
눈치 빠른 엘리오의 물음에 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함께 다니는 한 마수와 마물은 근처에 오지 않을 것이다.”
“네 심장에 있는 마력, 아니 카오스의 기운 때문인가?”
“그렇다. 마물과 마수는 마족의 이 기운을 두려워한다.”
“포식자의 기운이라고 생각하나 보군.”
“맞다. 땅 위의 인간이지만 카오스에 대해 잘 아는 것 같군.”
“그야 나도 먹어 본 적이 있으니까.”
“사실인가? 카오스를 받아들인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데?”
카오스는 혼돈 그 자체.
영기든 마나든 카오스를 받아들인 순간 순수함을 잃게 된다.
그런데 이 인간의 영기는 카오스를 먹은 것치고 너무 깨끗했다.
“멋모르고 먹은 뒤 후유증에 시달렸는데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이 정화를 해 주었거든.”
“인간이 그걸 먹다니? 호기심이 지나치군.”
“어떤 마족 군주가 몸에 좋다고 권해서 먹은 것뿐이야.”
“그대는 마족 군주들과 사이가 좋은가?”
처음으로 쿰의 얼굴에 호감이 깃들었다.
마족 군주가 그걸 권할 정도면 마족과 가깝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반반이야. 내 손에 죽은 군주들도 있고, 친해진 군주들도 있으니까.”
기대와 동떨어진 답에 쿰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쿰의 침묵이 길어지자 엘리오가 물었다.
“어쨌든 당신과 함께 다니면 마수나 마물 따위가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거지?”
“그렇다.”
“그럼 가자고. 걸리적거리는 게 없다면 가야지. 시간도 없는데.”
“시간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사람이 카오스에 오래 노출되면 예민해져서 폭력적으로 변한다더라고. 그래서 한 달 이상 어비스에 머물지 못하게 되어 있어. 뭐 법으로 정한 게 아니라서 안 지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대도 해당되나?”
“당연하지. 나는 영기 수련자라고.”
순간 쿰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마족 군주를 죽인 인간이 폭력적으로 변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대는 어비스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나?”
“열흘쯤 됐어.”
긴장으로 저도 모르게 살짝 굳어 있던 쿰의 얼굴이 풀어졌다.
마족인 그에게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미쳐 날뛴다’와 같은 의미인 까닭이다.
‘다행이군. 아직 이십 일이나 남았으니.’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마족 군주들을 죽이고 카오스까지 먹은 괴상한 인간과 함께 있는 건 너무 위험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쿰은 급하게 서둘렀다.
“출발하겠다.”
말을 마친 쿰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걸음이 얼마나 빨랐던지 엘리오 일행은 처음부터 달려야 했다.
한참을 뛰어가던 파비안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라고아 경! 이제 곧 해가 질 텐데 이렇게 무작정 움직여도 됩니까? 마족 마을에서 하룻밤 묵는 게 낫지 않습니까?”
“걱정 마! 밤에 보초 서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왜요? 마족이 지켜 준답니까?”
“마수나 마물이 마족을 피해 다닌단다. 자기랑 다니면 아무 일도 없을 거란다.”
“다 좋은데요! 마족을 어떻게 믿고 그냥 잘 수 있습니까? 저는 그냥은 못 잡니다!”
“저도요!”
“저도 마족은 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하워드 솔론 남작과 크레아가 한마디씩 던졌다.
“그렇게 겁이 나면 불침번을 서든가.”
엘리오가 불침번 이야기를 꺼내자 파비안과 하워드 솔론 남작, 크레아는 얼른 눈빛을 주고 받았다.
소드 비기너에 불과한 그들은 그렇게라도 자신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해가 떨어져 어둑어둑해지고 있는데도 쿰은 계속 걸어갔다.
보다 못한 엘리오가 멈추라고 한 뒤에야 쿰은 마지못해 멈춰 섰다.
“이봐, 서두르는 것도 좋은데 잠은 자고 가야지. 마족은 잠을 안 자?”
“그럴 리가. 우리도 잔다.”
“준비된 잠자리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하룻밤 묵자고.”
“그러지.”
엘리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쿰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콰드드득―!
그의 엉덩이에 깔린 나무 십여 그루가 맥없이 꺾이거나, 뿌리를 드러내며 누웠다.
그 모습을 본 엘리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우!”
마족이 무심코 한 행동의 결과를 보니 마물과 마수가 마족을 무서워할 만도 하다.
엘리오는 파비안 등을 생각해 거인과 조금 떨어진 곳에 천막과 침구류를 꺼내 놓았다.
파비안과 하워드 솔론 남작, 크레아가 달라붙어 빠르게 잠자리를 마련했다.
잠시 후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크레아가 거인을 힐끔 보더니 엘리오에게 물었다.
“라고아 경, 마족은 어떻게 할까요?”
말은 못 했지만 크레아는 걱정이 컸다.
거인과 나눠 먹으면 미리 준비한 식량은 며칠 못 가 바닥을 드러낼 터였다.
그뿐 아니다.
거인의 한 끼 식사를 만드는 것도 엄청난 노동이었다.
사람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큰 입을 음식으로 채운다고 생각해 보라!
잔계산이 빠른 엘리오는 단번에 크레아의 염려를 알아차렸다.
“빼고 해요. 저 덩치면 우리가 준비한 음식을 하루에 다 먹어 치울 거예요. 그러면 안 되지.”
“네!”
크레아는 기운차게 대답하고 식사 준비에 속도를 올렸다.
한편 ―비록 매몰차게 말은 했지만― 식사에서 제외된 거인이 마음에 걸린 엘리오는 슬그머니 거인에게 다가갔다.
“이봐. 이름이 뭐랬지?”
“쿰이다.”
“그래, 쿰. 사람은 하루에 세 끼를 먹는데, 그쪽은 어때?”
“우리는 배고플 때 먹는다.”
“그렇구나. 언제 배가 고플 것 같아?”
“모른다. 속이 쓰리면 배가 고픈 거고, 그럼 사냥을 해서 먹는다.”
거인이 영 말귀를 못 알아듣자 엘리오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곧 저녁 식사를 먹을 거야. 그런데 미안하지만 너의 것은 없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준비한 음식을 너에게 주면 음식이 부족해지거든.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네가 먹을 음식은 네가 해결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러자 쿰이 기이한 눈으로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기간타스의 전사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한다. 너도 인간족의 전사라면, 그런 것쯤은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라.”
“아니, 내 말은 먹을 걸 나눠 달라는 게 아니라, 각자 알아서 먹자 이 말이야.”
그제야 쿰은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대와 떠들었더니 속이 쓰려 오는군. 나도 뭔가를 먹어야겠다. 남은 것을 나눠 줄 거라 기대하지는 마라.”
“안 해! 줘도 안 먹어!”
퍼질러 앉아 있던 쿰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내 컴컴한 숲으로 사라졌다.
엘리오가 일행에게 돌아가자 파비안이 물었다.
“해가 졌는데 마족은 갑자기 어디로 간 겁니까? 언성을 높이시던데 싸우셨습니까?”
“싸우긴 왜 싸워? 배가 고프다고 사냥하러 간 거야. 아, 참고로, 먹는 건 각자 해결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거인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다행이네요. 마족의 식사를 준비하려면 세 사람이 매달려도 몇 시간은 걸렸을 겁니다.”
“그 정도 식재료도 없어.”
“마족은 뭘 먹을까요?”
파비안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숲에서 쿰이 걸어 나왔다.
쿰의 양손과 목에 몸통 지름이 2미터는 됨 직한 거대한 비단뱀 한 마리가 걸려 있었다.
쿰은 보란 듯 손톱으로 비단뱀의 목을 째고는, 껍질을 쭉쭉 벗겨 나갔다.
비단뱀의 하얀 속살이 드러나며, 팔뚝만 한 기생충들이 ―마치 끓는 기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메스꺼움을 느낀 엘리오가 급히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아 젠장. 나는 안 궁금했다고.”
하워드 솔론 남작은 이를 악물었고, 크레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던 파비안이 무심코 말했다.
“그냥 뜯어 먹는데요? 익히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