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94
1394회. 이제 천문(天門)을 열고 가면 됩니까?
노토스 왕궁의 집사장은 엘리오를 손님들 전용 숙소로 안내했다.
손님 전용 숙소는 왕궁 내부에 있었는데 척 봐도 크기가 작았다.
집사장은 숙소 앞에서 꾸벅 인사를 올린 뒤 조용히 왔던 길을 돌아갔다.
엘리오가 안으로 들어가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하워드, 크레아가 흐릿한 유등(油燈) 아래서 하던 일을 멈추고 몰려왔다.
“……그때부터 줄곧 남부 왕국군 사령부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라고아 경에게 알릴 만큼 이상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곳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오마르 백작이 의아한 얼굴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그러자 엘리오가 담담한 어조로 그간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조금 전 우샤스 운드라를 찾아서 처리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남부 왕국을 조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마르 백작과 하워드, 크레아는 놀란 듯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오마르 백작이었다.
“결국 그렇게 됐군요. 우리 로디나 대륙과 라고아 경을 위해 정말 잘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일만 남은 겁니까?”
“네, 겸사겸사 작별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저를 도와주신 일,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하워드, 크레아, 두 사람도 그동안 고생 많았다. 혹시 북부에 정착할 마음이 생기면 파비안을 찾아가 봐라.”
그러자 하워드와 크레아가 한마디씩 했다.
“예, 그렇지 않아도 파비안 형님과 이야기 끝냈습니다.”
“저희도 이제 그만 정착하려고요.”
“잘됐군. 두 사람 결혼식에는 참석 못 할 것 같다. 미리 축하하고, 이거 받아라.”
엘리오는 지니고 있던 이세계 돈을 전부 털어 하워드에게 건넸다.
“왜 저에게 다 주십니까?”
“나는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테니까. 가지고 있어 봐야 짐이다. 결혼 축하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
하워드는 묵묵히 돈을 갈무리했다.
뒤늦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왔다’는 라고아 백작의 말이 실감 났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엘리오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드리아 왕국에서는 별궁에 머물렀는데, 여기서는 손님 숙소네? 남부 왕국에서 온 대귀족들이 많으냐?”
남부 왕국 연합군에 공작과 후작이 많을 것 같아 해 본 소리였다.
그러자 하워드가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아드리아 왕국에 있을 때도 남부 왕국의 대귀족들은 많았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분위기가 달라?”
“그때는 남부 왕국이 패전 중이었지만 지금은 제국군을 몰아붙이고 있잖습니까. 라고아 백작님과 오마르 백작님의 도움 없이도 우리끼리 잘 해내고 있다, 뭐 그런 분위기 때문에 대접이 좀 박해졌습니다.”
“아…….”
엘리오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맞이한 사람도 왕궁 집사장뿐이었다.
라고아 백작의 안색을 살피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요?”
“북부 왕국이 전쟁에 참여한 뒤로 여기저기서 ‘당신들은 왜 전쟁에 뛰어들지 않느냐?’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일 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우샤스 운드라를 처리했으니 이제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심지어 우샤스 운드라를 ‘혼란의 선봉장’이라고 한 것 가지고도 뭐라 하는 대귀족들이 있습니다. 남부 왕국에 우샤스 운드라를 섬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더군요. 이래저래 라고아 경과 저만 이상한 사람이 된 상황입니다. 하하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자조적인 웃음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잠시 후 엘리오가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에 북부로 떠날 예정입니다. 파비안을 만나 보고 고향으로 가려고요. 혹시 북부로 가시겠다면 모시고 가겠습니다.”
“가야지요. 라고아 경의 일도 끝났는데 제가 남부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저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저도 북부 왕국군에 합류할 생각입니다.”
그러자 하워드가 크레아와 시선을 맞춘 뒤 말했다.
“저희도 북부로 가겠습니다.”
순간 엘리오가 의아한 눈으로 하워드를 돌아보았다.
“북부에? 아직 파비안이 영지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서 정착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할 텐데?”
먼저 파비안을 양자로 입적해야 하고, 그 뒤에도 자신의 실종이 확인돼야 영지가 세습될 터였다.
그러니 지금 북부에 가 봐야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용병 일을 하더라도 북부에서 하려고요. 어차피 북부에서 살아야 하는데 미리미리 적응해야죠.”
“음, 그래. 난 파비안이 도와주기 어려울 거라고 분명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와 크레아의 검술 실력이면 어디 가도 환영받습니다.”
“알았어. 그럼 내일 아침에 함께 가자.”
“그래도 됩니까?”
“뭐가?”
“한 명만 데리고 갈 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가 파비안을 데리고 다닌 걸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한 사람씩 데려다 놓으면 돼.”
“영기의 소모가 엄청나실 것 같은데……. 괜히 폐를 끼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 영기는 표시도 안 나. 바다에서 물 한 바가지 뜬다고 바닷물 줄어드는 게 보이겠냐?”
“아…… 존경합니다.”
하워드는 자기가 말하고도 민망한지 뒤통수를 긁었다.
웃으며 지켜보던 크레아가 한마디 했다.
“라고아 백작님,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북부에서 송별 모임이라도 가져요. 오마르 백작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대로 라고아 백작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뭔가 섭섭하던 참이다.
“좋은 생각이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송별 모임 할 시간은 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세계를 구해 준 라고아 경을 떠나보내는 일인데.”
오마르 백작은 진심으로 라고아 백작이 자신의 세계를 구했다고 믿었다.
‘혼란의 선봉장’인 우샤스 운드라를 죽였으니 그러는 게 당연했다.
“아, 맞다. 라고아 백작님, 감사해요. ‘혼란의 선봉장’도 죽었으니 이제 곧 평화가 찾아오겠죠? 모두 라고아 백작님 덕분이에요. 남부 사람들이 그걸 안다면 비난을 멈출 텐데…….”
“그러게. 다들 우샤스 운드라를 꿈과 환상의 신으로만 알고 있으니. 어휴!”
답답한 듯 하워드가 제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나 우샤스 운드라의 마지막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던 엘리오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후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똑똑히 봐 두어라. 곧 이 세계에 아포칼립스가 찾아올 테니.
타불라 마탑이 있던 중구의 그 처참한 광경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었다.
죽어 가던 우샤스 운드라의 바람일 테지만 그래도 찜찜한 건 사실이다.
우샤스 운드라의 마지막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다.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엘리오는 구룡번신을 사용해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하워드, 크레아를 한 사람씩 북부 세베린 왕국으로 이동시켰다.
북부 세베린 왕국은 오후 5시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잠자리에 들 시간은 아닌지라 엘리오 일행은 바로 에스카토스 왕국군 진영을 찾아가기로 했다.
남부와 달리 북부에서 엘리오의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찔렀다.
덕분에 엘리오 일행은 거리에서 만난 병사들의 안내로 어렵지 않게 에스카토스 왕국군 진영을 찾아갈 수 있었다.
우르스 중대.
중대장 막사에서 쉬고 있던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은 갑자기 뛰어든 기수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호들갑이냐?”
“중대장님! 그, 그분이 오셨습니다!”
“대대장님이 오셨다는 거냐?”
“아뇨, 라고아 백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대대장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래?”
깜짝 놀란 파비안이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막사 밖에서 대대 참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우르스 중대장의 막사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오, 오마르 백작, 하워드, 크레아가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엉거주춤 일어난 파비안에게 하워드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말도 없이 그렇게 가 버리면 됩니까?”
귀빈들의 방문에 놀란 기수는 눈치껏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파비안은 하워드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라고아 백작을 멍하니 보았다.
“정말 타불라 마탑의 마공학자가…… ‘혼란의 선봉장’이었습니까?”
“어. 다 끝났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고향으로 가시는 겁니까?”
눈치 빠른 파비안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건만― 라고아 백작을 떠나보내기 위해 오마르 백작과 하워드, 크레아가 이곳에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응, 그래야지. 가기 전에 정리할 일도 있고.”
엘리오는 이참에 파비안을 양자로 입적할 계획이었다.
그래야 자신의 실종이 확인된 뒤에 영지를 계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엘리오와 오마르 백작이 의자에 앉자 파비안과 하워드, 크레아도 침상을 끌어다가 걸터앉았다.
다섯 사람은 새벽까지 웃고 떠들다가 그대로 토막 잠을 잤다.
날이 밝자 오마르 백작은 우르스 중대를 떠났다.
엘리오는 파비안과 함께 구룡번신으로 에스카토스 왕궁을 찾아갔다.
그는 귀족 관리청에서 파비안의 양자 입적 절차를 밟은 뒤, 그를 다시 세베린 왕국의 우르스 중대에 데려다주었다.
중대장 막사 앞에서 작별 인사를 건넨 엘리오가 막 돌아섰을 때다.
“라고아 백작님.”
“왜?”
엘리오가 시원섭섭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파비안이 뻘쭘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라고 불러도 됩니까?”
“미친놈. 내가 왜 네 아버지냐?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다.”
“서류상으로는 백작님이 제 아버지 되십니다. 제 이름도 조금 전에 파비안 라고아로 바뀌었잖습니까?”
“헛소리하면 양자 입적 취소하고 간다.”
그에 깜짝 놀란 파비안은 얼른 말을 돌렸다.
“이제 가면 다시는 못 뵙겠죠?”
“남자들끼리 또 봐서 뭐 하게?”
“남자들은 또 보면 안 됩니까?”
“실없는 소리 말고, 세라 경에게나 잘해 줘. 그런 사람 흔치 않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요. 진짜 아버지처럼 잔소리하시는 겁니까?”
“간다.”
빠르게 돌아선 엘리오는 몇 걸음 걷다 지면을 박차고 위로 솟구쳤다.
곧이어 어기충소의 신법으로 까마득히 날아오른 엘리오는 이내 사라졌다.
파비안은 라고아 백작이 떠난 빈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한참을 날아가던 엘리오는 신전 건물이 보이자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신전 뜰에 세워진 석상은 대지의 여신 사가르타였다.
엘리오가 성큼성큼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젊은 여자 수도자가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저는 사가르타님의 종인 샌드라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기도를 좀 하려고요.”
“아, 그러시군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전에도 오신 적이 있나요?”
“처음 왔습니다. 들어가도 됩니까?”
“아, 예…….”
샌드라는 청년 기사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슬쩍 비켜났다.
엘리오는 샌드라를 지나쳐 거침없이 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물론 사가르타 신에게 기도를 하러 온 건 아니다.
단지 마나 프트라스를 불러낼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을 뿐이다.
사가르타의 그림이 그려진 거대한 벽화 앞에서 엘리오는 나직이 읊조렸다.
“마나 프트라스님. 약속한 일을 다 완수했습니다. 이제 천문(天門)을 열고 가면 됩니까?”
그러자 홀연히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신전 내부를 쓸고 지나갔다.
이윽고 뭉글뭉글 일어난 구름이 벽화 앞을 하얗게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