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44
1344회. 타협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한편 미노스를 떠난 파비안은 제국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크라시온으로 넘어갔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라르바 오마르 백작 일행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드리아 왕국 국왕이 북부 대귀족인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국빈으로 대우하며 전시임에도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개최한 때문이다.
파비안은 물어물어 라르바 오마르 백작 일행이 머무른다는 쿠스코 성을 찾아갔다.
크라시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쿠스코 성은 저녁임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성의 경비병들에게 신원과 용무를 밝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하워드와 크레아가 마중을 나왔다.
“형님!”
“오라버니? 라고아 백작님은 어쩌시고요?”
파비안은 하워드와 크레아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미노스에 계속 있으면 죽는다면서 오마르 백작님에게 가라 하시더라고.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미노스를 떠나 이리로 온 거야.”
“라고아 백작님에게 예지 능력까지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 정도면 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분 아닙니까?”
하워드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파비안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천공성에 대해 기록한 고대 시를 알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걸?”
“왜요?”
“오 낯선 자여, 모든 신들에 맞서 홀로 싸우라.”
“그게 설마…….”
“오마르 백작님과 나는 고대 시가 언급한 ‘낯선 자’를 라고아 백작님으로 생각하고 있어. 실제로 신들에 맞서 싸우고 계시잖아?”
“…….”
그 말을 들은 하워드와 크레아는 제각기 생각에 잠겼다.
쿠스코 성 중앙 홀.
파비안 등이 안으로 들어서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게. 무슨 급한 전갈이라도 있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할 말씀은 없고, 실은 잠시 피신을 왔습니다.”
파비안은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된 연유를 소상히 들려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왔네.”
“남부 왕국들은 좀 어떻습니까? 뭐 좀 건진 거라도 있습니까?”
“그게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네.”
“이상하다니요?”
“객관적으로 보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건만, 당황해하는 기미가 없거든.”
“남부 왕국 연합이 그렇다는 거죠?”
“그렇네. 북부의 대귀족이 왔다고 환영회까지 열어 줄 정도로 여유를 보인다면 믿어지나?”
“그건 라고아 경과 오마르 경이 워낙 유명 인사라 그런 게 아닐까요? 북부 왕국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잘 대접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지고 있는 전쟁에서 할 법한 행동은 아니야. 라울 브로스넌 국왕을 만나 봤는데 절망에 처한 얼굴이 아니었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가요?”
“그런 눈치네. 내가 남부 왕국의 사람이 아니라 자세히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뭔가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네.”
“앞으로 전세가 역전될 수도 있겠군요?”
“환영회장에서 만난 대귀족들의 표정도 어둡지 않았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몰락을 앞둔 대귀족들은 아니었어.”
“그게 뭔지 궁금하네요.”
“그래서 계속 라울 브로스넌 국왕을 만나 볼 셈이네. 그 방법이 뭔지, 그리고 누가 그 일을 주도하는지 알아내야 할 것 같아서.”
“그 일을 주도하는 자가 ‘혼란의 선봉장’일까요?”
“전세가 역전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보네.”
“누군지 궁금하네요. 그래도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서 접근하십쇼. 그자가 진짜 우샤스 운드라의 화신이라면……. 백작님도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거라면 염려하지 말게. 나는 내 주제를 잘 알고 있으니.”
“어이쿠! 주제라니요. 무슨 그런 겸양의 말씀을. 제가 보기에 백작님은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십니다.”
“쯧!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하고 하워드 경과 함께 하급 지휘관들이나 만나 보게. 어쩌면 그들에게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그런데 열 손가락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닙니다.”
계속된 파비안의 말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그만 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파비안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구시렁거리며 중앙 홀을 떠났다.
***
페로무로스 북부.
강철 군단 사령부.
정오 무렵.
군단장인 테오 스타우런 후작이 초조한 얼굴로 참모장 커트 바르트너 자작에게 물었다.
“1소대는 어떻게 됐나? 아직 연락이 없나?”
“예.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총사만 서른 명이 투입되었습니다. 지려고 해도 질 수 없는 싸움입니다.”
참모장의 여유 있는 태도에 테오 스타우런 후작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총사 하나에게 엑시티움을 들려 주면 소드마스터를 죽일 수 있다.
그런 총사가 서른 명이나 투입됐으니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라도 죽은 목숨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전령을 보내게. 느낌이 좋지 않아.”
강철 군단에서 미노스까지는 말을 이용해 반나절 거리.
지난밤 작전에 들어갔으면 새벽에는 연락이 왔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미노스로 전령을 보냈습니다.”
“잘했네. 강철 군단의 경계를 강화하고, 총병들을 이중 삼중으로 배치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솔직히 커트 바르트너 자작은 전령이 오다가 사고를 당해 늦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지나자 참모장 커트 바르트너 자작도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전령이 오다가 죽은 게 아니라면 도착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조해하는 참모장에게 참모 하나가 찾아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참모장님. 조금 전 32사단에서 이상한 연락이 왔습니다.”
“뭔가?”
“미노스 동쪽 산지에서 지난밤 포격전이 벌어졌었다고 합니다.”
“포격전? 미노스는 32사단 관할지잖나? 그럼 자기들이 더 잘 알 텐데, 아드리아의 저항군과 싸우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게 이상합니다. 32사단에서는 그곳에서 작전을 벌인 적이 없답니다. 오히려 강철 군단에서 작전을 했냐고 물어 왔습니다. 31사단과 33사단에도 전령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희는 마력포가 없지 않습니까?”
“마력총 소리를 잘못 들은 게 아니고?”
“마력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분명했다고 합니다. 현장을 확인해 보니 수천 개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고도 하고요.”
“수천 개의 구덩이? 그럼 정말 포격전을 벌였다는 건데……. 미노스 동쪽 산지가 확실한가?”
“저도 그곳이 1소대 작전 구역이라 몇 번을 확인해 봤는데 맞습니다.”
“미치겠군. 아니, 그 전에 원정군에는 그 정도 화력의 포병대가 없지 않나?”
“32사단도 그래서 비상이 걸렸답니다. 의문의 세력들이 그곳에서 포격전을 벌인 것 같다고 잠정 결론 내렸고요.”
“아직 참전하지 않은 남부 왕국들의 짓일까?”
그곳에서 남부 왕국들끼리 충돌했다면 제국군에는 희소식이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남부의 왕국군은 드니로프 왕국과 우름 왕국에 집결해 있습니다. 그들이 제국군 경계를 뚫고 들어왔다면 32사단에서 몰랐을 리가 없잖습니까?”
“…….”
참모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참모의 말이 맞다.
미노스 인근까지 남부 왕국의 포병대가 이동했으면 진즉에 움직임이 포착됐을 터였다.
참모장이 침묵하자 참모가 말을 이었다.
“장소도 그렇고, 제 생각에는 1소대의 특별 작전과 관계된 것 같습니다.”
“1소대에 마력포가 없다는 걸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하나.”
“라고아 백작에게 한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광역기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법사들의 메테오 스웜처럼 말입니다.”
“영웅담을 따라다니는 소문일 뿐이야. 그런 게 실제로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참모가 말꼬리를 흐렸다.
신화나 전설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경계 병력이나 늘리게. 라고아 백작과 관계된 헛소문이 군단에 퍼지지 않도록 정신 교육도 좀 시키고.”
“알겠습니다.”
참모가 미진한 얼굴로 돌아섰다.
참모장 커트 바르트너 자작은 그런 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해가 떨어지자 강철 군단에 비상이 걸렸다.
아침에 보낸 전령이 미노스를 정찰하고 돌아와 올린 보고 때문이다.
군단장 테오 스타우런 후작이 초조한 얼굴로 참모장에게 물었다.
“라고아의 현재 위치는 어디인가?”
“아직 미노스의 샬레(남부 지역의 산장)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놈의 상태는?”
“미노스의 치료소를 탐문한 결과 어깨와 허리에 경미한 부상을 입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샬레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총사만 서른 명에, 총병이 칠십 명이나 투입됐다! 그런데 어깨와 허리만 조금 다치고 말았다고?”
“…….”
“점심 때까지만 해도 포격전이 벌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가만…… 혹시 32사단이 1소대를 적군으로 오인해 마력포를 쏜 거 아냐?”
“32사단 포병대는 그날 교전을 벌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코르보 마법 병단에서 흘러나온 소문에 의하면…… 라고아 백작이…….”
“작위를 반납한 놈에게 무슨 백작!”
“죄송합니다. 정체불명의 총사들이 공격하자 엘리오 라고아가 반격해 모두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정황상 엘리오 라고아의 부상은 엑시티움에 의한 것 같습니다.”
“엑시티움으로 무장한 1소대가 당했다고? 겨우 그 한 놈에게?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군단장이 몰라서 묻는 게 아님을 안 참모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하던 테오 스타우런 후작이 참모장을 보았다.
“이후의 대책은?”
“우선은 강철 군단의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바탈리온 부대가 건재하니 엘리오 라고아도 섣불리 접근하지는 못할 겁니다.”
“쥐새끼처럼 쥐구멍에 숨어 있자는 것이냐!”
“지금은 상대도 경계를 하고 있을 겁니다. 바탈리온 부대원들은 그랜드 마스터의 경계를 뚫고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엘리오 라고아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타협? 지금 놈과 타협을 하라는 것이냐?”
테오 스타우런 후작이 황당한 눈으로 참모장을 보았다.
“물론 어려우시겠지만 지금 당장 엘리오 라고아를 저지할 방법이 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페로무로스를 점령하려면 바탈리온 부대가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면 군단장님의 경호에 차질이 생기지 않습니까?”
“끙!”
테오 스타우런 후작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고민이다.
바탈리온 부대가 자신에게 묶여 있으면 전선이 이대로 고착된다.
황태자가 그 사실을 알면 펄펄 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제2, 제3의 바탈리온 부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그저 그런 대귀족 중에 하나가 되고 말 터였다.
“원정군의 작전에 차질이 없으려면……. 바탈리온 부대를 선봉에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엘리오 라고아와 타협해야 합니다. 갑자기 황태자 전하로부터 ‘페로무로스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테오 스타우런 후작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치욕스럽지만 그때는 황태자에게 전후 사정을 아뢰고 ‘살려 달라’ 빌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 황태자의 발목을 잡으면 지금까지 세운 공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네가 미노스로 가서 라고아를 만나야겠다. 그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해라. 우선은 시간을 좀 벌어야겠다.”
“알겠습니다.”
군단장의 지시에 커트 바르트너 자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그는 휘하의 참모 하나를 데리고 즉시 강철 군단을 떠났다.
두 사람은 쉬지도 않고 미친 듯 말을 달려 자정쯤 미노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엘리오 라고아가 머무르는 샬레 앞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