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56
1356회.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않느냐
엘리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무너진 벽 너머의 도시를 보았다.
지금까지 겪은 어떤 전쟁터보다 더 파괴적이다.
구주(九州)에서도 대규모 전쟁을 경험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비처럼 쏟아지는 마력포탄에 건물들이 부서지거나 폭삭 무너져 내렸다.
물론 이세계에서 몇 번 전선을 통과한 적은 있다.
그때도 마을에서 파괴된 건물들을 보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도시를 점령한 제국군도 마력포를 쏘아 올렸지만 물량에서 상대가 안 됐다.
쏘아 올려지는 마력포가 조금씩 줄어들더니 급기야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도시를 향해 떨어지는 마력포탄은 줄어들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콰앙―!
엘리오가 있는 건물 주변으로도 쉼 없이 마력포탄이 떨어졌다.
파편이 튈 때마다 엘리오의 몸은 반사적으로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덕분에 파비안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됐다.
파비안이 들고 있던 국수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배는 아직 고팠지만 돌가루가 쌓여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부 왕국군의 대반격이 시작된 모양입니다.”
“끔찍하네. 페로무로스에도 제국군이 이렇게 쏟아부었을 거 아냐?”
“거기는 더 박살 났을 겁니다.”
거리로 몰려나온 제국군은 북쪽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후퇴라기보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났다’는 표현이 옳다.
달아나는 제국군들 위로 쉬지 않고 마력포탄이 떨어져 내렸다.
제국군은 무수한 시체만 남기고 도시에서 떠나갔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포성이 그쳤다.
그리고 각기 다른 복장의 남부 왕국 연합군이 도시로 진입했다.
질서 정연하게 들어오는 남부 왕국 연합군을 본 엘리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남부 왕국도 강하네.”
“제국 전쟁에 패한 뒤로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았다고 하더라고요. 엑시티움만 아니면 제국에 밀리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 페로무로스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겠지?”
“그럴 겁니다. 엑시티움에 맞설 신무기가 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물어본다고 가르쳐 주겠냐?”
“라고아 경은 왕국 최고의 기사니까 혹시 모르죠. 우리 북부와 남부 왕국은 동맹 아닙니까.”
“찔러나 볼까? 어차피 신무기 제작자와 판매자를 조사해야 하니까.”
“가르쳐 줄 겁니다.”
파비안은 남부 왕국 연합군이 선선히 정보를 공개할 것으로 믿었다.
대반격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대반격이 시작된 마당에 감추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나 말이다.
남부 왕국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거리에 널린 시체를 모아서 태우는 것이었다.
남부의 더위를 생각하면 그러는 게 당연했다.
깊은 밤중에 도시 곳곳에서 메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인 이상 잠을 자야 한다.
남부 왕국군 병사들 일부는 공터 곳곳에 막사를 세웠고, 지휘관들은 사용이 가능한 숙박업소를 찾아다녔다.
엘리오와 파비안이 있는 곳으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다가왔다.
기사들의 선두에 있던 사신 부대 소대장 캐스퍼 홀드가 두 청년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이 전쟁통에 남부 왕국군을 보고 달아나지 않은 걸 보니 용병이나 모험가 같았다.
평소라면 모를까?
전시에 용병과 모험가는 주민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대우를 받는다.
당연히 티팝(남부의 숙박업소)의 방이 부족하면 쫓아낼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남부 왕국군 기사들 앞에서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다?
‘방이 많다 이건가?’
캐스퍼 홀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곧 밖으로 쫓겨날 처지에 저리 태연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잠시 후 건물 안쪽에서 중년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그는 눈알을 굴리며 남부 왕국군의 눈치만 살폈다.
캐스퍼 홀드가 티팝 주인에게 말했다.
“나는 남부 왕국군 사신 부대의 기사 캐스퍼 홀드다. 중대장이신 에반 로어 남작님과 소위들이 묵을 방 다섯 개가 필요하다.”
“저희 티팝에 사용할 수 있는 방이 다섯 개가 있습니다만……. 하나는 저기 계신 모험가님들에게 이미 내어 주어서…….”
티팝 주인이 말을 흐렸다.
그는 모험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에 슬쩍 발을 뺐다.
앙심을 품은 모험가들이 나중에 찾아와 시비를 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캐스퍼 홀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몸을 돌렸다.
“어디의 모험가들인지 모르지만 어떤 상황인지 알겠지? 식사도 끝난 것 같은데, 짐이 있다면 챙겨서 떠나도록 해라.”
캐스퍼 홀드의 말에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힐끔 보았다.
떠날지 남을지를 결정할 사람이 그인 까닭이다.
엘리오는 누가 자신을 건드리면 반드시 응징하지만, 먼저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히르헤라에서 중대장 생활을 해 봐서 하급 지휘관의 고달픔도 안다.
그런 이유로 그는 군말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쟁으로 인한 피로를 생각하면 자신이 양보하는 게 맞았기 때문이다.
파비안도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일어나자,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역시 북부 왕국 영지군 중대장 출신으로 동맹인 남부 왕국 지휘관들에게 방을 양보하는 것에 딱히 반감은 없었다.
티팝의 주인이 엘리오와 파비안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했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웃으며 ‘괜찮다’ 받아 주고 돌아섰다.
끝까지 훈훈한 마무리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세상에는 강약약강(強弱弱強)인 사람이 있다.
중대장의 부관이자, 기수(旗手)인 버나드 허트가 그랬다.
그는 젊은 모험가들이 주인장의 사과를 받는 그 자체가 못마땅했다.
만약 저 모험가들에게 든든한 뒷배가 있었다면 이렇듯 선선히 물러났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좆도 아닌 것들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놀고 있네.’
한편으로 주인장이 지휘관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그러는 것도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듯 ‘죄송하다’고 굽실거릴 이유가 없었다.
이래서야 지휘관들이 남의 것을 강탈한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그는 불편한 마음을 모아 툭 내뱉었다.
“팔자 좋은 친구들이군. 누군 전쟁터에서 피땀을 흘리는데 한가하게 여행이나 다니고 말이야.”
앞서가던 엘리오가 멈칫하자 파비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버나드 허트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젊은 친구. 밤길 조심하라고. 우리야 기사도를 아니까 그냥 보내 주지만, 모든 군인들이 우리 같지는 않으니까. 후후.”
파비안은 다른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지금 방까지 내준 사람들에게 악담을 하는 겁니까?”
“악담이 아니라 조언이지. 젊은 사람 성격이 그렇게 예민하면 못 써. 일행이 기다리잖아, 얼른 가 봐. 훠이!”
뭔가를 쫓아내는 마지막 손짓까지,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조롱이다.
그때 기어이 엘리오가 돌아섰다.
그의 시선은 버나드 허트가 아니라 다른 지휘관들에게 가 있었다.
이윽고 엘리오의 입이 열렸다.
“당신들도 저 기사와 같은 의견입니까?”
엘리오의 도발적인 말투에 중대장 에반 로어 남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버나드 허트가 병신 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모험가의 반응은 지나친 것이었다.
전시에 남부 왕국군 지휘관들 앞에서 저런 시건방진 태도라니?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험가들의 행색을 살폈다.
남부에서 흔치 않은 갬비슨(누비 갑옷)을 입었는데, 얼마나 관리를 안 했는지 꾀죄죄했다.
그렇다고 마음 놓을 수는 없다.
간혹 대귀족들 중에 별종들이 저러고 떠돌아다니기도 하니 말이다.
“그대는 남부 왕국의 대귀족이오?”
이건 어디까지나 확인차 던진 질문이었다.
속이 훤히 보이는 물음에 엘리오가 답했다.
“나는 남부 왕국에서 봉작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답은 뭡니까?”
그러자 에반 로어 남작이 눈을 찡그렸다.
대귀족도 아닌 한낱 모험가가 뭘 믿고 저렇게 뻣뻣한지 모르겠다.
은근 짜증이 난 에반 로어 남작은 자신의 부관인 버나드 허트의 편에 섰다.
“오랜 전투로 지쳐서 그런 것이니 그대가 이해해라.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않느냐. 우리가 제국군과 싸울 때 너희는 무엇을 했느냐?”
“누가 제국군과 싸우라고 등 떠민 적 있습니까? 아니면 제국군이 강철 골렘을 노리고 쳐들어오기라도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대수림 인근의 몇몇 남부 왕국들이 강철 골렘을 독점하려고 욕심부리다가, 결국 전쟁까지 터진 거 아닙니까? 우리가 싸울 때 너희는 뭘 했냐고요? 어비스를 탐험하고 나왔습니다. 왜요? 문제 있습니까?”
엘리오의 말에 중대장 에반 로어 남작은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의 원인을 남부 왕국이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이토록 대범하게 남부 왕국군 앞에서 떠들다니!
뼈를 때리는 대답에 중대장이 눈을 끔뻑일 때, 버나드 허트가 버럭 소리쳤다.
“제국이 일으킨 전쟁의 책임을 남부 왕국에 돌리다니! 이것은 명백한 반역이다! 너는 누구냐! 출신지와 이름을 밝혀라!”
엘리오가 기막힌 얼굴로 싸가지 없는 기사를 보았다.
남부 왕국군 입에서 반역 소리까지 나왔으니 조용히 떠나기는 틀렸다.
“아니 제국군 참모들도 그러더니만 왜들 북부 기사인 나한테 자꾸 반역이래? 파비안, 내가 누군지 가르쳐 줘라.”
그러자 파비안이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귀족식으로 인사를 한 후에 말했다.
“출신지와 이름을 궁금해 하시니 소개하겠습니다. 대륙을 지키는 스쿠툼(빙벽)의 수호자! 북부 슬래시 랜드와 로렌 공국 라티누스의 적법한 지배자! 검의 적자(嫡子)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랜드 마스터! 천공성과 어비스의 신비를 파헤친 위대한 모험가! 엘리오 라고아 백작님이십니다!”
“…….”
한순간 티팝에 적막이 감돌았다.
사신 부대 중대장과 소위들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두 청년 모험가를 살폈다.
파비안이 버나드 허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젊은 친구가 아니라, 에스카토스 왕국의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이다. 남부가 북부의 동맹이라면 예를 갖추도록.”
그제야 중대장과 소위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만에 하나 정말 모험가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라면 큰 실례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중대장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군례를 올렸다.
“백작 각하. 몰라뵙고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엘리오는 무심한 눈으로 남부 왕국군 지휘관들을 응시했다.
제국 백작의 작위를 반납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황제의 재가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딱히 호칭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내가 누군지 몰랐으니 결례라고 할 건 없고. 나는 북부의 기사니 남부에서 무슨 말을 해도 반역은 아니야. 무슨 뜻인지 알지?”
남부 왕국군의 태도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엘리오는 바로 하대를 했다.
“예? 예!”
“그리고 참고로 한마디 하지. 조금 전에 누가 말하기를 ‘다른 남부 왕국의 부대는 그냥 보내 주지 않을 테니 밤길 조심하라’고 했는데 말야.”
“그, 그건, 평소 아무 말이나 막 해 대는 정신 나간 놈의 헛소립니다.”
“그 헛소리에 당신은 틀린 말도 아니라고 했지.”
“……요, 용서해 주십쇼.”
중대장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반발심에 그 병신 같은 놈을 지지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여하튼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거야. 내 뒤를 노리는 놈들은 죄다 이리로 보내 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엘리오가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켰다.
“예, 예.”
굽실거리던 중대장은 몇 번이고 사죄를 한 다음 티팝을 떠나갔다.
엘리오는 굳이 그를 잡지 않았다.
신분이 드러난 마당에 저들에게 방을 양보하는 것도 우스웠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소도시 세르보를 점령한 남부 왕국군 지휘관들이 티팝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