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88
1388회. 신이여 속히 오소서
엘리오가 향한 곳은 타불라 마탑이었다.
그를 알아본 경비병은 군소리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어둠이 짙게 깔렸지만 아직 5시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탑 내부는 복도마다 마나석을 이용한 등이 있어 대낮처럼 밝았다.
잠시 후 1층에 대기 중이던 안내인이 그를 6층의 마공학 연구소로 안내했다.
마공학 연구소는 어둠이 내려앉은 뒤 사람 하나 없는 도시와 달리 마공학자들로 북적거렸다.
엘리오를 발견한 연구소장 카비 크레이저 백작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라고아 백작 각하.”
그는 감히 용건을 묻지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탑주가 그를 피해 달아났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엘리오는 가장 먼저 마공학자들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메기스투스는 없었다.
“메기스투스라는 마공학자가 타불라 마탑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순간 카비 크레이저 백작의 눈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자신의 죄를 묻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된 때문이다.
“메기스투스를 찾아오셨습니까?”
“예.”
“그는 십여 년 전부터 외부에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마법 연구실을 발견해 그곳에 거주한다는 건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고대의 마법 연구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마법사들은 개인 실험실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마법사의 실험은 합법 불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마법사는 개인 실험실을 죽을 때까지 비밀로 했다.
“메기스투스와 가깝게 지내는 마공학자가 있습니까?”
“아마도 저보다 가까운 사람은 없을 겁니다.”
“소장님이 모른다면 다른 마공학자들에게는 물으나 마나겠군요.”
“그렇습니다.”
“메기스투스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엘리오가 지그시 카비 크레이저 백작을 응시했다.
이미 탑주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확인차 물은 것이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작업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우리 마공학 연구소에서 그에게 맡긴 연구가 있거든요.”
엘리오는 그것이 소울 스톤 때문임을 알지만 파고들지 않았다.
그의 연구가 아니라 그를 만나는 게 목적인 까닭이다.
“그렇군요. 내가 언제쯤 오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까?”
“보통 월말이나 늦어도 월초에는 왔으니, 사나흘 안에 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요. 메기스투스에게는 내가 그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지 마십쇼. 무슨 뜻인지 알죠?”
라고아 백작의 서늘한 눈빛에 카비 크레이저 백작은 어깨를 움츠렸다.
“예, 그런데 무슨 일로 그를 찾으시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개인적인 일이니 굳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아, 예.”
카비 크레이저 백작은 ‘라고아 백작이 메기스투스에게 뭔가 의뢰라도 하려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마공학자를 은밀히 찾아다닐 이유가 없어서다.
엘리오는 연구소장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주고 돌아섰다.
허리를 굽실거리던 카비 크레이저 백작은 라고아 백작이 떠나자 바로 구시렁거렸다.
“개인적인 일로 마탑을 드나들다니. 마탑이 그렇게 할 일 없는 곳인 줄 아나. 탑주님이 안 계시니 개나 소나 제집처럼 드나드는구나.”
물론 굽실거리던 게 낯부끄러워서 괜히 하는 소리다.
***
숙소로 돌아온 엘리오가 창가에 멍하니 앉아 있자 파비안이 말했다.
“오늘 안 나타났나 봅니다?”
“어.”
“너무 실망하지 마십쇼. 사나흘 안에는 나타날 겁니다. 소울 스톤인지 뭔지를 타불라 마탑에 넘겨야 한다면서요?”
“갑자기 일이 술술 풀리니까, 헛다리 짚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술술 풀리다니요? 우리가 혼란의 성봉장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오마르 백작님과 하워드, 크레아는 아직도 남부 왕국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수고 끝에 마침내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런가?”
“그런가라뇨? 라고아 백작님과 우리 모두의 노력을 의심하지 마십쇼.”
“그러다 메기스투스가 혼란의 선봉장이 아니면?”
“아니면 다시 진짜를 찾아나서야죠. 포기하지 않으실 거잖습니까?”
그 말에 엘리오는 피식 웃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아니면 다시 찾으면 되지.”
“그런데 제 느낌에 메기스투스가 혼란의 선봉장 같습니다.”
“진짜?”
“확실합니다. 이 전쟁을 격화시키는 게 뭔지 생각해 보십쇼. 전부 마탑의 기술 아닙니까? 저는 혼란의 선봉장이 마탑에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도 같고…….”
엘리오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기대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기대가 어긋나면 그보다 사람을 허탈하게 만드는 것도 없어서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엘리오와 파비안이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이 밤에 누가 찾아온단 말인가?
문득 시간을 확인한 파비안이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6시밖에 안 됐네요. 하도 어두워서 밤 12시는 된 줄 알았습니다.”
곧이어 그가 문을 열자 여관 지배인이 뭔가를 내밀며 말했다.
“조금 전에 어떤 남자가 클라우드 남작님에게 이걸 전하라 맡기고 갔습니다.”
지배인의 손에 들린 건 밀봉된 편지였다.
편지를 받아 든 파비안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엘리오가 한마디 했다.
“안 읽냐?”
“겁나서 못 뜯어보겠습니다.”
“세라 경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 있었냐?”
“그런 건 아닌데…… 심장이 떨리네요.”
“내가 읽어 주랴?”
“저도 그러고 싶지만……. 이건 제가 해야 할 일 같습니다.”
이윽고 파비안은 단검으로 조심스럽게 밀봉을 잘라 냈다.
그러나 그는 차마 내용물을 꺼내지 못했다.
“주접 그만 떨고 빨리 봐. 나도 궁금하다.”
우두커니 서서 편지를 만지작거리던 파비안이 결심한 듯 내용물을 꺼냈다.
엘리오는 파비안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표정만 봐서는 편지의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잠시 후 파비안이 ‘하아!’ 하고 날숨을 길게 내뱉었다.
엘리오가 짐짓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뭐래? 용서해 주겠대? 다시는 만나지 말재?”
“남은 평생 자기만 사랑할 수 있다면 용서해 주겠답니다. 그럴 자신 없으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네요.”
“착한 사람이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모르겠습니다.”
“몰라? 내 바람기 나도 몰라 그런 거야?”
“솔직히 저는 세라 경도 저를 잊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자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겁니다.”
“뭔 소리야? 그래서 세라 경이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싫은 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제 감정이 죄책감에 그러는 건지, 세라 경에 대한 마음이 남아 그런 건지……. 그걸 모르겠습니다.”
“내 고향에 이런 말이 있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숲에 난 길과도 같다고. 자주 오가지 않으면 잡초에 파묻힌다는 거지.”
“잡초에 파묻힐 정도의 감정이 사랑일까요?”
“그야 잡초를 걷어 내 보면 알겠지. 사랑인지 죄책감인지.”
한참 침묵하던 파비안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에스카토스 왕국군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생각했다. 에스카토스 왕국의 기사가 왕국의 위기를 모른 체하면 안 되지.”
훗날 자신의 영지를 물려받을 때를 대비해서라도 파비안은 에스카토스 왕국군으로 돌아가는 게 나았다.
“끝까지 백작님을 모시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동안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다. 죽지만 마라. 너 죽으면 나중에 내 영지 물려줄 사람 없다.”
“염려 마십쇼. 천공성과 어비스에서도 살아남은 제가 고작 북부 전선에서 죽을 것 같습니까? 백작님이나 말없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마십쇼.”
“나 그렇게 의리 없는 사람 아니다. 떠나기 전에 송별회 다 챙겨 먹을 거다.”
파비안은 라고아 백작의 실없는 농담에 피실피실 웃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파비안은 엘리오의 배웅 속에 여관을 떠났다.
엘리오는 다시 숙소 창가로 가서 타불라 마탑을 감시했다.
홀로 남아 있노라니 처음 히르헤라에 와서 경험한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파비안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원수가 됐고, 어떤 이는 좋은 친구가 됐다.
상계라고 하지만 까마득히 하계인 강호와 다를 바 없었다.
돌이켜 보면 구주의 생활도 그랬다.
그렇다면 하계와 상계의 구별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어쩌면 투쟁은 살아 있는 것들의 숙명인지도…….’
지혜로운 남궁연이라면 그에 대한 완벽한 답을 알 텐데, 자신은 장님 코끼리 만지듯 짐작할 뿐이라 조금 답답했다.
하루 종일 타불라 마탑을 지켜보았지만 메기스투스는 오지 않았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닷새가 지나자 엘리오는 슬슬 불안해졌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 외에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엘리오는 이제 날짜를 무시하고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어쩌면 전쟁이 격화되면서 소울 스톤 제작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도 몰랐다.
골리앗은 제국군 전력의 큰 축.
메기스투스는 늦더라도 소울 스톤을 들고 타불라 마탑에 나타날 터였다.
***
제국령 모처.
그 시간 메기스투스는 은밀히 트라노 코볼로룸(검은 도깨비)의 책임자를 만나고 있었다.
“야인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냐?”
메기스투스가 싸늘한 눈으로 중년 사내를 노려보았다.
생명체의 영혼을 연금술로 만든 특별한 수정에 담으면 소울 스톤이 된다.
소울 스톤은 처음에 짐승을 이용해 만들었다.
그러다 지능의 한계로 수인으로 교체했지만, 수인은 포획에 어려움이 따랐다.
수인 부락을 찾기도 힘들지만 전투력이 뛰어나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수인에 비해 야인은 포획이 어렵지 않았다.
야인 부락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었고, 전투력도 미미했기 때문이다.
중년 사내, 그레이존이 변명하듯 말했다.
“대마법사님, 어쩔 수 없습니다. 제국령의 모든 국경이 막혀서…… 야인을 잡아도 이송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처럼 한두 명은 숨겨서 들여올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숫자는 무립니다.”
어째서인지 그레이존은 마공학자인 메기스투스를 대마법사라 부르며 어려워했다.
“닥쳐라! 국경 수비대에게 돈을 쥐어 주든, 협박을 하든, 그건 너희들 소관이니 알아서 하고. 이전처럼 야인을 공급해라. 사흘 내에 열 명을 채우지 못하면……. 너희들로 빈자리를 채워 넣을 것이다.”
“그, 그건…….”
“그건 뭐? 내가 못 할 것 같으냐?”
메기스투스가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레이존을 보았다.
공포에 휩싸여 하얗게 질려 가던 그레이존이 가까스로 말했다.
“하,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말과 함께 귀찮다는 듯 메기스투스가 손을 까딱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레이존이 허리를 격하게 꺾어 인사 올린 후 뒷걸음질 쳐 나갔다.
방에 혼자 남겨진 메기스투스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쯧! 소심한 놈들 때문에 괜한 잔소리를 듣게 생겼군.”
지금까지 늦어도 월초에는 소울 스톤을 가져다줬는데, 벌써 칠 일이나 지났다.
사흘 후에 열 명의 야인을 받으면, 보름은 돼야 약속한 양의 소울 스톤이 만들어진다.
평소보다 무려 15일이나 늦는 셈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메기스투스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오후 3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지려 한다.
“이산드 툴레 바르스티.”
그것은 마족어로 ‘신이여 속히 오소서’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