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96
1396회. 호천맹과 천하를 양분하시겠다고요?
다음 날.
석경장은 석 달 만에 돌아온 연적하로 인해 잔칫집 분위기가 됐다.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석경장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시끌벅적했다.
‘무당산에서 갑자기 사라졌던 연적하가 석경장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금방 강호에 퍼져 나갔다.
연적하의 실종과 더불어 잠잠하던 남맹이 기다렸다는 듯 청명절(4월 절기)의 무림대회를 공지하자, 강호가 달아올랐다.
강호에서 무림대회란 인재 등용의 무대다.
그 말은 곧, 남맹이 세를 키우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남직례성의 패자(覇者)인 남맹이 여기서 세를 더 키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호천맹에 소속된 무인에게는 위기지만, 그렇지 못한 무인들에게는 기회다.
일월임에도 벌써부터 남직례성으로 향하는 무인들이 생겨났다.
대륙의 넓은 땅덩어리를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움직임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경장은 평화롭기만 했다.
연적하는 하루 종일 딸과 놀아 주거나, 심통과 더불어 낚시를 다녔다.
밖으로 싸돌아 다니는 심통과 달리 당운망은 약제당에서 살았다.
월아와 금아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던 심통과 달리 당운망은 하소백과 한채연을 제자로 맞아 바빴다.
의술에 무지한 하소백과 한채연을 기초부터 가르치려니 더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소백과 한채연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연적하의 의자매인 두 사람이 게으르기까지 했다면 당운망은 늘그막에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소백과 한채연은 열심히 배웠고, 그만큼 하루하루 실력이 늘어나 당운망을 기쁘게 만들었다.
하소백과 한채연이 의술에 매진한 것은 한채연의 병약한 아기 때문이다.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 튼튼한 연지안과 달리 한채연의 아기(이연지)는 유달리 잔병치레를 심하게 했다.
여하튼 두 여자의 노력으로 당운망은 행복했고, 말라 있던 아기는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일월 중순경.
석경장에 언사(偃師)의 연(淵)씨 집성촌(集姓村)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낚시 갈 준비를 하다 불려온 연적하가 뚱한 얼굴로 노인을 보았다.
“누구시라고요?”
“언사에 있는 연씨 집성촌에서 온 연무달이네. 자네 부친인 연무룡의 사촌 형이니, 자네의 백부인 셈이지.”
“그곳에 아직도 연씨가 살고 있어요?”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과거 월하선자가 와룡장을 점거한 뒤 연씨 집성촌도 사라졌다고 들어서다.
“유명교가 사라진 뒤에 하나 둘 돌아와 다시 마을을 재건했네.”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로?”
석경장은 연씨 집성촌이 있는 낙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런데 아무런 접점이 없던 연씨가 불쑥 찾아오니 의아했다.
연무달이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서탁에 올려놓았다.
“뭡니까?”
“우리 연씨의 기원과 후손의 이름을 적은 가첩(家牒)일세.”
뜻하지 않은 물건을 앞에 두고 연적하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이 출세를 하면 온갖 잡인이 꼬인다더니 이젠 연씨까지 찾아왔다.
연적하의 그저 그런 표정에도 연무달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자신이 연적하였어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겠지만, 그래도 자기 뿌리가 어디인지 알아 두어서 나쁠 일은 없을 걸세.”
틀린 말은 아닌지라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고 가첩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연씨에 대한 좋은 기억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무달이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연못 연(淵) 자’를 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저도 소학까지는 뗀 사람입니다.”
“다행이구먼. 하지만 우리 시조가 고구려 사람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을 테지? 우리는 고구려의 대막리지였던 연자서(淵子遊)의 후손일세.”
그 말에는 연적하도 아주 조금 놀랐다.
“고구려면 지금의 고려를 말하는 겁니까? 장성 너머에 있는?”
“그렇네.”
“고려에도 아직 ‘연못 연씨’가 있습니까?”
“성씨로 ‘연못 연 자’를 쓰는 사람들은 연씨 집성촌밖에 없네.”
없다는 소리다.
뭔가를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닌지라 연적하는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고구려의 연씨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별 감흥은 없었다.
“굳이 저를 찾아와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시조의 손자인 연개소문 다음으로 자네가 유명해서 알려 주려고 왔을 뿐이네. 자네 이름도 가첩에 올라 있으니 심심할 때 읽어 보게.”
“하하하!”
연적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씨를 재수 없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연무달은 늙었지만 유쾌한 사람이었다.
“일 년에 한차례 종친회 모임이 있지만,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되네. 우리는 자네에게 뿌리를 알려 준 것으로 만족하네.”
“무백 형님도 알고 있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무백 조카는 종친회 모임에도 참석한 적이 있다네.”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연가무관이 같은 낙양에 있다고 종친회를 간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일어날까 합니다만.”
연적하가 빤히 쳐다보자 연무달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바쁜 사람을 오래 붙들고 있었군. 욕하지 않고 가첩을 받아 줘서 고맙네. 변명 같지만…… 연씨 집성촌 사람들이 모두 와룡장 내부 사정을 아는 건 아니라네.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지. 물론, 그렇다고 연씨들의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말일세.”
“…….”
연적하는 침묵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걸까?
이제는 와룡장에 대한 말을 들어도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연무달을 보낸 후 연적하는 심통과 함께 소호(巢湖)로 나갔다.
호반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았는데, 심통이 문득 물었다.
“연씨가 찾아왔었다고요?”
“어, 가첩이라는 걸 주고 가더라고.”
“가첩이 뭡니까?”
“시조부터 후손들 이름이 차례로 적혀 있는 책이야.”
“그런 게 있습니까?”
“나도 몰랐는데 있더라.”
“어지간히 할 짓 없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그런 걸 다 기록해 두게.”
“그러게 말이다.”
근본 없는 심통은 흥미가 동하지 않는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낚시는 왜 다니시는 겁니까?”
“조용하고 좋잖아.”
“조용한 건 사실이지만, 좋기로 따지면 낚시보다는 술집 아닙니까?”
“심 노인.”
“예?”
“술이 좋은 거야? 아니면 술집에 있는 여자가 좋은 거야?”
“그건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와 같은 질문 아닙니까?”
“쯧쯧!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여자 타령이냐. 상계에도 심 노인과 꼭 닮은 놈이 하나 있었거든? 어떻게 됐는지 알아?”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요?”
“알아야 돼. 진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한때 즐겼던 여자가 임신을 했다고 알려 온 거야.”
“그래서요?”
알고 싶지 않다더니 심통은 구질구질한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사랑한 여자의 후견인이 임신한 여자를 죽였어. 그 일로 사랑한 여자와도 작별하고 말았지. 그게 난봉꾼의 말로야.”
“두 여자를 동시에 만났다니 부러운 놈이네요.”
“내 말 어디로 들었어? 그놈 인생이 박살 났다고.”
“즐겼으면 된 거죠. 저는 더 바라지 않습니다.”
“…….”
연적하는 할 말이 없었다.
비슷한 줄 알았는데 심통은 파비안보다 더한 인간이었다.
***
합비.
남궁세가.
이른 아침.
검왕 남궁벽이 아들의 방을 찾아갔다.
부상에서 회복 중인 아들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불과 몇 달 전에 기경팔맥이 끊어졌던 아들은 최근 들어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더불어 다 죽어 가던 아들의 눈빛도 덩달아 되살아났다.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아들의 상태를 들여다보는 게 남궁벽의 즐거움이었다.
“일어났느냐?”
“예.”
남궁천의 대답에 남궁벽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밴 탕약 냄새가 코끝으로 파고 들었지만 이전처럼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서탁 위에 빈 사발이 놓인 걸 보니 방금 약을 먹은 모양이다.
“몸은 좀 어떠냐?”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남궁벽은 말없이 아들의 손목을 잡았다.
진맥을 하려는 것이다.
잠시 후 손을 푸는 남궁벽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적하가 가르쳐 준 운기요상의 공법이 충허취혈공(沖虛就穴功)이라고 했더냐?”
“예.”
“부러진 뼈가 붙기도 전에 기경팔맥이 먼저 회복되다니. 내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남궁가에 또 하나의 보물이 생겼음이야.”
남궁가의 사람들은 대체로 무공에 대한 수집벽이 있다.
당대 가주인 남궁벽 역시 그랬다.
그러니만큼 충허취혈공을 남궁가의 경서각에 넣는 걸 당연시했다.
하지만 남궁천이 선을 그었다.
“아버지, 그건 적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순간 남궁벽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야 그렇지만, 적하도 반대하지는 않을 게다. 우리가 남도 아니고.”
부친의 말에 씁쓰름한 미소를 짓던 남궁천이 말했다.
“오늘부터는 연무장에서 몸을 조금씩 써 볼까 합니다.”
“그건 조금 더 두고 보자꾸나.”
“뼈도 거의 다 붙었는지 이제는 움직일 만합니다.”
“서두를 것 없다.”
부친의 말투에서 묘한 걸 느낀 남궁천이 물었다.
“제가 연무장에 나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적하가 상계에서 돌아왔으니 남맹도 다시 활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러니 저도 빨리 몸을 만들어야지요.”
조급해하는 아들에게 남궁벽이 설명하듯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남맹과 호천맹은 한솥밥을 먹던 사이다. 그렇기에 호천맹 무인에게 칼끝을 겨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궁천은 부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극문이 남경을 떠난 뒤로 남직례성은 남맹의 것이 됐다.
더 이상 호천맹과 싸울 일이 없는데, 칼끝을 겨누다니?
“지금 남맹을 움직이는 동인(動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와부호에서 네가 크게 당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공사에서 십대고수들이 나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포공사의 일로 피해를 입은 건 내가 아니라 호천맹이다. 그것으로는 남맹 무인들의 투기를 일깨우기에 부족하다. 하지만 네가 처한 상황은 다르다.”
남궁벽은 아들을 지그시 보았다.
남궁천이 누워 있을수록 남맹 무인들의 복수심도 강해진다. ‘서두를 것 없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제야 남궁천은 부친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직례성 밖으로 세를 넓히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천하를 호천맹과 남맹으로 양분할 생각이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 남맹의 세가 약하면 서서히 호천맹에 잠식당하다가, 종국에는 먹히고 말 것이다. 그런 꼴을 보자고 남궁가가 피를 흘린 것은 아니지 않느냐?”
“호천맹과 천하를 양분하시겠다고요? 피가 강을 이룰 겁니다.”
남궁천이 참담한 눈으로 부친을 보았다.
호천맹의 팔다리를 자르는 일이니 천하가 피에 잠길 터였다.
그러나 남궁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아. 남궁가는 남직례성의 패주가 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 하물며 천하의 반을 차지하는 일인데, 그만한 일은 각오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야 유명교나 마교와 무엇이 다릅니까?”
“저들은 정복하기 위해 그랬지만, 남맹은 오래도록 강호에 살아남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남궁천은 연적하를 끌어들였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적하가 반대할 겁니다.”
“적하가 상계로 가기 전에 그런 나의 뜻을 밝힌 바 있지만,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에둘러 말한 것이라 의미가 제대로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궁벽은 왠지 이제는 연적하의 팔이 안으로 굽을 것 같았다.
상계를 다녀온 연적하는 무슨 일을 겪었는지 가족밖에 몰랐다.
‘그러니 이전처럼 장인의 뒤통수를 치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