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95
1395회. 이제 다시는 어디 갈 생각하지 마
사가르타의 신전 앞에서 샌드라는 잠시 머뭇거렸다.
대지의 여신 사가르타는 풍요의 신.
그것은 단지 땅에서 나는 곡식만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풍요를 다산의 상징으로 발전시켰고, 그것은 다시 난잡한 성생활로 연결됐다.
사가르타의 신전에 있는 사제와 수도사 들은 신도들과 성적 행위를 했고, 그것이야말로 신과 소통하는 길이라 떠들어 댔다.
물론 성행위를 하면서 사가르타 신을 만난 사람은 없었다.
여하튼 샌드라는 기사로 보이는 청년의 방문 목적을 알지 못해 머리가 복잡했다.
신도들 대부분은 눈 맞은 수도자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저 청년 기사는 기도를 하러 왔다며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른 수도자를 불러 달라는 걸까?
‘그렇게는 못 하지.’
그녀는 청년 기사에게 딱히 끌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젊은 기사를 다른 수도자에게 양보하기도 싫었다.
모처럼 찾아온 상대는 청년에, 무려 기사다.
아무리 수도자들이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해도 뭐가 좋은지 정도는 안다.
어쩌면 청년 기사가 자신을 거부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먼저 들어가겠다는 말일 수도 있으니까.’
샌드라는 자기 편한 대로 결론 내린 뒤 신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응?’
사가르타의 성화(聖畫) 앞에 하얀 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있다?
허리까지 차오른 구름 속에 청년 기사가 여신처럼 보이는 누군가와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녀를 여신이라 생각한 것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광채 때문이다.
사가르타 여신도 미녀지만 저 여신은 사가르타 여신보다 월등하게 아름다웠다.
샌드라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아 눈을 끔뻑였다.
물론 교리상 신전에서 성교 중에 여신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사가르타가 아니라니?
‘누구지?’
문득 샤스트라 파라크티(구천현녀)가 여자를 돌아보았다.
형언하기 어려운 여신의 눈길에 샌드라는 부러져라 허리를 접었다.
한참 기다려도 별다른 말이 없자 그녀는 조용히 뒷걸음질 쳐 신전을 벗어났다.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침묵이 길어지자 엘리오가 말했다.
“아시겠지만 이 세계 창조신이 부탁한 일을 마쳤습니다. 이제 천문(天門)을 열고, 고향으로 돌아가도 됩니까?”
“수고하였다.”
샤스트라 파라크티가 복잡한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가족은 없을 것이다.
그 말을 해 주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엘리오가 태양신 카마 데비아스의 코어를 손에 넣은 줄 몰랐다.
그렇기에 진실을 알게 되면 엘리오가 폭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카마 데비아스나 우샤스 운드라보다 더한 재앙이었기에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엘리오 라고아여,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사죄하겠다.’
물론 그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편 마음이 착잡한 것은 엘리오도 마찬가지였다.
우샤스 운드라의 저주에 가까운 마지막 말을 믿지 않지만,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끈 사람은 자신이다.
그 말을 샤스트라 파라크티에게 할 수는 없었다.
돌이켜 보면 샤스트라 파라크티도 ‘시간의 문제’를 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신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야 한단 말인가.
‘우샤스 운드라가 했던 재수 없는 말은 내 가슴에 묻어 두자.’
그렇게 마음을 정한 엘리오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고향으로 이상 없이 돌아갈 수 있죠?”
“그렇다.”
“마나 프트라스님과도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그분도 잘 계시죠?”
이건 구룡번신이 자꾸 삐끗거려서 던져 본 말이었다.
“잘 계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말에 엘리오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나 우샤스 운드라의 헛소리였다.
마나 프트라스에게 문제가 없다면 세상이 멸망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럼 갑니다?”
엘리오가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얼굴을 보았다.
남궁연의 기억이 여신의 어딘가에 남아 있다 생각하니 쉽게 발을 떼기 어려웠다.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잘 가거라.”
엘리오는 꾸벅 인사를 한 후 신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몇 번이고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자신에게 이 세계는 현실이 아닌 꿈이요 환상이다.
이제 현실의 가족들에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가 사람을 찾듯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샌드라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헉! 헉! 기사님! 기도는 끝마치셨습니까?”
“네. 그런데 동쪽이 어디죠?”
뜬금없는 질문에 샌드라가 한쪽을 가리키며 답했다.
“이쪽이에요.”
“감사합니다.”
엘리오는 샌드라가 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구천검령을 불러냈다.
고오오오―.
여덟 자루의 구천 검령이 팔괘를 따라 신전 위에 둘러섰다.
뒤늦게 그걸 본 사제와 수도사 들이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웠다.
엘리오가 눈을 찌푸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방위가 조금 어긋났는지 빛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여덟 개의 검령을 움직였다.
여덟 개의 검령이 한쪽 방향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공명음과 함께 여덟 개의 검령이 빛을 내뿜었다.
빛이 모여든 지점에 엘리오는 마지막 한 개의 검령을 꽂았다.
쿠우웅―!
무거운 종소리가 신전에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사가르타의 사제와 수도사 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렸다.
엘리오는 마하담(공간 창고)에서 태양신의 코어를 꺼내 들고, 천문이 만들어 낸 암흑의 공간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파앗―!
엘리오가 안으로 들어간 직후, 구천검령과 천문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가르타의 사제와 수도사 들이 일제히 신전으로 몰려들었다.
샌드라가 사제와 수도사 들을 향해 열심히 뭐라고 떠들어 댔다.
그녀의 말에 놀란 사제와 수도사 들은 즉시 신전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신전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사제와 수도사 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호광성.
무당산.
늦은 밤.
구천현녀의 사당 앞 허공에 기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휘우우웅―.
이윽고 소용돌이는 한 청년을 토해 낸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철퍼덕―.
땅에 떨어진 청년은 충격이 컸던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하늘에서 시체가 떨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각(약 15분)쯤 지났을까?
미동도 않고 쓰러져 있던 청년이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아고고! 이놈의 천문은 도무지 익숙해지지를 않는구나.”
때마침 구름을 벗어난 달빛에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엘리오, 아니 연적하였다.
급히 좌우를 둘러보던 그의 입에서 기쁨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구천현녀의 사당이구나! 내가 제대로 돌아온 건가!”
환호성을 내지르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자신이 떠나던 때는 분명히 가을인데, 주변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떠난 날로부터 먼 미래라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는 사당을 다시 살폈다.
하지만 원래부터 낡은 사당이라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엘리오는 급히 오룡궁으로 달려갔다.
오룡궁.
금정각.
오룡궁 궁주의 거처인 금정각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연적하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험. 험.”
소리를 들었는지 캄캄하던 금정각 창문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윽고 꽉 잠긴 천명 도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누구요?”
천명 도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연적하의 안색이 밝아졌다.
천명 도사가 살아 있다면 아직 가족들도 살아 있을 게 분명해서다.
“연적합니다.”
순간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천명 도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남천? 남천이 왔느냐?”
“예.”
연적하는 천명 도사의 안색부터 살폈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더 늙은 것 같지 않았다.
천명 도사가 단숨에 달려와 연적하의 손을 잡았다.
“정말 남천이구나!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기에 그토록 소식이 없었느냐? 우리는 네가 크게 잘못된 줄 알았다.”
궁주의 지나친 환대에 불길함을 느낀 연적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궁주님. 제가 떠난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네가 갑자기 사라진 날로부터 묻는 것이라면 지금이 1월이니…… 석 달이 지났구나.”
“아, 석 달밖에 안 됐습니까?”
연적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 번째 하늘에서 남궁연과 재회했을 때 그녀는 ‘삼십 년이 지났다’고 했다.
그런데 삼십 년이 아니라 석 달이라니!
새삼 코어를 넘겨준 태양신 카마 데비아스에 대한 고마움이 밀려왔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게냐? 석경장에도 안 돌아가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좀 다녀왔습니다.”
“그랬구나. 다행이다.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네가 사라져서……. 무당파가 한바탕 뒤집혔었느니라.”
“그 정도로 놀랄 일이었습니까?”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오룡궁에서 너에게 암수를 썼다고 떠들어 대서…… 골치가 아팠다.”
“아니 오룡궁에서 왜요?”
“무당파의 큰어른인 태허 진인이 너에게 당했다는 소문 때문이지. 오룡궁 하면 기이한 수단을 쓰는 곳으로 유명하잖느냐. 그러니 이래저래 오해가 겹쳐서 의심을 받고 있는 중이다.”
“아,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건 없다. 그저 상황이 묘해서 그랬던 것뿐이니. 그런데…… 그 옷차림은 무엇이냐? 서역(西域)의 복장 같은데…… 설마 서역에라도 갔었던 게냐?”
“아하하. 아닙니다. 그보다 더 먼 곳에 갔었습니다.”
천명 도사는 연적하의 신묘한 수법을 잘 알기에 더 묻지 않았다.
“그랬구나. 참! 석경장에는 소식을 전했느냐? 네 가족들도 애가 끓을 텐데.”
“이제 가 보려고요.”
“그래, 속히 가 보거라.”
“예,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연적하는 훌쩍 밤하늘로 뛰어오르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구룡번신을 이용해 석경장으로 간 것이다.
흐뭇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천명 도사는 터덜터덜 전각으로 돌아갔다.
***
남직례성.
합비.
여강현 석경장.
늦은 밤, 석경장 앞마당에 한 사람이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오룡궁을 떠난 연적하였다.
격동 어린 눈으로 석경장을 둘러보던 연적하가 섬돌에 올라섰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안채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야심한 밤에 누군가요.”
남궁연의 목소리다.
장난기가 발동한 연적하는 대답 대신 굼뜨게 신발을 벗었다.
참다 못한 남궁연이 서슬 퍼런 장검을 들고 마루로 나왔다.
그녀의 눈에 기묘한 복색의 남자 뒷모습이 들어왔다.
남궁연이 살기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기에 감히…….”
남자가 천천히 돌아서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연적하라니?
생각지도 못한 그의 귀환에 검을 쥔 남궁연의 손이 덜덜 떨렸다.
“누님.”
연적하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남궁연은 검을 내던지고 그에게 달려갔다.
어찌나 강하게 안겼던지 연적하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연적하는 행여나 그녀의 발이 눈에 닿을까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남궁연의 향긋한 체향에 정신이 아득했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그때 남궁연이 속삭였다.
“이제 다시는 어디 갈 생각하지 마.”
사실 그녀가 연적하를 떠나보낸 데에는 남맹과 호천맹의 갈등도 한몫했다.
남맹 맹주인 부친이 연적하를 내세워 호천맹을 핍박하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연적하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니 모든 게 의미가 없었다.
남맹과 호천맹이 무슨 짓을 벌이건 연적하를 떠나보내서는 안 됐다.
그렇게 뼈가 저리도록 후회할 때 연적하가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