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82
1382회. 어쩌면 총동원령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군
에스카토스 왕국의 궁정 마법사 오스번 칼로스 자작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숙소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때가 때이니만큼 제국 정보부의 눈을 의식한 것이다.
그날 밤.
파비안은 편지를 쓰기 위해 탁자에 앉았다.
그런데 막상 쓰려니 만감이 교차해 한 글자도 적을 수 없었다.
침상에 누워 그를 보던 엘리오가 말했다.
“뭐 하냐? 제사 지내냐?”
“답장을 쓰려는데…….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직하게 써 인마.”
“돌이켜 보니 제가 나쁜 놈 같습니다.”
“같은 게 아니라 나쁜 놈이야.”
“저는 그동안 라고아 백작님이 참 답답했거든요. 인생을 참 재미없게 사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세라 양이 걱정이다. 팬텀 기사단에 복귀했다면 조만간 전선에 투입될 거 아니냐. 너도 남부에서 죽거나 다친 병사들 마차에 실려 가는 거 봤잖아. 세라 양이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냐. 그렇다고 야비하게 세라 양을 후방으로 빼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다 자기 운명이죠.”
“운명이 아니라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 인마. 네가 진즉에 연락을 했으면 세라 양이 기사단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었다고.”
그러자 울컥한 파비안이 살짝 언성을 높였다.
“저도 압니다. 제가 몰라서 그런 줄 아십니까. 알아도 방법이 없잖습니까.”
엘리오는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 하지 않았다.
파비안의 말대로 손쓸 방법이 없어서다.
문득 엘리오가 말했다.
“얼굴에 철판 깔고 국왕에게 세라 양을 빼 달라고 요청해 볼까?”
“세라 양이 거부할 겁니다. 그녀는 자기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기사입니다.”
“하긴,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너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 그건 책임감과 좀 다른 것 아닙니까?”
“됐고. 너도 양심이 있으면 신전에 가서 기도나 올려. 세라 양이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예…….”
파비안은 다시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복잡하던 마음이 추슬러졌는지 아까처럼 막막하지만은 않았다.
글을 적어 나가는 파비안을 보던 엘리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너는 좋겠다. 연락을 할 수 있어서.’
자신은 두고 온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홀로 남은 딸이 부모를 그리워하며 쓸쓸히 늙어 간다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
그는 마하담(공간 창고)에 손을 넣어 태양신 카마 데비아스의 코어(core)를 매만졌다.
이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마나 프트라스와 원수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자신이 석경장을 떠나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
이세계에서 소멸된 남궁연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
살람 왕국이 멸망했다.
왕도 다르에스를 빼앗기고 고성(古城) 마지드로 후퇴했던 남부 왕국군은 끝내 제국군에 밀려 드니로프 왕국으로 달아났다.
제국군이 드니로프 왕국 국경선에 집결했을 때, 마침내 그동안 관망하던 북부 왕국이 제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남부 왕국들은 이제 제국군의 기세가 꺾일 거라 기대했지만, 드니로프 국경선에 집결한 제국군은 그대로 국경을 넘었다.
황태자의 원정군은 북부 전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부를 휘젓고 다녔다.
한편 북부 왕국들이 선전 포고를 하자 제국은 즉시 북부 국경에 병력을 증원했다.
이미 전군을 총병으로 재무장한 제국은 북부의 선전 포고에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제국군 지휘관들은 북부를 손에 넣을 기회라고 좋아했다.
황태자가 남부에서 쌓은 전공을 생각하면 그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북부 왕국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제국군이 남부에서 올린 전과를 보고 총병을 육성했다.
마력총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마나석이다.
대륙에 유통되는 마나석의 70%가 북부산.
그런 만큼 북부 왕국은 마탑의 중요한 고객이기도 했다.
덕분에 북부 왕국군은 빠르게 마력총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기마대와 검방병 부대도 남아 있지만, 남부만큼은 아니다.
선전 포고를 한 건 북부 왕국이지만 먼저 국경을 넘은 건 제국군이었다.
그 정도로 제국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전력은 양측이 엇비슷했다.
제국군은 1―9사단, 제1 포병 여단, 그리고 새로 창설된 기갑부대가 동원됐다.
북부 왕국군은 에스카토스, 베일럼, 라미노프, 세베린, 프리치아 왕국에서 끌어모은 12개 사단과 3개 포병 대대, 지원부대다.
총병은 북부 왕국군이 많았지만, 포병은 제국군이 우세했다.
선전 포고가 있은 지 열흘 만에 국경을 넘어간 제국군과 북부 왕국군이 충돌했다.
결과는 제국의 기대와 달리 박빙이었다.
제국군은 마력총으로 무장한 북부 왕국군을 뚫지 못했다.
그래도 사상자의 숫자는 북부 왕국군에서 더 나왔다.
대부분 제국군 제1 포병 여단의 마력포에 당한 것이었다.
그건 제국군도 마찬가지였다.
제국군 역시 북부 왕국군의 3개 마력포대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제국군과 북부 왕국군은 뒤늦게 마력포의 확충에 매달렸다.
하지만 마력포의 생산과 보급은 마력총과 달리 더디기만 했다.
그래도 북부 왕국군의 선전에 힘입어 남부 왕국군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보급 문제로 황태자의 원정군이 주춤한 때문이다.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전선을 두 개나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제국군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전략 무기 엑시티움에 개량된 골리앗까지, 지려야 질 수 없는 전쟁인 까닭이다.
***
살람 왕국에서 후퇴한 남부 왕국군은 드니로프 왕국에서 재집결했다.
쉐이드, 아드리아에 이어 살람 왕국까지 빼앗긴 남부 왕국군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전쟁을 이제 막 시작한 북부에 비해 남부 왕국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전쟁에서는 계속 패하기만 하고, 후방에서는 ―왕국을 말살하려는 제국의 음험한 계획도 모르고― 종전 협상만 외쳐 댔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전쟁 지휘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아드리아 국왕의 말을 믿고 마젠타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남부 드니로프 왕국.
국경 도시 아나토르.
깊은 밤.
굳게 닫혀 있던 아나토르의 성문이 열렸다.
곧이어 수십 대의 짐마차가 줄지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아드리아 국왕 라울 브로스넌의 입에서 ‘만세!’ 소리가 튀어나왔다.
마젠타가 약속한 신무기 타나토스는 물론, 요청하지도 않은 마력총까지 보냈기 때문이다.
물론 타나토스를 사용하려면 마력총이 필수지만 그는 설마 마젠타가 마력총까지 보낼 줄은 몰랐다.
다음 날부터 남부 왕국군은 재무장에 들어갔다.
병사들에게 마력총과 더불어 타나토스가 지급되었다.
타나토스는 마치 물이 스며들 듯 남부 왕국군에 보급됐다.
한편 황태자의 원정군은 드니로프 왕국 국경에서 보름간 정비에 들어갔다.
정비가 끝나자 원정군은 ‘제1 기갑부대’라 명명한 개량된 골리앗 부대를 앞세우고 아나토르로 진격했다.
원정군이 아나토르까지 가는 동안 어떤 장애물도 없었다.
남부 왕국군은 제국군을 만나면 달아났다.
살람 왕국에서부터 늘 보던 모습이라 원정군은 그걸 당연한 일로 여겼다.
정오 무렵.
석벽으로 둘러싸인 국경 도시 아나토르 앞에서 원정군 총사령관이자 황태자인 루이스 프레이저 3세는 손을 까딱였다.
후미에서 포를 방열하고 기다리던 포병 여단의 마력포가 불을 뿜었다.
쾅! 쾅! 쾅! 쾅―!
30분도 지나지 않아 아나토르의 석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래도 남부 왕국군은 잠잠했다.
얼마 전 살람 왕국의 수도인 다르에스를 점령할 때와 비슷한 분위기다.
황태자와 참모들은 남부 왕국군 지휘부가 도시를 비웠다 믿었다.
포성은 한쪽 벽이 무너지고 도시 내부가 훤히 보일 즈음 멈췄다.
황태자가 참모장에게 명했다.
“잔당들이 남아 있을 수 있으니 기갑부대를 먼저 진입시켜라. 제1 집단군이 그 뒤를 따른다. 점심은 아나토르에서 먹겠다.”
그러자 참모장 레이드 코스탁 후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전하. 드니로프 왕국에는 최소 7개 왕국군이 집결해 있습니다. 적의 저항이 심할 수 있으니 가까운 20사단을 앞세우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황태자가 지휘하는 제1 집단군이 피해를 입으면 곤란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래 봐야 패잔병들의 발악에 불과하다.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다르에스에서 경험하지 않았나? 드니로프 왕국의 첫 도시인데 우리가 앞장을 서야지.”
황태자는 기념비적인 일이라 생각해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황태자의 제1 집단군이 기갑부대의 뒤를 따라갔다.
기갑부대의 선두가 막 무너진 석벽을 넘어 들어갈 때다.
퍼퍼퍼펑―!
퍼퍼퍼펑―!
마력총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날아든 파란빛이 골리앗을 때렸다.
제국에는 두 종류 골리앗이 있다.
하나는 처음 생산 배치된 것으로 거대한 롱소드를 들었고, 다른 하나는 개량된 것으로 손 대신 마력총이 달려 있다.
원정군 기갑부대의 골리앗은 초기 골리앗이 7대, 개량된 골리앗이 1대다.
무기에 상관없이 골리앗은 튼튼한 장갑으로 남부 왕국군을 압살했다.
골리앗을 상대할 만한 사람은 소드마스터밖에 없는데, 엑시티움 때문에 소드마스터가 나서질 못하니 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골리앗의 몸통에 구멍이 뚫리고, 팔과 다리가 날아갔다.
5분 만에 총 여덟 기의 골리앗이 무력화되었다.
움직이는 방벽이던 골리앗이 사라지자 제1 집단군은 크게 당황했다.
뒤이어 마력탄과 예의 그 파란빛이 제1 집단군에 날아들었다.
개활지에 서 있던 제1 집단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뒤늦게 각각 좌우측에 있던 20사단과 35사단이 제1 집단군의 지원에 나섰다.
지금까지 제국군이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총병의 숫자가 남부 왕국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아나토르에서 쏘는 마력총은 무시하고 돌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지금까지의 손쉬운 승리로 방심하고 있던 제1 집단군이 허망하게 쓰러졌다.
마력탄이 날아들자 참모들은 총사령관인 황태자를 호위해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20사단과 35사단에 이어 21사단이 합류했음에도 무너진 석벽을 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는 원정군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아나토르의 주변이 온통 개활지라 원정군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점령의 기미는 없고, 피해가 늘어나자 황태자는 군대를 뒤로 물렸다.
황태자는 석벽으로 둘러싸인 아나토르를 노려보았다.
강철 도시 페로무로스도 점령했는데 저 부실한 석벽을 넘지 못하다니,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그때 원정군 참모장 레이드 코스탁 후작이 어두운 얼굴로 다가왔다.
“전하…….”
참모장은 결과가 부끄러운지 바로 보고를 하지도 못했다.
“아군의 피해는?”
“기갑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순간 황태자가 노기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전멸이라니! 마력탄으로는 골리앗의 장갑을 뚫지 못하는데, 그 무슨 소리냐!”
“기갑부대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파란빛을 내는 마력탄에 장갑이 뚫렸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남부 왕국에서 엑시티움에 버금가는 신무기를 개발한 것 같습니다.”
황태자는 이를 빠드득 갈 뿐 반박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골리앗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으니 부인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제1 집단군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확인된 전사자만 249명, 부상자가 355명, 실종이 194명입니다.”
거의 800명에 가까운 손실이다.
제1 집단군의 숫자가 5천임을 감안하면 심각한 피해였다.
다른 전투 사단의 손실까지 고려하면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남부 왕국에 엑시티움 같은 신무기가 있다면 북부 전선도 쉽지 않을 터.
석벽 뒤에 서 있는 아나토르를 노려보던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총동원령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