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17
1317회. 나는 타메이온에서 온 군주다
쿰의 어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엘리오가 중얼거렸다.
“신기하네.”
쿰이 인간을 슬쩍 돌아보았다.
마족 군주보다 강한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한 게 뭘까?
“무슨 소리냐?”
“발리족 말야. 아무리 봐도 인간 여자와 똑같아 보인단 말이지. 부라퀴족도 그렇고.”
“…….”
쿰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마족과 인간이 닮은 걸 왜 신기하다는지 모르겠다.
발리족들이 로브를 쓴 일행에게 다가가자 엘리오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발리족 족장 맨자민 리마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내려선 남자를 살폈다.
‘어떻게 중위 마족인 기간타스의 어깨에 올라탄 거지?’
부라퀴족은 발리족과 마찬가지로 하위 마족이다.
숫자가 많다면 모를까?
기간타스와 다니는 건 고작 다섯.
중위 마족이 발 한번 구르면 피떡이 되어 사라질 의미 없는 숫자다.
“너는 마족이냐? 인간이냐?”
거듭된 질문에 엘리오가 뚱한 얼굴로 답했다.
“하나 마나 한 소리 하지 말자고. 어차피 잡아먹겠다면서?”
“…….”
예상을 벗어난 남자의 반응에 맨자민 리마는 한순간 멈칫했다.
이번에는 엘리오가 찬찬히 눈앞의 여자를 뜯어보았다.
여자치고는 큰 키지만, 그걸 제외하면 그냥 강호의 여협과 비슷했다.
정확히는 거친 녹림의 여걸들을 닮았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를 잡아먹는다는 걸 알지만 딱히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육식동물 냄새가 나려나?’
엘리오가 무심코 코를 킁킁거리자 맨자민 리마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뭐 하는 짓이냐!”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다 민망하네.”
엘리오가 뻔뻔한 얼굴로 발리족 여자를 보았다.
냄새도 인간과 딱히 다를 게 없었다.
아무리 봐도 어둠의 에테르를 받아들였다는 것 외에 그냥 인간 여자였다.
그런데 남자를 잡아먹는다니 놀라울 뿐이다.
뒤늦게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맨자민 리마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너는 부라퀴족이냐?”
“그래. 나는 부라퀴족으로 군주가 된 엘리오 라고아 님이시다. 문제 있나?”
“거, 거짓말. 부라퀴족 대족장인 라자 코트라 님도 군주에는 오르지 못했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타메이온에서 온 군주다. 그러니까 알아서 모셔라.”
“타메이온? 저주받은 땅?”
“타메이온을 아나?”
“알고말고. 마나 프트라스에게 저주받은 땅을 모르는 마족이 어디 있다고.”
“타메이온이 마나 프트라스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그래서 생육이 더디어졌지.”
“아, 그래?”
엘리오는 타메이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지라 더 묻지 않았다.
의심 어린 눈으로 자칭 군주라는 사내를 보던 맨자민 리마가 물었다.
“당신이 군주라는 증거가 있나?”
그래도 겁이 났는지 맨자민 리마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엘리오가 목걸이를 옷 밖으로 꺼내 보였다.
“이게 부라퀴족의 보물인 트레듀서라는 거야. 마족들의 언어를 통역해 주는 아티팩트지. 이런 걸 평범한 부라퀴족이 가지고 있을 것 같아?”
“트레듀서…….”
부라퀴족의 트레듀서는 마족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했다.
마족들은 비슷한 종족이 아니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예컨대 부라퀴족과 발리족, 사티로스족(상반신이 인간)들은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완벽하게 언어가 같은 건 아니지만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거인족은 예외다.
비록 형상은 비슷했지만 체구가 너무 달라서 그런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힘이 약할수록 통역 아티팩트는 빛을 발한다.
원치 않는 싸움을 피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수의 부라퀴족이 기간타스와 함께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트레듀서로 대화를 나눈 덕분이리라.
‘트레듀서는 족장은 돼야 소지가 가능한 보물일 텐데…….’
그걸 생각하면 청년의 주장을 마냥 거짓말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기간타스의 어깨에 올라탄 것도 그렇고…….’
뒤늦게 청년의 신분을 추측할 만한 정황이 하나씩 떠올랐다.
고민하던 맨자민 리마의 입술이 열렸다.
“타메이온은 마나 프트라스의 결계로 막혀 있다고 들었어요. 아무리 군주님이라도 마나 프트라스의 결계를 뚫기는 어려웠을 텐데요?”
“인간 흑마법사들이 샤이틴의 결계(테르미누스)와 저주가 새겨진 뼛조각(차라트)들로 마나 프트라스가 만든 벽에 구멍을 낸 적이 있어. 그때 마족들이 여러 차례 인간의 땅을 넘나들었지. 물론 지금은 다시 막혔지만.”
청산유수 같은 엘리오의 말에 맨자민 리마는 절반쯤 넘어갔다.
“좋아요. 당신이 타메이온에서 온 부라퀴족이라는 건 믿겠어요. 하지만 트레듀서 하나만 보고 당신을 군주로 인정할 수는 없어요.”
머리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이해해. 나라도 그럴 거야. 그럼 이렇게 할까? 나를 잡아먹겠다고 온 마족들이니까, 그냥 싹 다 죽이는 거로?”
말과 함께 엘리오가 마하담에서 ‘공허의 검’을 꺼냈다.
우우웅―!
‘공허의 검’에서 흘러나온 공명음이 천지를 울렸다.
가공할 살기가 족장과 그 주변의 발리족을 휘감았다.
갑자기 숨통이 콱 막히자 맨자민 리마는 두 손으로 자기 목을 움켜잡았다.
“크윽…….”
뒤쪽에 있던 엘리트 발리족 십여 명이 무기를 들고 엘리오에게 달려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엘리오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공허의 검’이 그의 주위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콰자자자작―!
박살 난 무기들과 함께 엘리트 발리족들이 뒤로 날아갔다.
연이어 엘리오가 겸결지를 꼿꼿이 세우자, ‘공허의 검’이 맨자민 리마의 머리 위로 날아가 멈춰 섰다.
이 모두가 숨 한 번 쉴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 맨자민 리마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말했다.
“사알……려…… 주세요.”
엘리오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공허의 검’이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공허의 검’을 마하담에 다시 넣었다.
거짓말처럼 살기가 흩어졌다.
숨을 헐떡이던 맨자민 리마는 정신이 돌아오자 급히 허리를 꺾었다.
진짜 군주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발리족보다 강하니 일단 굴복한 것이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용서하지.”
“감사합니다!”
이윽고 그녀는 허리를 세우고 자칭 부라퀴족 출신 군주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을 보니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는 발리족의 목숨에 눈곱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군주의 칭호는 마족의 태생과 무관하다.
비록 부라퀴족이 하위 마족이지만, 군주는 준신급 존재.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발리족의 목숨 따위는 파리만도 못할 터였다.
‘운이 좋았다.’
그가 진짜 군주라면 불경스러운 태도를 취하고도 살았으니 좋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조금 전에 우리를 먹겠다고 했지?”
“요, 용서해 주십쇼! 군주님 일행이신 줄 모르고 그랬습니다.”
“용서는 이미 했고. 궁금해서 그래. 발리족은 정말 남자를 잡아먹나?”
“상징적으로 신체 일부를 먹습니다.”
“원한이 깊어?”
“태고 시대에 남자들이 종족을 배신해서……. 그 뒤로 율법이 됐습니다.”
“재밌군. 발리족에서 군주가 나온 적이 있어?”
“아직 없습니다.”
“부라퀴족에 대족장이 있다고 했지?”
“예, 라자 코트라 님이십니다.”
“부라퀴족에 그런 능력자가 있는데도 부라퀴족을 잡아먹겠다고 한 거야?”
“죄송합니다.”
맨자민 리마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뒤통수를 빤히 보던 엘리오가 말했다.
“너, 혹시 부라퀴족 대족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야?”
“그게…….”
여자가 머뭇거리자 엘리오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믿는 게 있어서 부라퀴족이라도 잡아먹겠다고 날뛴 거구나. 하여튼 사람이고 마족이고 하는 짓이 똑같다니까.”
맨자민 리마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발리족이 여자들 뿐이라고 하지만, 여자들만으로 지금까지 종족을 유지할 수는 없다.
발리족 여자들의 상대는 주로 부라퀴족이다.
물론 대범한 여자들은 다른 마족과 잠자리를 갖기도 했다.
그런데 종족이 너무 다르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아기가 생기면 같은 일을 반복했다.
남자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만 발리족으로 키웠다.
“부라퀴족 대족장의 아들이 태어나도 잡아먹을 거야?”
“…….”
타메이온에서 온 군주가 두려운 맨자민 리마는 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엘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부라퀴족 대족장이라는 놈의 상판대기가 궁금하네. 부모가 돼서 제 새끼를 잡아먹다니. 에혀! 쓰레기 같은 년놈들.”
그렇지 않아도 이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던 엘리오는 독설을 쏟아 냈다.
부성애가 강한 그에게 부라퀴족 대족장은 그냥 개잡놈에 불과했다.
맨자민 리마는 이를 꽉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머리에 새겼다.
‘라자 코트라 님의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발리족은 남자를 믿지 않는다.
그녀는 부라퀴족 대족장인 라자 코트라에게 오늘의 일을 반드시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꺼져.”
맨자민 리마는 허리를 펴지 않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이윽고 발리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표정을 살피던 파비안이 슬쩍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리 마족이라도 그렇지 제 새끼를 잡아먹는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
“그러니 마족이지요.”
“그건 이유가 안 돼. 어둠의 에테르만 빼면 사람과 똑같잖아.”
그러자 크레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어, 그런데 라고아 경. 사람들 중에도 딸을 낳으면 죽이는 부족이 있어요.”
“진짜요?”
“예.”
“어느 부족이 그런 짓을 해요?”
“남부 왕국에 있는 푸타족이 그래요. 아들만 바라서, 딸이 태어나면 베개로 얼굴을 눌러서 죽여요.”
“아, 젠장. 이쯤 되면 사람하고 마족하고 닮아도 너무 닮은 거 아니에요?”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크레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발리족을 가까이서 보고 남부 왕국 여자들인 줄 알았다.
마족들 중에 사람과 닮은 종족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았다.
만약 숲에서 단둘이 마주쳤다면 길 잃은 사람인 줄 알았을 게다.
하워드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마족들도 수인(獸人)과 닮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파비안이 반론을 제기했다.
“수인보다 마족이 더 괴상하게 생겼지. 날개 가진 인간은 있지만, 가루드족처럼 독수리 머리를 가진 인간은 없잖아.”
“아, 그건 또 그렇네요. 확실히 마족이 수인보다 훨씬 짐승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마족 종류가 더 다양한 것 같지 않습니까?”
하워드가 무심코 던진 말에 사람들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건 인간이나 수인보다 마족들이 먼저 나왔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두커니 서 있던 쿰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계속 떠들기만 할 건가?”
“그럴 리가. 출발하자고.”
엘리오가 다시 쿰의 어깨 위로 새처럼 훌쩍 날아올랐다.
석양이 질 무렵.
쿰과 엘리오 일행은 마침내 날카로운 산을 병풍처럼 두른 분지에 도달했다.
거대한 분지 한가운데 대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신전이라기보다 거대한 성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쿰이 짐짓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이 켄티우스 분지다. 신전이 어딘지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겠지?”
“어, 수고했어. 그만 가도 돼.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게.”
미련 없이 쿰의 어깨를 박차고 날아오른 엘리오는 지면으로 깃털처럼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던 쿰은 이내 왔던 길을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