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48
1348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잖아
페로무로스 동부.
미노스.
크라시온을 떠난 파비안이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머무르던 샬레(남부의 산장)에 도착한 건 오후 1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그는 샬레의 문을 열며 머리를 안쪽으로 살짝 집어넣었다.
“계십니까?”
그러자 등 뒤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 어머나, 파비안 님이시네요?”
파비안이 계면쩍은 얼굴로 돌아서 샬레 관리인인 하이디 씨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예, 접니다. 라고아 경은 어디 가셨습니까?”
“오늘 아침에 멀리 다녀오실 데가 있다고 나가셨어요. 저녁때에나 돌아올 거라고 하셨는데……. 길이 엇갈렸나 보다.”
“그래요? 그럼, 안에서 기다리죠 뭐.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죠?”
“마을에 노점상들이 조금 늘어난 것밖에는 딱히…….”
“노점상요?”
“그게 그러니까…….”
하이디가 막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으려 할 때다.
제국군 1개 소대가 샬레 앞으로 빠르게 달려와 진형을 갖추었다.
제국군을 본 하이디 씨는 슬그머니 왔던 길로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우두커니 서 있는 파비안에게 기사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나는 36사단 전갈 중대 1소대 소대장 라쿤 보어 남작이오. ‘적과 내통한 죄’로 그대를 체포하라는 원정군 참모장님의 명령을 수행 중이오.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응해 주면 고맙겠소.”
“적과 내통했다고요? 내가?”
“그렇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내가 크라시온에서 온 것은 사실이지만…… 제국이나 남부 왕국 어디 편에도 서지 않았습니다. 나는 북부 왕국의 기사로, 제국과 남부 왕국 어디든 자유롭게 오갈 권리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변호는 총사령부로 가서 하시오. 나는 말단 소대장으로 그대를 데려가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북부의 기사며, 제국과 남부 왕국 어느 쪽을 위해서도…….”
“체포해!”
라쿤 보어 남작의 명령에 제국군들이 파비안에게 몰려갔다.
파비안은 반사적으로 롱소드로 손을 뻗었지만, 차마 뽑지 못했다.
검방병 구십에 총병이 열 명이나 되니 저항할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제국군 둘이 좌우에서 파비안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라쿤 보어 남작이 파비안을 지나치며 말했다.
“잘 생각했소. 대귀족들의 의중에 달린 일이니 참고 기다려 보시오. 아직 죄가 확정된 것이 아니니 정중하게 모시거라.”
그 말에 파비안의 팔을 옥죄던 제국군의 손에서 슬쩍 힘이 빠졌다.
***
페로무로스 북부.
강철 군단.
늦은 오후, 강철 군단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앳된 얼굴을 했지만 실제로는 청년기를 조금 넘긴 엘리오다.
“조용하네.”
지난번에는 제국군이 쉬지 않고 드나들더니 지금은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입구가 통나무 끝을 날카롭게 깎은 거마창(拒馬槍)으로 막힌 걸 보니 사람이 없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강철 군단 뒤에 숨으시겠다? 그럴 거면 나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남을 죽이려고 할 때는 자신의 목숨도 거는 게 당연하다.
엘리오는 품 안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흑운차일(黑雲遮日)의 술법을 쓰려는 것이다.
하늘하늘 날아가던 부적이 불길에 휩싸이더니 이내 재가 되어 흩날렸다.
곧이어 맑기만 하던 하늘이 이상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뭉글 뭉글 뭉글.
강철 군단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삽시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되었음에도 엘리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전투 중에 자신의 이형환위를 예측한 총사들의 능력을 생각하면 흑운차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테오 스타우런 후작만 죽이고 빠져나오려면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는 나직이 공허법의 술법 주문을 읊조렸다.
“텅 빈 것은 형태가 없으니 보이지 않는다[空虛無象不見視]. 하늘과 땅이 하나의 색이니 볼 수 없다[乾坤一色看不見]. 법처럼 빨리 집행되어라[急急如律令 娑婆詞].”
주문이 끝나는 순간, 그의 몸이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강철 군단 사령부 작전실.
갑자기 먹구름이 새카맣게 몰려들자 참모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참모들 모두가 이런 기상 이변은 난생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대처법을 찾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군단장 테오 스타우런 후작이 소리쳤다.
“참모장! 남부에서 지금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 적 있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먹구름이 끼는 일은 흔하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먹구름 정도가 아니잖나! 참모장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고!”
참모들 중에 누군가 등불을 켜자 겨우 사람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등불이 하나뿐인지라 주변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에 참모들은 밝힐 만한 걸 찾아오라고 가까이 있던 호위 기사들을 닦달했다.
사령부 작전실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 중 절반이 빠져나갔다.
그래도 불안해 하는 참모들은 없었다.
34, 35 예비 사단에서 데리고 온 총사들이 사령부 작전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기사보다 총사가 더 믿음직하게 변해 버렸지만,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그걸 말하지 않았다.
엑시티움이 아직 일반 부대에 널리 보급되지 않은 까닭이다.
총사들만 육감이 발달한 게 아니다.
사령부 작전실 앞을 철통같이 지키던 호위 기사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프랭크.”
그러자 그와 나란히 서 있던 기사가 긴장한 어조로 되물었다.
“왜?”
“누군가 다가오는 것 같지 않나?”
“뭐가 보이나?”
“아니……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글쎄, 난…….”
중얼거리던 프랭크는 오싹한 느낌에 롱소드를 뽑으려 했다.
그때 뭔가 그의 어깨와 목 부위를 연달아 눌렀다.
순간 프랭크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이윽고 몸을 감춘 엘리오가 석상이 된 호위 기사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사령부 작전실 문이 저 홀로 열렸다 닫혔다.
순간 사령부 작전실 안쪽에 있던 총사들의 마력총이 불을 뿜었다.
퍼퍼퍼퍼퍼펑―!
여섯 개의 붉은 빛줄기가 출입구를 향해 뻗어 갔다.
깜짝 놀란 참모들이 롱소드를 뽑아 들고 군단장 주위에 몰려들었다.
엘리오는 이형환위를 펼침과 동시에 들고 있던 동전을 날렸다.
쉬쉬쉿―!
일 쿠퍼짜리 동전에 이마를 맞은 여섯 명의 총사가 맥없이 허물어졌다.
곧이어 출입구 반대편에 엘리오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뒤늦게 탁자 중앙에 놓인 등잔불이 꺼질 듯 몇 차례 일렁였다.
군단장과 참모들의 그림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참모들 뒤에 서 있는 테오 스타우런 후작에게 엘리오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다 데리고 가시게?”
참모들은 숨 소리도 내지 않고 군단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를 죽이면 너는 제국의 적이 될 것이다.”
기대와 동떨어진 답에 참모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이 뭐 대단하다고? 어차피 전쟁에서 패배하면 남부 왕국들처럼 조각조각 날 텐데. 그때는 오히려 공왕들이 도와 달라고 나에게 손을 내밀걸?”
“…….”
엘리오 라고아의 반박에 테오 스타우런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공국들이 독립하면 그렇게 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빠드득 이를 갈던 스타우런 후작이 빽 소리쳤다.
“왜냐! 도대체 왜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냐 말이다! 내 아들을 죽인 것으로도 부족하더냐!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느냐!”
“자식의 극악한 범죄를 별일 아닌 것처럼 무마하려 했잖아. 당신이 남부 왕국 주민들을 개돼지 취급한 걸 잊었어?”
“그들을 개돼지 취급한 게 아니라, 제국 시민과 왕국 주민의 신분이 다름을 말한 것이다! 귀족과 평민이 다른 것처럼! 제국 시민과 왕국 주민의 가치는 다르단 말이다! 그것이 제국법이거늘 어찌 나만 잘못됐다 말하느냐!”
“야아! 대귀족이라고 말 잘하는 거 봐. 그래, 법적인 권리는 조금 차이가 있겠지. 그런데 당신은 죄 없는 왕국 주민들의 죽음을 당연한 것처럼 말했잖아. 마치 개돼지가 죽은 것처럼 말이야. 당신이 아들의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지금과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러자 테오 스타우런 후작은 즉시 태도를 바꿨다.
“네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냐? 인정하마! 내 아들, 스콜피언 중대의 중대장 행크 스타우런 남작은 죄 없는 남부 주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탈취했다. 스콜피언 중대의 사건 기록에도 그와 같이 기술하겠다! 이제 됐느냐?”
테오 스타우런 후작은 살아남기 위해 사망한 아들의 명예를 포기했다.
스타우런 후작가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겠지만 그게 죽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워 스타우런 후작가의 불명예를 덮으면 된다.’
스타우런 후작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살아남아야 했다.
하지만 이어진 엘리오 라고아의 말에 테오 스타우런 후작은 치를 떨었다.
“늦게라도 죄를 인정한다니 다행이군. 하지만 그건 죽을 정도의 죄가 아니야.”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느냐?”
“나를 죽이려 했잖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하늘의 법이야.”
“누가 그런……. 헉!”
말을 하던 테오 스타우런 후작은 동전 하나가 빛살처럼 날아오자 급히 상체를 틀었다.
그와 동시에 참모장 커트 바르트너 자작의 검이 동전을 갈랐다.
챙―!
엘리오는 연속으로 동전을 날렸다.
쉬쉬쉿―!
참모장과 참모들이 반사적으로 동전을 쳐 냈다.
그 틈에 엘리오는 마하담에서 ‘공허의 검’을 꺼내 들었다.
뒤이어 엘리오의 영기가 사령부 작전실을 가득 메웠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강한 압박에 참모들이 비칠거렸다.
소드 익스퍼트인 그들에게 그랜드 마스터의 기운은 재앙과도 같았다.
총사들이 모두 쓰러진 지금 엘리오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소드마스터인 테오 스타우런 후작은 참모들 뒤에서 기회를 엿봤다.
‘한 번의 틈이면 된다.’
한편 엘리오는 무의미한 살생을 피하고자 가볍게 검을 흔들었다.
검끝에서 일어난 광풍에 참모들이 폭풍을 만난 풀잎처럼 누웠다.
삽시간에 앞이 훤하게 비워지자 테오 스타우런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애석하게도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쓰러진 참모들을 집어 던질 수도 없는 노릇.
최후를 직감한 그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너는 내가 권력으로 사람들을 개돼지 취급했다 비난하지만! 너 역시도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개돼지 취급하고 있음을 모르느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잖아.”
말과 함께 엘리오가 벼락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뒤이어 테오 스타우런 후작과 엘리오의 검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챙! 챙! 챙―!
두 개의 검이 맞닿을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엘리오가 테오 스타우런 후작과 싸움에 돌입하자 쓰러졌던 참모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모들은 재빨리 눈빛을 교환한 뒤 엘리오 라고아에게 달려들었다.
엘리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콰자자작―!
눈 깜짝할 사이에 참모들의 검이 박살 났다.
뒤이어 밀려온 잠력에 참모들의 몸이 낙엽처럼 뒤로 훌훌 날아갔다.
우당탕! 쿵쾅―!
중앙 탁자가 뒤집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등잔이 박살 났다.
화르르륵―!
등잔 기름으로 인해 불길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뒤늦게 참모들이 불을 끄려 했지만,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엘리오와 테오 스타우런 후작의 싸움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쩡―!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테오 스타우런 후작의 롱소드가 잘렸다.
그 기세대로 쭉 뻗어나간 엘리오의 검이 테오 스타우런 후작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테오 스타우런 후작의 목에 핏빛 줄이 생기는가 싶더니 이내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군단장인 테오 스타우런 후작이 죽자 참모들은 서둘러 사령부 작전실을 빠져나갔다.
강철 군단을 덮고 있던 시커먼 먹구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사령부 작전실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앞이 보이지 않았다.
착잡한 얼굴로 죽은 테오 스타우런 후작을 내려다보던 엘리오는 이내 바닥을 박차고 일직선으로 날아올랐다.
콰드드득―!
사령부 건물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른 엘리오는 동쪽으로 날아갔다.
건물 지붕에 구멍이 뚫리자 불길은 더욱 거세게 퍼져 나가, 이내 목조로 지어진 강철 군단 사령부 전체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