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0
140회. 노는 물이 아주 다른 분들인 줄 알았거든요
연적하는 녹림에 몸담고 있지만 구천노도 심통처럼 제멋대로인 사람은 아니다. 그는 나름 공동체의 규칙을 존중하고,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며 살았다.
봉무방이 정의맹 식구라는 이름으로 남궁연과 진설하를 데리고 갔을 때 지켜본 것도 그래서다.
만약 봉무방이나 여자들이 사파에 속했다면 엎어도 진즉에 엎었을 것이다.
하지만 녹림인 그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려 했지만 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나 오십이 넘은 남자가 오라버니 운운하며 수작을 걸 때는 귀싸대기를 날리고 싶었다.
연적하에게 남궁연은 살아 있는 구천현녀이며, 누이이며,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다른 사람들이야 질 낮은 농담으로 받아들일지 몰라도 그는 아니다.
진설하가 ‘사람이 다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자 ‘무도한 자들을 제압하라’고 명한 것도 거슬렸다.
그에게 몇 사람 다치는 건 일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일련의 실망스러운 일로 정의맹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바로 그때 커다란 깨달음이 왔다.
그것은 ‘정파든 사파든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다 비슷하다’라는 것이다.
정의맹의 방파라고 해서 대단한 인격자들로 생각했는데, 녹림의 호색한과 똑같았다. 녹림이나 봉무방이나, 그놈이 그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녹림도를 대하듯 하기로 했다.
“거기 아저씨,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꿇어.”
봉무방 방주 무진검 용유천은 얼떨떨한 눈으로 청년을 보았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봉무방 방주에게 꿇으라니?
설사 정의맹의 맹주라 해도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데 앳돼 보이는 얼굴의 청년이 그랬으니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도 하다.
용유천이 기막힌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자 연적하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꿇으라고.”
거듭된 말에야 용유천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미친놈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등주에서 봉무방 방주에게 그런 망발을 할 리가 없다.
주변에 있던 방도들이 거칠게 소리쳤다.
“뭐라는 거냐!”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뭐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싸움의 유불리를 떠나 방주가 무릎을 꿇으면 봉무방은 끝장이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진 틈에 용유천은 서우범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 즉시 방도들을 모아 와라.
이대로는 무리라고 생각한 용유천은 다른 제자들을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서우범이 조용히 반점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용유천이 청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흥! 감히 나에게 꿇으라고 하다니. 너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용유천은 저 매가리 없게 생긴 청년이 구천노도라는 고수를 믿고 설 친다 생각했다. 연적하를 자신보다 뛰어난 호위와 함께 다니는 사람으로 본 것이다.
연적하가 피식 웃었다.
“그러는 당신은 자격이 있어서 여자들에게 껄떡댄 거야? 앞으로는 그냥 오라버니라 부르라고? 그럼 나도 형씨라고 부르면 되겠네? 안 그래 형씨?”
그러자 용유천이 다소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영웅호색이라 했다. 나야 영웅의 반열에 든 사람이니 그래도 무방하다만, 너는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하느냐?”
“크크큿! 내가 볼 때 형씨는 영웅호색이 아니라 그냥 호색한이야. 왜 그런 줄 알아?”
“왜냐.”
“그건 바로 지금부터 형씨가 나에게 얻어맞고 눈물 콧물 줄줄 흘릴 거니까. 영웅이 얻어맞고 질질 짜는 거 본 적 있어?”
“미친놈.”
용유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자 문제로 숱한 시비를 일으키곤 했지만, 얻어맞고 눈물을 흘린 적은 없다. 자신에게 항의하다 얻어맞은 사람들이야 좀 있지만 말이다.
연적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형씨 같은 시정잡배 다루는 방법을 좀 알아. 사람 만드는 거 어렵지 않더라고.”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용유천은 시정잡배라는 말에 빠드득 이를 갈았다.
오십 줄에 접어든 일파의 수장이 새파란 애송이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놈이 딱 그 꼴이로구나. 내 오늘 친히 네놈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가르쳐 주마.”
용유천은 슬쩍 구천노도의 눈치를 살폈다.
행여나 그가 끼어들어 자신을 핍박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실실 웃으며 팔짱을 끼는 걸 보니 그럴 일은 없어 보인다.
연적하가 용유천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용유천도 자리에서 한 걸음 밖으로 빠져나와 철탑처럼 굳건하게 자세를 잡았다.
상대가 대차게 나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단히 준비를 한 것이다.
그리고 막 검을 뽑으려는 순간, 시야에서 갑자기 청년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응?’
용유천은 검을 뽑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마치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걸어오던 사람이 왜 갑자기 사라진단 말인가
그때 ‘꽝!’ 소리와 함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치 머리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날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가 태풍에 휘말린 나무처럼 격하게 춤추고 있었다.
퍽.퍽.퍽.퍽.
단조로운 타격음이 계속 귀를 울렸다.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맞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너무도 낯설고 이질적인 모습에 고통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이러다가 죽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혼이 빠져나간 걸 보니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잡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순간 밀물처럼 거대한 고통이 머리로 밀려 들어왔다.
불에 달군 바늘로 푹푹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 얼굴에서 점차 머리통 전체로 번져 나갔다.
주먹에 맞을 때마다 얼굴 살점이 한 점씩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오십을 넘긴 용유천의 입에서 아이처럼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악! 악…….”
‘검을 뽑아 맞서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이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랐다.
하늘이 그런 바람을 들어준 것일까?
폭풍처럼 몰아쳐 오던 폭력의 손길이 멎었다.
용유천은 코피를 줄줄 흘리며 멍하니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연적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아무리 봐도 현실을 망각한 표정이다.
“반성을 하라니까 생각 없이 맞고 서 있네? 형씨, 지금 철두공 연마하고 있는 줄 알아? 지금 왜 처맞고 있는지도 모르겠지? 생각 좀 하라고 생각.”
연적하가 검지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툭툭 쳐보였다.
그제야 용유천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맞았다는 걸 알자 뜨거운 것이 얼굴로 확 치밀고 올라왔다.
“이놈!”
용유천은 분노의 일성과 함께 검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막 검 손잡이가 닿았을 때다.
다시 눈앞에서 불이 번쩍였다.
그리고 용유천의 머리통이 태풍에 휘말린 것처럼 이리저리 휘둘려졌다.
퍽.퍽.퍽.퍽…….
용유천은 저도 모르게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상체를 웅크렸다.
기이하게도 그는 연적하에게 맞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거부감 없이 몸을 맡기고 있었다.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말이다.
용유천이 상체를 숙이자 연적하는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았다.
퍼억. 퍼억. 퍽.
봉무방도들은 저항 없이 맞고 있는 용유천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뭐가 두려운지 그는 칼을 뽑지도 못했다.
평소 호방한 성격의 용유천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광경이다.
그렇게 반각쯤 지났을까?
이러다가 죽겠다고 생각한 용유천이 체면 불고하고 애원을 했다.
“그, 그만! 용서해 주시오! 내가 잘못했소!”
연적하가 발길질을 멈추었다.
“꿇으라고.”
“으으…….”
잔뜩 웅크리고 앓는 소리를 내던 용유천이 결국 무릎을 꿇었다.
연적하가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형씨, 이제 제대로 된 사과를 해 봐.”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오. 용서해 주시오.”
“형씨가 뭘 잘못했는데?”
“호, 호색?”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모르지 않는다.
용유천도 영웅호색이라 떠들어 댔지만 자신이 속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 왜 그랬어?”
“수양이 부족해서…….”
“똑바로 살자고. 정의맹이라면서 왜 시정잡배들처럼 행동해? 그러니까 심통 같은 사람에게 위선자라고 욕을 먹는 거잖아. 형씨는 녹림보다 못해. 최소한 녹림은 위선자 소리는 듣지 않는다고.”
“…….”
용유천은 면목 없다는 듯 눈을 내리 깔았다.
살다 살다 녹림도에게 위선자 소리를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때 거칠게 문을 열고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서우범이 봉무방의 방도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서우범은 방주가 무릎 꿇고 있는 걸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바, 방주님?”
서우범의 부름에 용유천이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방주의 뭉개진 얼굴을 발견한 서우범은 황급히 도를 빼 들었다.
스릉.
용유천은 그를 만류하지도, 공격을 지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연적하에게 제압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라 눈 뜨고 구경만 했다.
서우범은 얼떨결에 칼을 뽑았지만 바로 덤비지 않았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다.
그가 망설이고 있을 때 심통이 차갑게 말했다.
“이놈! 내가 공자님 앞에서 날붙이를 꺼내 들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아!”
서우범은 재빨리 도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용유천에게 물었다.
“방주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용유천이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멍청한 놈. 칼을 뽑았으면 일단 휘둘러 볼 일이지. 묻긴 왜 물어.’
서른이나 되는 인원을 달고 온 놈이 적의 눈치를 살피다니 한심할 뿐이다.
“보면 모르느냐. 결과에 승복한 것이다.”
용유천의 말에 서우범은 뻘쭘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와 함께 온 서른 명의 방도들도 우물쭈물 뒷걸음질 쳤다.
무덤덤한 눈으로 용유천을 내려다보던 연적하가 뒤끝 있게 말했다.
“형씨. 앞으로 잘해. 내가 지켜볼 거야.”
용유천은 계속된 ‘형씨’라는 말에 울컥 했지만 이미 기가 꺾인 터라 반발하지 않았다.
이윽고 탁자 방향으로 의자를 돌린 연적하가 남궁천과 설차수 일행에게 손짓했다.
“형님! 설 형! 이쪽으로 와요! 여기 빈자리가 많네.”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던 남궁천과 설차수, 유근식이 자리를 옮겼다.
일행이 한자리에 모이자 연적하가 웃으며 말했다.
“방주와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줄 알았으면 진즉에 자리를 만들 걸 그랬어요. 정의맹이라길래 노는 물이 아주 다른 분들인 줄 알았거든요.”
남궁천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녹림인 연적하에게 정파의 좋은 모습만 보여 줘도 시원치 않은데 그러지 못해서다.
연적하의 관심이 멀어지자 용유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그의 뒤통수를 향해 연적하가 소리쳤다.
“형씨! 우리가 먹은 거 계산한다고 했지? 잘 먹을게. 주인장에게 확실히 말해 놔. 한 입으로 두말하면 내가 바로 찾아갈 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부드럽게 안 끝나.”
그 말에 용유천은 흠칫 몸을 떨었다.
역시나 잔악한 녹림답다. 자신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어 놓고서 부드럽게 끝냈단다.
‘제기랄. 어쩌다 저런 놈과 엮여서…….’
미림반점을 빠져나가는 용유천의 어깨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