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83
1383회. 그래도 생각은 해 두셔야 할 겁니다
황태자이자 원정군 총사령관인 루이스 프레이저 3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50년 전 제국 전쟁 시 총동원령이 내려졌었다.
하지만 전쟁은 흐지부지 끝이 났고, 황제의 권위는 추락했다.
그나마도 군신(軍神)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패배로 기록됐을지 모른다.
역사에야 제국의 승리로 기록되어 있지만 얻은 게 없는데 승리는 무슨.
50년 전의 제국 전쟁으로 이익을 본 가문은 크나우프 대공가다.
공작에서 대공으로 한 계단 위로 올라갔다.
황가와 크나우프 대공가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의 뒤를 이은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의 비범함을 생각하면 한숨밖에 안 나온다.
평소 황실에 비협조적이라 눈엣가시였는데 그래도 이런 상황이 되니 조금은 안심이다.
“총력전이란 말이지…….”
총소집령이 내리면 크나우프 대공가도 더 이상은 구경만 하지 못한다.
그랜드 마스터에게 당해 본 그로서는 크나우프 대공가의 참전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엑시티움을 총병들에게 보급했다고 하지만 그걸 물 쓰듯 할 수는 없다.
아직은 마력탄 백 개에 엑시티움 하나 정도의 비율로 보급이 되고 있다.
제국도 그런데 남북부 왕국군은 더할 게다.
기사나 마법사와 달리 그랜드 마스터의 존재감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문득 또 다른 그랜드 마스터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크나우프 대공과 라고아 백작이 싸우다 함께 죽는 게 가장 이상적인 결말인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어디 보자. 라고아 백작이 에스카토스 왕국 출신이니 대공을 북부 전선으로 보내면 되겠군.”
북부가 짓밟히면 에스카토스 왕이 라고아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리라.
물론 제국의 총동원령이 먼저지만, 지금 느낌으로는 그렇게 흘러갈 것 같았다.
***
드니로프 왕국의 국경 도시 아나토르에서 벌어진 일은 금방 대륙에 퍼졌다.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남부 왕국군이 적극적으로 홍보를 한 탓이다.
충격이 제국을 강타했다.
전쟁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전쟁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남부 왕국이 엑시티움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지닌 무기를 개발했다!”
“원정군이 엑시티움과 골리앗을 사용하고도 아나토르에서 패했다!”
“남부 왕국의 신무기는 타나토스다.”
“원정군의 피해가 늘어나 자칫 점령지를 빼앗길 수도 있다!”
“마탑이 타나토스를 만들지 못하게 해라!”
“타나토스를 생산해 남부 왕국에 판매하는 마탑을 폐쇄하라!”
“북부 왕국 손에 타나토스가 들어가지 못하게 해라!”
“남부와 북부 왕국이 타나토스로 무장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나?”
“이러다 50년 전의 전쟁이 재현될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어비스를 점령하고 멈췄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북부 왕국이 선전 포고를 하게 만들었나?”
“제국의 대귀족들은 북부 왕국을 다독이지 못한 것인가? 안 한 것인가?”
뒤늦게 제국은 마탑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타나토스를 개발한 곳이 아도브 마탑임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륙의 마탑은 모두 마탑 위원회에 속해 있고, 마탑 위원회의 보호를 받는다.
제국이라도 아도브 마탑에 위력을 행사하려면 먼저 마탑 위원회의 허락부터 받아야 했다.
하지만 마탑 위원회가 제국에 그걸 허락할 리 없다.
결국 제국은 헤르메티카 마탑 때처럼 아도브 마탑의 거래처를 차단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도브 마탑이 생산을 멈추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제국은 때를 놓쳤다.
아도브 마탑은 은밀히 남부 왕국의 마탑들과 합작 계약을 했고, 타나토스의 레시피는 아도브 마탑에서 남부 왕국의 마탑들로 넘어간 뒤였다.
왕국의 마탑들은 마법사가 홀대받자 급히 연금술과 마공학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타나토스의 생산도 급물살을 탔다.
무기 판매만큼 이윤을 많이 남기는 장사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서서히 말라 죽어 가던 대륙의 마탑들에 타나토스는 생명수와도 같았다.
아도브 마탑이 단독으로 생산하던 때보다 더 많은 양의 타나토스가 만들어졌다.
제국이 ―아르테늄 때와 달리― 타나토스의 생산 저지에 실패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국 대귀족들은 ‘타나토스의 생산량이 엑시티움을 뛰어넘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던 어느 날 북부로 향하던 정체불명의 짐마차에서 타나토스가 발견되자, 제국은 제도와 제국령 마탑들에 엑시티움의 생산을 제안했다.
삼대마탑에서 독점하던 엑시티움을 제국의 마탑으로 풀어 버린 것이다.
왕국의 마탑들처럼 몰락해 가던 제국의 마탑이 그 반가운 제안을 거부할 리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엑시티움의 생산량이 타나토스의 생산량을 따라잡았다.
마탑의 주요 관심사도 마법 연구에서 마공학, 그중에서도 무기 개발과 생산으로 바뀌었다.
론디니움 제국.
수도 페트로폴리스 북구.
여관 겸 술집 페르모사 에스텔라.
정보 수집을 위해 오전에 외출했던 파비안이 해거름 무렵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는 1층의 식당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서둘러 2층 숙소로 올라갔다.
“백작님.”
파비안은 엘리오가 에스카토스 왕국의 백작 작위를 받은 뒤로 그냥 백작이라 불렀다.
창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엘리오가 고개를 돌렸다.
“왜? 무슨 일인데 그렇게 숨을 헐떡여?”
“제국에서 조만간 총동원령을 내릴 거랍니다.”
“그래?”
엘리오의 반응이 기대에 못 미치자 파비안은 호들갑을 떨었다.
“총동원령요! 제국이 오십 년 전처럼 총력을 다해 싸우겠다 이겁니다.”
“북부 왕국과도 싸우려면 어쩔 수 없지.”
“지금 제국군이 북부 세베린 왕국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있잖습니까.”
“북부 왕국들도 준비를 단단히 했으니까 쉽지 않을 거야.”
“총동원령과 함께 크나우프 대공가를 북부 전선으로 보낼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크나우프 대공가를?”
“예, 그럼 세베린 왕국의 방어선은 단숨에 무너질 겁니다.”
“에이, 설마. 북부에도 타나토스가 보급되고 있다면서? 타나토스가 정말 엑시티움과 비슷하다면, 크나우프 대공도 쉽지 않을걸?”
“타나토스가 마력탄처럼 많은 게 아니잖습니까? 그거 제작비가 엄청 비싸다고 하던데……. 아마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기야 하겠지.”
“아십니까? 세베린 왕국에 에스카토스 왕국군도 있습니다.”
“왜? 세라 경이 걱정되냐?”
엘리오는 세라 로어가 팬텀 기사단에 복귀했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녀를 세라 경이라 불렀다.
“걱정이 안 되면 거짓말이지요. 저에게 연락을 하려고 기사단에 복귀했다는데.”
“어떻게? 에스카토스 왕국군에 세라 경을 좀 빼 달라고 연락해 봐?”
“거절할 겁니다. 에스카토스 왕국에 있었다면 혹시 모를까? 세베린 왕국까지 왔으면 기사단에서 이탈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백작님도 기사단원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강한지 아시잖습니까?”
“그래서 어쩌려고?”
“모르겠습니다. 백작님이 ‘혼란의 선봉장’을 처리하면 전쟁도 끝날까요?”
“글쎄. 제국과 왕국들이 여기까지 와서 없던 일로 할지 모르겠다.”
엘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엑시티움과 타나토스가 등장하면서 양측의 사상자는 집계가 힘들 정도다.
제국은 왕국의 사상자가 많다고 하고, 왕국은 제국의 사상자가 많다고 했다.
양측의 말대로라면 양측 다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혼란의 선봉장’ 하나를 죽인다고 뭐가 달라질까?
‘혼란의 선봉장’이 들쑤시고 다니지 않아도 대륙은 이미 ‘혼란’ 그 자체인데.
“나중에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어쩌실 겁니까?”
파비안이 애매한 눈으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크나우프 대공이 북부 전선에 투입되면 북부 왕국은 라고아 백작에게 매달릴 것이다.
그러나 라고아 백작은 이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한 바 있다.
심지어 라고아 백작이 제자라고 공언한 싱크레어 지터가 크나우프 대공가에 있다.
그런 라고아 백작이 크나우프 대공을 막기 위해 북부로 달려갈까?
뚱한 얼굴로 듣고 있던 엘리오가 답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고민하기 싫다.”
“크나우프 대공이 북부 전선으로 움직이는 기미만 보여도 북부 왕국은, 아니 에스카토스 왕국은, 무조건 백작님에게 달려올 겁니다.”
“그때 가서 생각한다고.”
“골치 아픈 일이라고 뒤로 미루지 마십쇼. 북부 왕국을 도울 겁니까? 외면할 겁니까?”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저야 당연히 백작님이 북부 왕국군을 돕기를 바라지요. 세베린 왕국에서 세라 경이 죽으면 죄책감에 평생 시달릴 겁니다.”
“어쭈? 전쟁이 끝나면 청혼까지 할 기세다?”
“저 그렇게까지 뻔뻔한 놈 아닙니다. 편지에 그간의 일을 다 털어놨습니다. 지금쯤이면 세라 경도 저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을 겁니다.”
“그래도 세라 경이 좋다면 어쩔 거야?”
“설마요. 세라 경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데요. 다시는 저를 안 볼 겁니다.”
“용서해 줄 수도 있지. 바람피운 상대인 소피아 남작도 전사했는데.”
“글쎄요. 그런다고 용서해 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아리에트 알바노 양에게 미련이 남은 건 아니고?”
“절대요. 저 그렇게까지 어리석고 의리 없는 놈 아닙니다.”
“결론은 너도 모르겠다는 거잖아. 그렇지?”
“예.”
파비안이 쓰게 웃었다.
세라 경이 용서해 줄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마음도 모르겠어서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 전쟁에 내가 끼어드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싱크레어 지터의 스승과 칼을 맞대고 싶지도 않거든.”
“그래도 생각은 해 두셔야 할 겁니다.”
“그건 내가 너에게 할 소리다. 세라 경이 그래도 좋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둬야 할걸?”
파비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금의 그로서는 도무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식 웃던 엘리오가 문득 물었다.
“참,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은 좀 알아봤냐?”
“알아는 봤는데 아직은 나온 게 없습니다.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세상과 인연을 거의 끊는다고 하더라고요. 레올라 후작의 경우, 바르도스 공연을 관람하는 게 외부 활동의 전부였습니다.”
“레올라 후작이 후원한 바르도스가 아리에트 알바노 양 하나지?”
“예.”
“아리에트 알바노 양이라면 갈 만한 곳을 알고 있지 않을까?”
“…….”
파비안은 침묵했다.
물론 그도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찾아가 만날 생각은 없었다.
어찌 보면 아리에트 알바노 역시 소피아 남작처럼 피해자인 까닭이다.
매몰차게 관계를 정리하고, 필요에 의해 다시 만난다?
자신의 얼굴이 두꺼운 건 사실이지만, 양심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가 만나서 물어보기 어려우면 내가 만나고.”
“백작님이 만나 주십쇼. 저는 아리에트 양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만나 물어볼게.”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페르모사 에스텔라와 아리에트 양의 계약이 끝났으니……. 다른 데로 갈 겁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지금 만나러 가야겠다.”
“어디에 있는지는 아십니까?”
“여기 주인장이 알 테지. 모르면 치안대나 정보부에 가서 물어도 되고.”
엘리오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달리 파비안은 따라나서지 않고 굳은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일 층으로 내려간 엘리오는 지배인을 찾아 아리에트 알바노의 거처를 물었다.
“아리에트 양은 아직 칼리오페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중구로 가는 대로를 따라 쭉 올라가시면 좌측에 간판이 보일 겁니다.”
엘리오는 지배인에게 감사를 표한 후 거리로 나섰다.
과연! 대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좌측에 칼리오페라는 간판이 보였다.
칼리오페 역시 페르모사 에스텔라처럼 여관과 술집을 겸하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던 엘리오가 멈칫했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리에트 알바노를 얄팍한 인상의 청년이 끌어안듯 부축한 채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