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57
1357회. 공국 하나쯤은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참모장 이코프 사이하 자작이 참모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십 대로 보이는 금발의 미녀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녀는 티팝(남부의 숙박업소)의 무너진 한쪽 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티팝 안에는 오직 두 명의 청년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청년들의 복장을 확인한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정말 갬비슨(누비 갑옷)을 입었구나.’
이 무더위에 갬비슨이라니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편으로 북부 기사들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져 조금 부담이 됐다.
청년들이 힐끔 돌아보자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식사 중에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는 아드리아 왕국 스컬 군단의 참모인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입니다. 두 분은 북부에서 오신 엘리오 라고아 백작님과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님이 맞으십니까?”
흔히 볼 수 없는 미녀가 묻자 파비안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입니다. 이쪽 분이 엘리오 라고아 백작님이시고.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러자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먼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컬 군단 군단장이신 디폰 코넬리아 백작께서 북부의 영웅인 라고아 백작님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탁자 위를 슬쩍 살폈다.
운이 좋았다.
접시들이 빈 것을 보니 식사를 막 끝낸 것 같았다.
“군단장님께서 지금 티팝 앞에 와 계십니다. 결례가 아니라면 지금 모시고 들어와도 되겠습니까?”
파비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됩니다. 되고말고요.”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은 확인하듯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하급 귀족인 클라우드 남작이 대귀족인 백작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답하니 반사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엘리오는 여자가 자신을 보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은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모시고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묵례를 한 뒤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파비안이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엘리오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너 언제 정신 차릴래?”
“왜요? 정신 마법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습니까?”
“여자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서 그런다.”
“제가요? 그럴 리가요. 전혀 아닙니다.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저를 여자에게 환장한 놈으로 몰아가지 마십쇼.”
“그게 그거 아니냐?”
“아니죠. 아름다운 숙녀에게 눈이 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본래 자연의 이치가 그런 겁니다.”
“아휴. 말을 말자. 세라 양에게 편지는 보냈냐?”
“지난번에 뭐라고 하셔서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답이 오겠습니까?”
엘리오가 ‘왜 답이 안 올 거라 생각하냐?’ 물으려는 순간, 무너진 벽을 통해 스컬 군단 지휘관들이 들어왔다.
남부 왕국 대귀족의 방문에 엘리오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모인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이 중간에서 양측을 소개했다.
서로 간에 인사가 끝나자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은 군단장의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남작에 불과한 파비안도 눈치껏 슬쩍 뒤로 빠졌다.
자연스럽게 디폰 코넬리아 백작과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마주 앉았다.
소드마스터인 디폰 코넬리아 백작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북부의 살아 있는 전설인 라고아 백작 각하를 이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별말씀을. 그런데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본래 사교적이지 못한 엘리오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디폰 코넬리아 백작은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남부 왕국에도 북부의 상황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히르헤라에서 하신 일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달려와 뵙기를 청했을 것입니다.”
“아하. 다른 용무가 있어서 온 것은 아니라는 거죠?”
“예.”
“다행이네요. 며칠 전 측근인 클라우드 남작이 제국군에 체포된 뒤로, 누굴 만나는 게 조심스러워서요.”
“헛!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제국군이 미쳤군요. 북부의 귀족인 각하께서 제국 백작 작위를 받은 것도, 사실은 전쟁에 관여하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랬죠.”
“남부 왕국도 알고 있는 것을……. 제국군이 왜 그런 무리수를 두었을까요? 더구나 남부 왕국군의 대반격을 앞두고 말입니다. 제국군 참모진들이 제 일을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도 궁금해서 황태자를 찾아가 따져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원정군 총사령부 참모장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더군요.”
“참모장요? 원정군 참모장이면 레이드 코스탁 후작이 아닙니까? 그 사람은 꽤나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왜 제 발등 찍는 일을 벌였답니까?”
“황태자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 보이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런!”
“최근 황태자의 최측근이 저를 죽이려다가 제 손에 죽었거든요. 그 일로 황태자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아!”
“저는 건드리지 못하고, 대신에 클라우드 남작에게 손을 댔던 거죠.”
“참모장의 지시로 그랬으면 클라우드 남작이 고생 좀 했겠습니다?”
“정신 마법에 조금 당했는데……. 원래부터 헛소리를 잘하던 사람이라, 후유증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허…….”
디폰 코넬리아 백작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어디부터 농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건 혹시 북부식의 농담인가?’
척박한 북부를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자학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디폰 코넬리아 백작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힐끔 보았다.
“제국과의 관계가 이전 같지는 않으시겠습니다?”
“제 고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데 바람이 그치질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고.”
“아아!”
디폰 코넬리아 백작은 ‘역시 야인 출신답게 비유가 참 자연적이다’라고 생각했다.
‘바람이 나무를 그저 흔들 뿐이라는 말인가.’
그 말은 ‘제국이 그를 흔들어도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다.
남부 왕국으로는 아쉽지만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철 골렘이 제 역할만 해 준다면 제국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다.
그가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엘리오가 대뜸 물었다.
“그런데 이제 남부 왕국의 대반격이 시작됐다고 보면 되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드리아 왕국뿐 아니라, 드니로프 왕국과 우름 왕국에 집결한 남부 왕국 연합군들도 아드리아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진정한 남부 왕국의 힘 앞에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남부 왕국들은 이 기회에 제국이라는 거대한 악을 해체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다시는 중부가 남부의 보물에 눈독을 들이지 못할 겁니다.”
엘리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남부의 보물은 물론 강철 골렘을 의미한다.
그걸 독식하기 위해 제국을 해체하겠다니 이 얼마나 큰 욕심이란 말인가.
“남부 왕국이 강철 골렘을 대거 가지게 되면……. 그때 가서 남부에 제국이 들어서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론디니움 제국도 처음에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했다.
그러다 정복 전쟁을 벌여 마침내 제국이 되었는데, 남부 왕국들도 분명히 같은 역사를 따라갈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지배하는 편이 낫지요.”
“…….”
노골적인 디폰 코넬리아 백작의 말에 엘리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이놈이나 저놈이나…….’
상계나 하계나 어째 사람들 하는 짓이 똑같은 것 같다.
“듣자 하니 남부 왕국에 신무기가 있다고 하던데……. 그것으로 제국의 엑시티움을 상대할 수가 있습니까?”
“허!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직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비밀인데.”
“크라시온에 저의 일행인 라르바 오마르 백작님이 계시잖습니까.”
“아아! 그러셨군요. 저도 그분을 크라시온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신다니 말씀드리지요. 남부 왕국은 마탑으로부터 아르테늄이라는 신물질을 구입했습니다.”
“아르테늄요?”
“엑시티움에 피격당해도 파괴되지 않는 불멸의 신물질이지요. 그것으로 강철 골렘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마탑에서 그런 걸 만들었다고요?”
엘리오는 기가 막혔다.
‘마법사들은 미친놈들인가?’
제국에는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인― 엑시티움을, 남부 왕국에는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인― 아르테늄을 팔았단다.
“마나 프트라스님께서 남부 왕국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뜻이겠지요. 제국이 무너질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각하께서도 이제는 동맹인 남부 왕국을 도우시는 게 어떻습니까? 각하의 능력이라면 전쟁이 끝나고 공국 하나쯤은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황제령을 가지시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만.”
디폰 코넬리아 백작은 은근슬쩍 라고아 백작의 회유를 시도했다.
소드마스터만 돼도 일인군단 소리를 듣는데, 상대는 그랜드 마스터.
가히 1개 집단군과 같은 무력을 가졌다고 봐야 한다.
기동력이 뛰어난 1개 집단군을 생각해 보라.
다소 불경스러운 표현이지만 전장에서 그랜드 마스터는 신이다.
론디니움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거 단축될 게다.
뒤에서 듣고 있던 파비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라고아 백작이 ‘제국의 작위를 반납하겠다’고 한 뒤로 라티누스(로렌 공국 영지)는 포기했다.
북부 슬래시 랜드의 차기 영주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가만 들으니 차기 왕이 될 수도 있는 분위기다?
‘돕겠다고 하십쇼!’
어차피 라고아 백작과 제국의 관계는 파탄 난 지 오래다.
특히나 황태자는 이번에 당한 치욕을 절대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아 백작이 떠난 뒤를 생각하면 제국은 사라져야 한다.
‘제발요!’
파비안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자신이 그 왕좌를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왕좌에 앉을 기회는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 아니던가!
한껏 들뜬 파비안의 귓가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황제가 저를 적대시하지 않는 한, 제가 이 전쟁에 뛰어들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차피 떠날 엘리오는 왕좌에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우샤스 운드라가 제국령에 있다면 그를 잡으러 제국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제국의 적이 되면 활동에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니 끝까지 중립을 지키는 게 나았다.
순간 파비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에이, 좋다가 말았네.’
운 좋게 왕좌에 앉으려나 했는데 기회는 번개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허탈해 하는 그에게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이 속삭였다.
“잠시 시간 좀 내실 수 있으세요?”
향긋한 미녀의 체향에 파비안의 심장 박동이 다시 빨라졌다.
“예.”
클라우드 남작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은 따라오라는 듯 손짓한 후 슬쩍 밖으로 나갔다.
파비안이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녀의 뒤를 따랐다.
군단장 디폰 코넬리아 백작은 비록 회심의 제안이 거절당했지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다.
그는 ―대반격의 선봉에 선 지휘관답지 않게― 누가 봐도 소소한 이야기들로 금싸라기 같은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엘리오는 아르테늄의 정보를 잔뜩 얻어 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30분쯤 지나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과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이 돌아온 뒤에야 끝났다.
아드리아 왕국군 지휘관들이 떠난 직후,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물었다.
“아까 어디 갔었냐?”
“예? 제가 가긴 어딜 갔다고 그러십니까?”
“그래? 내가 이야기하다 잠깐 둘러봤을 때 안 보이던데?”
“아, 화장실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화장실을 백작님 허락받고 가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그러래? 왜 그렇게 예민해? 수상하네. 냄새가 좀 나는데?”
엘리오가 킁킁거리자 파비안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고개를 갸웃하던 엘리오가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너 이리 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