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64
1364회.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
제도 북구.
헤르메티카 마탑.
탑주 집무실.
7서클의 대마법사이자 헤르메티카 마탑의 탑주인 프라트리스 악툼 후작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청년 기사를 보았다.
스쿠툼의 수호자.
그랜드 마스터.
검의 궁극에 도달한 마검사.
모두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청년 기사에게 주어진 칭호였다.
모두 거짓말 같지만, 황제가 조건 없이 백작의 작위와 영지를 하사한 걸 보면 그게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마검사라지만 헤르메티카 마탑과 아무 관계도 없는데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탑주인 프라트리스 악툼…… 후작이오. 무슨 일로 나를 찾았소?”
본래 탑주쯤 되면 찾아온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어지간한 대귀족도 미리 약속을 잡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라면 다르다.
그랜드 마스터의 무력은 탑주보다 뛰어나기에 프라트리스 악툼 후작도 그와의 만남을 거부할 수 없었다.
탑주의 질문에 엘리오가 답했다.
“실은 탑주님이 아니라, 이곳의 마공학자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마공학자라……. 그래, 찾는 사람이 누구요?”
“아르테늄의 개발자입니다.”
“혹, 그것을 남부 왕국에 판매한 일로 그러는 거라면……. 마탑은 제국에 있지만, 독립적인 조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구려.”
마법사들에게는 국가가 없다.
몇몇 왕국에 기원을 둔 마탑은 아직도 왕국에 마탑의 일부를 남겨 두고 있었다.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엘리오는 어비스에서 만난 마족의 신, 안타르의 이야기를 간략히 언급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단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란의 선봉장’인 우샤스 운드라가 인간의 탈을 쓰고 활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악신 샤이틴의 계략을 저지하기 위해 그를 잡으려 합니다.”
엘리오는 ‘마나 프트라스의 부탁을 받았다’라고 하면 바로 이단 소리를 듣게 되는 터라 악신 샤이틴을 앞세웠다.
뭔가 영웅적인 그의 발언에 프라트리스 악툼 후작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엘리오는 묵묵히 마탑주가 입 열기를 기다려 주었다.
한참 만에 프라트리스 악툼 후작이 날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마나 프트라스 교단에서 들으면 반박할 소리지만…… 나는 백작이 거짓말을 한 것 같지 않구려. 제국과 남부 왕국의 전쟁에 악신 샤이틴이 관계되었다니……. 백작이 왜 아르테늄을 개발한 마공학자를 찾는지 알겠소. 그녀가 정말 우샤스 운드라라면 우리 헤르메티카 마탑이 크나큰 손해를 입게 될 테지만……. 지금은 마탑의 손익을 계산할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 말씀드리리다. 그걸 만든 이는 클리어 페리아 자작이오.”
악신 샤이틴은 흑마법사들에게 주신과도 같은 존재.
흑마법사라면 치를 떠는 마법사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지금 마탑에 있습니까?”
“물론이오. 연구소에서 아르테늄의 대량 생산을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소. 그녀는 5서클 메이지로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오. ‘인간의 지능을 초월했다’는 소리를 듣던 사람인데……. 그녀가 정말 우샤스 운드라요?”
프라트리스 악툼 후작의 얼굴이 긴장과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그런 그의 기대에 엘리오는 찬물을 끼얹었다.
“직접 만나 보기 전까지는 우샤스 운드라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르테늄의 개발 시기가 우연히 맞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 그렇구려. 그럼 이제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소?”
엘리오가 주위를 둘러본 후에 물었다.
“이 집무실에도 방어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겠지요?”
“타불라 마탑보다 더 뛰어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소만, 신이 아니라 인간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프라트리스 악툼 후작의 얼굴에 떨떠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를 본 엘리오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마탑주는 자신이 과거 타불라 마탑에서 벌인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공학 연구소로 안내해 주시고, 클리어 페리아 자작이 누군지만 알려 주십쇼. 싸울 것 같으면 밖으로 나가자고 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해 주시오. 우리가 아르테늄을 남부 왕국에 판매했다는 게 알려지면…… 황실에서 우리 마탑의 엑시티움 생산 허가를 취소할 거요. 아르테늄이라도 판매하려면 마공학 연구소가 있어야 하오.”
“허가를 취소하면 제작하지 못합니까?”
“엑시티움의 개발자가 타불라 마탑의 마공학자라……. 그의 허락이 없이는 만들 수 없소. 그런데 그는 황실의 후원을 받아 온 황실 쪽 마법사라…….”
“개발자가 허락하지 않으면 만들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마탑 간에 소속 마법사들의 권리를 지켜 주기 위해 그런 맹약을 맺었소. 맹약을 깨트리면 마나의 축복도 사라지는 터라 따라야 하오.”
“클리어 페리아 자작이 우샤스 운드라라면요? 아르테늄의 제작에는 차질이 없습니까?”
“개발자가 따로 상속인을 지정하지 않으면 그의 모든 것은 소속 마탑에 귀속되오.”
“죽여도 문제없다는 말씀이시죠?”
“마공학 연구소만 파괴되지 않게 신경 써 주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오.”
마탑주 입장에서는 클리어 페리아 자작보다 마공학 연구소가 더 중요했다.
아르테늄의 권한은 ―어차피 상속인이 없을 테니― 마탑에 귀속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몰인정한 말이지만 엘리오는 마탑주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안내해 주십시오.”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프라트리스 악툼 후작은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헤르메티카 마공학 연구소는 타불라 마탑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서 가볍게 실내를 둘러보던 프라트리스 악툼 후작이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속삭이듯 말했다.
“저 끝에 하얀색 로브를 입은 은발의 여마법사가 클리어 페리아 자작이오.”
“감사합니다.”
엘리오는 마탑주에게 묵례를 해 보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군소리 없이 안내해 준 마탑주가 고마웠다.
잠시 클리어 페리아 자작을 보던 엘리오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군가 다가오자 클리어 페리아 자작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청년 기사다.
갬비슨(누비 갑옷)은 낡았지만 청결했고, 눈빛도 맑았다.
“누구죠?”
“안녕하십니까? 저는 엘리오 라고아라고 합니다.”
누군지 몰라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님이세요?”
“예. 조만간 작위를 반납하게 될 것 같지만, 아직은 그렇습니다.”
“헉!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백작님. 저는 클리어 페리아 자작이라고 합니다.”
비록 백작이 자작 바로 위의 신분이지만, 그랜드 마스터에게는 그런 신분의 차이를 따지는 게 의미가 없다.
그랜드 마스터 앞에서는 제국의 황제도 몸을 사려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처음 봤을 때 느꼈지만 가까이서 대화하니 확실히 알겠다.
클리어 페리아 자작은 우샤스 운드라가 아니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르테늄의 개발자라고 하셔서, 제도에 온 김에 누군지 만나 보려고 왔습니다. 저도 북부 출신이라, 마음으로는 남부 왕국을 응원하고 있거든요.”
엘리오의 정치색 짙은 발언에 클리어 페리아 자작은 멈칫했지만, 이내 화사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제국이나 왕국의 상황에 관심이 없답니다. 연금술 연구 중에 실패작이 여럿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아르테늄이었어요. 이걸 어디에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탑주님에게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탑주님께서 남부 왕국에서 아주 좋아할 거라고 하셨어요. 제작만 제가 관리 감독하고 있고, 나머지는 탑주님께 맡겨 놓은 상태랍니다.”
그녀는 노련한 마법사답게 탑주를 앞세우고 자신은 뒤로 빠졌다.
제국의 정치 공작을 고작 5서클 메이지가 감당할 수 없어 내린 결정이었다.
엘리오는 초로(初老)의 마법사에게 빙긋 웃어 보인 후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해합니다. 바쁘신데 시간을 빼앗은 것 같군요. 그럼 이만.”
그는 클리어 페리아 자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꾸벅 묵례를 하고 돌아섰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클리어 페리아 자작이 황급히 말했다.
“아, 예, 안녕히 가세요.”
클리어 페리아 자작과 작별한 엘리오는 마탑주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인 후, 마공학 연구소를 떠났다.
그가 마탑 밖으로 다시 나왔을 때는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
우두커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엘리오는 이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한창 전쟁 중이었지만 정작 제국의 수도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거리의 모습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방문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차에 가득하던 시체가 거짓말 같다.
‘그나저나 파비안은 어디로 갔을까?’
끝날 때쯤 찾아오겠다고 했으니 자신이 그를 찾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엘리오의 입에서 ‘아!’ 하고 탄성이 흘러나왔다.
‘보나 마나 페르모사 에스텔라로 갔겠지.’
‘빛나는 별’답게 그곳의 요리와 술, 분위기는 확실히 특별했다.
가 보고 없으면 다시 마탑 입구로 돌아가도 된다.
목적지를 정하자 엘리오의 걸음걸이에 조금 힘이 실렸다.
페르모사 에스텔라.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두 남녀가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도 미남이었지만 여자의 미모는 그야말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는 한시도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녀 바르도스 아리에트 알바노가 눈웃음치며 말을 이어 갔다.
“……그때는 곧 돌아오실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뒤로 안 오셨잖아요?”
여자와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건만 파비안은 변명하듯 말했다.
“하하. 남부로 여행을 가는 바람에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셨더라고요. 나중에 세 분의 소문이 돌 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어떤 소문요?”
파비안이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그러자 아리에트 알바노가 크고 아름다운 눈을 빛내며 답했다.
“어비스요. 어느 모험가도 가 보지 못한 곳까지 탐험하셨다면서요?”
바르도스들은 대체로 호기심과 모험심이 많다.
그런 게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게 바르도스의 삶이다.
그녀에게 파비안 남작의 모험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에 더 집착한다.
일 년 내내 연주와 노래만 하던 그녀는 파비안 남작을 동경했다.
게다가 그는 북부에서 남작 작위까지 받은 진짜 귀족이었다.
넘볼 수 없는 산과도 같던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달리, 파비안 남작은 조금만 노력하면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파비안은 파비안대로 보랏빛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젊은 기사들에게 미녀 바르도스는 꿈이자 희망이다.
그런데 제국에서도 손에 꼽는 미녀 바르도스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니, 그야말로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게다가 아리에트 알바노는 여느 여자 바르도스들과 달리 기품이 있었다.
그녀가 단순한 평민이 아닌 라무스(귀족의 성을 가진 평민)인 때문이다.
라무스 가문은 귀족가 못지않게 자녀들을 교육시킨다.
얼마 전까지 만난 아드리아 왕국의 소피아 오를로바 남작이 정열적인 붉은 장미라면, 아리에트 알바노는 한 떨기 백합처럼 청초했다.
파비안은 화려함 속에 청순함을 감춘 아리에트 알바노에게 ―맹세코 태어나 처음으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한 시간이 조금 지나자 두 청춘 남녀는 서로에게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