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49
1349회. 진짜 이유가 뭡니까?
강철 군단을 벗어난 엘리오는 도시가 보이자 즉시 지상으로 내려갔다.
물론 역마차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길눈이 어두운 그에게 남부의 광활한 산림은 혼돈 그 자체인 까닭이다.
도시에 들어가니 자신이 역마차에서 내린 바로 그 페로무로스 북부의 도시다.
운이 좋았다.
흡족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그는 어렵지 않게 역마차 사무소를 찾아갔다.
한 시간 전에 왔던 곳이라 헤매려야 헤맬 수 없는 곳이다.
이윽고 엘리오는 페로무로스 동부행 역마차표를 산 뒤 대기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
페로무로스 동부.
미노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갬비슨(누비 갑옷)을 입은 한 청년이 미노스 외곽의 산지 마을로 들어섰다.
남부에 어울리지 않는 갬비슨이건만 청년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마을을 지나던 청년, 엘리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침만 해도 발에 차이던 노점상들이 절반 이상 푹 줄어 있었기 때문이다.
‘곧 저녁이라 철수한 건가?’
그런데 공교롭게 남아 있는 노점상 대부분이 허름한 옷차림의 원주민들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엘리오는 대범하게 넘겼다.
자신을 노리는 총사나 총병만 없으면 된다.
그는 슬쩍 영기를 방사해 근처에 불온한 기운이 있는지 살폈다.
없다.
없으면 된 거다.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샬레(남부의 산장)에 이르렀다.
엘리오가 삐꺽 소리를 내며 나무 계단을 오를 때 샬레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곧이어 관리인 하이디가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흡사 도둑 같은 그녀의 행동에 엘리오가 멈칫했다.
곧이어 엘리오와 눈이 마주친 하이디가 깜짝 놀란 얼굴로 속삭였다.
“아이고, 어서 와요. 빨리 들어와요! 빨리!”
다급한 그녀의 손짓에 엘리오는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왜요? 미노스에 남부 왕국군이 쳐들어왔어요?”
하이디 씨의 겁먹은 모습을 본 엘리오는 그렇게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을 깬 것이었다.
“낮에 파비안 님이 돌아왔는데……. 바로 제국군에 잡혀갔어요.”
“파비안이 제국군에 잡혀갔다고요?”
엘리오는 처음에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제국군이 왜 북부의 귀족을 잡아간단 말인가?
자신은 물론 북부 왕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라더라…… ‘적을 이롭게 한 죄’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런 죄목으로 잡혀갔어요.”
“어디로 잡혀갔는지는 알아요?”
“몰라요. 제국군이라는 것밖에. 미노스에 있는 큰 부대가 아니겠어요?”
엘리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가 말한 큰 부대란 제국군 32사단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접점이 없던 32사단에서 왜 갑자기 파비안을 체포해 갔을까?
그보다는 오히려 페로무로스 북부의 제국군 정보부나, 페로무로스 북서부에 주둔하고 있는 원정군 총사령부가 움직였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32사단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제국군 정보부의 요청으로 32사단이 움직였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가까이에 있는 32사단을 방문해 봐야겠구나.’
그런데 ‘적을 이롭게 한 죄’가 뭔지 모르겠다.
생각에 잠긴 엘리오의 귓가에 하이디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녁 식사 하셔야죠?”
“아니요. 저녁은 간부 식당에 가서 먹겠습니다.”
“간부 식당요? 미노스에 새로 생긴 식당인가요?”
“아뇨. 램지에 있는 부대에 가서 먹으려고요.”
“아!”
하이디는 더 묻지 않고 요리 재료들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 담았다.
엘리오는 더 늦기 전에 샬레를 떠났다.
***
램지 마을.
코르보 마법 병단 주둔지.
엘리오는 32사단에 가기 앞서 킬리언 헤일 공작을 만날 생각이었다.
‘적을 이롭게 한 죄’가 뭔지 궁금해서다.
때마침 코르보 마법 병단의 저녁 식사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한 그는 킬리언 헤일 공작 등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되었다.
식사가 막 시작될 즈음 킬리언 헤일 공작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아침에 페로무로스 북부로 갔다고 들었는데 금방 왔군. 갔던 일은 잘 마무리됐나?”
“예.”
엘리오가 단답형으로 답하자 킬리언 헤일 공작이 더 물었다.
“어떻게 마무리했나?”
“강철 군단의 손실은 피하고, 스타우런 후작만 손을 봤습니다.”
“혹시 죽였나?”
“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도 사람을 죽인 일이라 엘리오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황태자 측에서는 별말이 없었고?”
“복수는 해도 괜찮은데, 전쟁이 끝나면 하라고 하더라고요.”
“허! 황태자가 스타우런 후작을 포기할 줄은 몰랐는데……. 놀랍군.”
“저도 황태자가 너무 쉽게 놓아줘서 조금 당황스럽더라고요.”
“대안이 있으니 그런 걸 테지.”
“대안요?”
“권력자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들끓는다네. 황태자라면 말할 것도 없지.”
게다가 황태자의 무기는 ―평범한 총병을 최강의 전사로 만들어 주는― 엑시티움이다.
사병을 거느린 대귀족들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그렇겠네요.”
엘리오는 킬리언 헤일 공작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그 일로 황태자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걸세. 어쩌면…… 백작을 노릴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상의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내가 마법사라도 큰 기대는 하지 말게. 요즘 마구스(7서클 대마법사)의 대우가 예전 같지가 않아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건 사실이었다.
엑시티움이 보급되면서 소드마스터와 마구스의 지위는 눈에 띄게 내려갔다.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놀랍게도 과거에 찬밥이었던 총사였다.
과거에 총사가 ‘마나의 축복’까지 받았지만 근접전이 두려워 칼 대신 마력총을 선택한 다소 한심한 사람이었다면, 엑시티움이 보급된 지금은 소드마스터나 마구스보다 유용한 존재로 떠올랐다.
심지어 제국의 아카데미에는 벌써부터 기사학부, 마법학부에 이어 총사학부가 만들어졌을 정도다.
“파비안이 오늘 낮에 미노스의 샬레에서 제국군에 체포됐습니다.”
“…….”
뜻밖의 말에 킬리언 헤일 공작인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제국군이 북부의 귀족인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을 체포하다니?
지금 전황에서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당장 그랜드 마스터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북부 왕국들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죄명이 뭐라던가?”
“적을 이롭게 했답니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근 파비안이 크라시온을 다녀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음. 애매하군.”
킬리언 헤일 공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북부의 귀족이 아드리아 왕국의 왕성에 다녀온 건 죄가 되지 않는다.
평소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강철 군단의 군단장인 스타우런 후작을 죽인 지금은 다르다.
“혹시 제가 스타우런 후작을 죽인 일로 그러는 걸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높네. 백작이 황태자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 사실이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기다려 보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알아봐야 하니.”
“제국군 정보부가 아니면 황태자일 겁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걸 진두지휘한 사람이 있을 걸세. 지금은 실무자를 알아내 만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하네.”
“누가 진두지휘를 했더라도 최종 결정권자는 황태자일 겁니다. 그가 허락했으니 북부의 귀족을 체포한 거겠지요. 그래도 황태자라고 신사적으로 대했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네요.”
‘신사적’이라는 말에 킬리언 헤일 공작은 할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지금 흥분한 라고아 백작을 자극해 봐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다.
막말로 그가 총사령부에 쳐들어가 황태자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제국은 헤어나기 어려운 수렁에 빠져들 터였다.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기다려 보게. 내가 클라우드 남작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누가 그 일을 주도했는지 알아보겠네.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알 수 있을 걸세. 그때까지는 답답해도 참으시게.”
“아침이면 알 수 있습니까?”
생각보다 빠른 시간이라 엘리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페로무로스 인근에 있는 부대의 일은 내 눈을 피할 수 없네.”
킬리언 헤일 공작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마법사의 지위가 추락했다 해도 코르보 마법 병단의 단장이자, 제국 공작의 정보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지휘관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은 공작님을 믿고 돌아가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오지 말게. 괜히 먼저 와서 기다릴 것 없네. 소식이 들어오면 내가 백작의 거처로 찾아가겠네.”
“어디 있는지 아시지요? 지난번의 그 샬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알겠네.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백작에게 달려갈 테니…… 행여나 답답하다고 다른 일을 벌이지는 말게. 클라우드 남작을 안전하게 빼내는 일이 먼저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야 당연하죠.”
엘리오도 그럴 생각이었다.
자신도 죽이려고 드는 마당에 파비안이라고 곱게 내버려 둘까.
괜히 상대를 자극했다가 자칫 파비안이 죽거나 다칠 수도 있었다.
뒷일을 킬리언 헤일 공작에게 맡긴 엘리오는 식사를 마치고 미노스로 돌아갔다.
***
페로무로스 북서부.
원정군 총사령부.
총사령부로 사용되는 치안대 건물 지하실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미노스에서 ‘적을 이롭게 한 죄’로 체포된 파비안과 조사관 카림 브리츠 남작이다.
카림 브리츠 남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아드리아 왕국의 왕성인 크라시온에는 무슨 목적으로 갔나?”
“몇 번을 말합니까. 라르바 오마르 백작님 일행을 만나러 갔습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크라시온에서 남부 왕국의 대귀족들과 연일 회동을 하고 있다. 남부 왕국의 대반격 작전에 관여되었나?”
“그게 뭡니까?”
“남부 왕국들이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남작 역시 크라시온에서 남부 왕국군 중대장과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던데, 모르는 일인 것처럼 발뺌을 하는군. 그래 봐야 남작의 진술에 대한 신뢰성만 떨어질 뿐이다.”
“대반격은 모르겠고, 내가 남부 왕국군 중대장과 만난 건…….”
“만난 건?”
“단지 마음이 통해서였습니다. 형 동생 하기로 했거든요. 타지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파비안은 ‘혼란의 선봉장’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사적인 만남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 닳고 닳은 조사관에게 통할 리가 없다.
“마음이 통하는 중대장을 만났으면 제국군에 대한 정보도 넘겼겠군.”
“이야기가 왜 그리로 갑니까? 그냥 사사로운 만남이라니까요?”
“남작이 있던 페로무로스 동부에 32사단과 코르보 마법 병단이 주둔해 있다. 32사단과 코르보 마법 병단의 정보를 남부 왕국군 중대장에게 넘겼나?”
“오히려 중대장 형님에게 남부 왕국군에 대한 자랑을 주로 들었는데요?”
“대화는 항상 주고받는 것이다. 제국군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나? 없나?”
“없는데요?”
파비안이 지겨운 얼굴로 조사관을 보았다.
바보가 아니라면,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없다고 말할 터였다.
어떤 대답을 할지 뻔히 알면서도 집요하게 묻는 저의를 모르겠다.
서류에 뭐라고 열심히 적어 나가는 조사관을 보던 파비안이 물었다.
“솔직히 나보다 남부 왕국군 지휘관들이 제국군에 대해 더 잘 알 겁니다. 알다시피 나는 어비스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를 끌고 와서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진짜 이유가 뭡니까?”
조사관이 고개를 들어 올릴 때, 지하실 문을 열고 원정군 참모 랜드 게티 백작이 들어왔다.
“그 이야기는 내가 해 주지. 조사관은 나가 있어도 좋다.”
말이 ‘나가 있어도 좋다’지, 실은 자리를 비우라는 소리다.
조사관 카림 브리츠 남작은 원정군 참모에게 군례를 올린 후 조용히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