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98
1398회. 사과한다면 없던 일로 해 주리다
본래라면 철혈검 장도우는 석경장 식솔들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적하는 딸과 월아, 금아의 이야기를 듣느라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건 십전무후 남궁연과 구천노도 심통도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독히 불운하다고 해야 할지, 장도우는 아무런 제지 없이 연적하 가족의 지근거리에 도달했다.
낯선 중년인이 다가오자 뒤늦게 연적하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처음에 그는 누군가가 인사를 하러 온 줄로 생각했다.
소호에서는 종종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착각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도우가 미모의 여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실례하오. 나는 황룡방의 부방주 철혈검이라 하오. 우리 방주님이 그쪽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이름이 어찌 되시오?”
장도우는 노인과 청년은 안중에도 없었다.
심통만 해도 이미 반박귀진에 든 지 오래라 평범한 시골 늙은이처럼 보인 까닭이다.
연적하와 남궁연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누구 하나 날붙이를 소지하지 않아 상인이나 문사 집안으로 오해하기 딱 좋았다.
한순간 기이한 적막이 연적하 일가의 자리에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얼어붙자 장도우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황룡방은 절강성의 명문 방파니 그렇게 놀랄 거 없소. 방주님의 눈에 들었으니 아가씨 집안에도 좋은 일만 있을 게요. 우리 방주님으로 말씀드리자면, 남맹에서도 모셔 가기 위해 안달을 내는 그런 분이시라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월아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가모님은 아가씨가 아니라 장주님의 부인이세요. 그러니 그만 돌아가세요.”
월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남맹의 손님이라고 생각해 화를 눌러 참았다.
하지만 장도우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저 정도 미모의 아가씨라면 혼인은 조금의 흠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진즉에 이 자리가 가족 모임이고, 청년이 그녀의 남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남편 있는 여자를 방주에게 바친 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번에는 장도우의 시선이 청년을 향했다.
“당신이 저 아가씨의 복받은 남편인가?”
“그런데?”
연적하는 중년인이 질척거리자 바로 말을 놓았다.
장도우는 화가 났지만 청년의 심사를 이해할 수 있어 참았다.
마누라를 빼앗길 상황에 저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
“저 아가씨가 우리 방주님에게 술 한잔 따르면 금 한 냥을 주지. 어떤가?”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
지금까지 돈으로 섭외한 유부녀도 적지 않았다.
그는 청년이 금 한 냥을 마다하면 열 냥까지 제시할 의향이 있었다.
여자의 그림 같은 미모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깝지 않았다.
월아와 금아는 중년인이 치근거리자 표독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하지만 장주가 나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에 감히 끼어들지 않았다.
심통이 나서려 하자 연적하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후 말했다.
“어이, 황룡방의 부방주라고 했지? 하는 짓을 보니 애매한 사람이네. 황룡방은 아마도 정사지간이겠지?”
“맞네. 그런데 자네는 말이 짧군.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상대를 봐 가면서 그래야지. 무림인은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 화가 나면 욕이 아니라 칼질부터 하거든.”
장도우가 점잖게 충고하자 연적하는 갑자기 남궁연을 돌아보았다.
“누님, 이 인간 말하는 거 봤어요? 정말 애매하지 않아요?”
그러자 남궁연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대화를 듣고 있던 심통이 연적하에게 물었다.
“공자님, 뭐가 애매하다는 겁니까?”
“봐 봐. 가족들 앞에서 남의 부인에게 찝쩍대는 말종들인데, 힘이 아니라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잖아. 부방주라는 놈이 힘을 앞세웠으면 진즉에 조상님 앞으로 보냈지. 그런데 나한테 창피를 당하고도 정중한 척하잖아. 물론 수틀리면 결국 힘을 앞세우겠지만……. 그래도 나름 돈으로 타협을 하려고 애쓴단 말이지. 애매한 새끼들. 이것들을 죽여 살려?”
그러자 심통이 남궁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남맹의 손님이라는데 죽이는 건 좀 그렇고……. 제가 데리고 나가서 잘 타일러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래? 누님, 그래도 되겠어요? 누님이 불쾌했다면 그냥 소호의 물고기 밥으로 주고요.”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보다 저런 사람들이 남맹의 손님이라니, 오히려 내가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남궁연의 말에 연적하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런 소리 마세요. 남맹이 언제 우리 말 들었나요. 심 노인, 데리고 나가서 잘 타일러 보내.”
청년과 그 가족들의 대화에 장도우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황룡방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설마 일반 백성들이 아니었단 말인가?’
장도우가 저들의 정체를 두고 고민할 때 심통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음을 날렸다.
―나는 구천노도 심통이라고 한다. 저 두 분은 석경장의 장주님과 가모님이시지. 지금부터 한마디도 하지 말고 조용히 나를 따라오거라.
순간 깜짝 놀란 장도우는 자리에 무릎 꿇고 사죄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심통이 암경으로 그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이윽고 심통이 그에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아가리 닥치고 따라오라고 했다. 한마디라도 하면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조용히 따라오겠느냐?
장도우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심통은 암경을 풀었다.
심통은 장도우를 데리고 황룡방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심통과 황룡방 방도들이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갔다.
심통은 그로부터 반 시진(1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자리로 돌아왔다.
코를 킁킁거리던 연적하가 의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잘 타일러 보낸 거 맞아?”
“당연하지요. 그래도 남맹의 손님들이라는데.”
“그런데 왜 몸에서 뒷간 냄새가 나?”
“냄새가 납니까?”
심통이 코로 제 몸 냄새를 맡자 월아가 슬쩍 물었다.
“사부님, 그 사람들을 뒷간으로 데리고 가서 야단치셨어요?”
“미쳤냐? 내가 그 더러운 데를 왜 가?”
“그런데 왜 뒷간 냄새가 나요?”
“방주와 부방주가 지릴 때까지 분근착골을 써서 그런다.”
월아와 금아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적하가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심통의 일 처리를 지적했다.
“방도들도 잘 타일렀어야지. 다 똑같은 놈들일 텐데.”
“두 놈을 둘러업고 갈 사람들은 남겨 둬야 하잖습니까?”
“한쪽 팔이라도 부러뜨렸어야지. 똑같이 나쁜 놈인데 누군 피똥 싸고 누군 멀쩡하면 돼? 안 돼? 심 노인도 일하는 걸 보면 이젠 늙은 거 같아.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서 허술한 거 같아도 빠트리지 않는다[天網恢恢 疏而不失]’고 하잖아.”
“그건…….”
심통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삼켰다.
실은 남맹의 손님이라고 해서 나름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었다.
하지만 남궁연 앞에서 그런 말은 하기 어려웠다.
“그건 뭐?”
“아닙니다. 제가 늙으니 쓸데없이 관대해진 모양입니다. 바로잡고 오겠습니다.”
심통은 누가 만류할 새도 없이 쌩하니 튀어 나갔다.
이때만큼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재빨랐다.
연지안이 의아한 얼굴로 남궁연에게 물었다.
“엄마, 심 할아버지 어디 갔어요?”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나간 거야. 금방 돌아올 거야.”
그녀의 말대로 심통은 일다경(약 20분) 만에 돌아왔다.
연적하가 숨을 헐떡이는 심통에게 쏘아붙였다.
“뭘 그렇게 발끈해?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가만히 앉아서 잔소리를 듣는 거보다는 낫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돕니다.”
“그래서? 잘 타일렀어?”
“예, 이제 황룡방은 오가다 여자들만 만나도 경기를 일으킬 겁니다.”
“잘했어.”
그제야 연적하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
청명절 무림대회 하루 전.
남맹.
정오 무렵, 남맹으로 세 무인이 다가갔다.
남맹의 경비 무사들 중 하나가 무인들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실례지만 어느 방파에서 오셨습니까?”
지금 남맹은 외부 손님들이 너무 많아 귀빈들만 들여보내는 상황이었다.
하얀 광목으로 팔을 싸맨 철혈검 장도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절강성에서 온 황룡방의 부방주외다.”
그러자 경비 무사는 군말 없이 황룡방 사람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황룡방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받은 총사부가 바쁘게 움직였다.
객청.
장도우 일행은 객청 앞에서 남맹의 고위 관계자를 찾았다.
총사부를 대표해 모용각이 객청으로 나가 황룡방 고수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모용각 총사입니다. 남맹 관계자를 찾으셨다고요?”
장도우가 불퉁한 얼굴로 운을 뗐다.
“‘황룡방은 절강성으로 돌아가겠다’는 방주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소.”
그에 깜짝 놀란 모용각이 되물었다.
“예에? 돌아가신다고요? 내일이 무림대회인데 이곳까지 오셔서 왜 그러시겠다는 겁니까? 혹여 숙소 문제로 그러신다면 방도들이 머무를 숙소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객청은 힘들겠지만 근처 민가에……..”
“잠자리 따위의 문제가 아니외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제야 모용각은 찬찬히 황룡방 고수들의 상태를 살폈다.
세 사람 모두 팔이 부러진 것처럼 광목천으로 둘둘 말고 있었다.
“무슨 일? 아주 큰일이 있었소.”
장도우는 어젯밤 소호에서 있었던 일을 살짝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그래서 내가 그 여협에게 합석을 권유했소. 시비로 보이는 계집애가 거절하더이다. 여협이 가타부타 말이 없기에 사례로 금 한 냥을 드리겠다고도 했소. 하늘에 맹세코 어떠한 압력을 행사한 적이 없소. 우리 황룡방이 사파도 아니고, 더구나 남맹의 초대를 받아 왔는데, 남맹의 앞마당에서 그런 짓을 벌였겠소?”
“물론 아니시겠지요. 그런 방파였다면 남맹에서 귀빈으로 모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혹시 그들과 다투다가 그렇게 된 겁니까?”
순간적으로 ‘호천맹의 수작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용각은 일단 황룡방을 편들었다.
“그렇소. 그들 중 한 노인이 방주님과 나를 분근착골로 고문했소. 그리고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우리 모두의 팔을 부러뜨렸소.”
“헉! 어찌 그런 무도한 짓을……. 그들이 누굽니까? 감히 합비에서 남맹의 귀빈들을 상하게 하다니!”
그러자 장도우가 걸려들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귀하가 보기에도 노인의 행동에 문제가 있어 보이오?”
“당연하지요. 그 정도의 일로 사람을 상하게 하다니……. 보통 악심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누굽니까? 남맹에서 조사하여 조금의 억울함도 없게 하겠습니다.”
그들을 호천맹의 고수로 믿은 모용각이 큰소리를 쳤다.
“그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구천노도 심통이라 하더이다.”
순간 모용각은 벙어리처럼 침묵했다.
구천노도 심통이라니?
여기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도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짐작하신 대로 우리 방주님께서 한눈에 반해 합석을 요청했던 여협은 십전무후셨소. 진즉에 그분이 십전무후임을 밝혔으면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났겠소? 하지만 십전무후 님과 남천 대협은 끝까지 정체를 숨겼고, 종국에는 우리 황룡방이 구천노도에게 수모를 당했소. 모용각 총사라 하셨소? 귀하는 약속대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줄 수 있소? 그렇게 해 준다면 내가 어떻게든 방주님을 설득해 남맹의 무림대회에 참석하겠소.”
한참 생각하던 모용각이 신중하게 물었다.
“부방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십전무후 님을 몰라보고 무례했던 것은 사실이니 큰 걸 바라지는 않겠소. 구천노도가 방주님과 나에게 사과한다면 없던 일로 해 주리다.”
사실 무림인들에게 구천노도 심통은 운수 대통한 사람이었다.
녹림의 그저 그런 마두가 무림의 원로 대접을 받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심통의 비루한 과거사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심통이 잘나가는 것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심통에게 당한 황룡방 무인들이 그런 부류였다.
그들은 연적하에게 수모를 당한 건 선선히 받아들였지만, 심통에 대해서는 파르르 치를 떨었다.
장도우의 제안에 모용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 대협과 십전무후를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심통이라면…….’
왠지 가능할 것도 같았다.
심통은 과거 구밀복검 심양각으로 불리던 마두였기 때문이다.
그의 무공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 ‘그의 심계라면 남맹을 위해 머리를 숙여 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알겠습니다. 남맹을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