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02
1402회. 나무를 보려 하지 말고 숲을 보거라
‘심 노인이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는 연적하의 대답에 검왕 남궁벽은 짐짓 담담한 척 표정을 관리했다.
구천노도 심통은 어쩌면 천하십대고수들에 견줄 만한 고수일지 모른다.
그런 심통에게 주의를 준다?
정말 심통의 무위가 그 정도에 이르렀다면 씨도 안 먹힐 소리다.
그를 나무라다가 자칫 문제가 커질 수도 있다.
‘그 사람도 저를 닮아서’라는 연적하의 말대로라면 좋게 넘어갈 리 없다.
남맹 맹주인 자신과 심통이 싸운다?
물론 생사대결까지 갈 리는 없지만 결코 자신에게 유리한 싸움은 아니다.
녹림 출신으로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심통과 달리 자신은 남맹의 맹주인 까닭이다.
“너의 사람인데 내가 나무라도 되겠느냐?”
이 말은 즉 ‘연적하 네가 주의를 주라’는 소리다.
“장인어른.”
“말해라.”
“저는 심 노인의 행동을 나무랄 마음이 없습니다. 제 앞에서 모용각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그의 혀를 뽑았을 겁니다.”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하마.”
연적하의 성정을 아는 남궁벽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제삼자인 심통과 달리 연적하는 희롱당한 부인의 남편이다.
설사 그가 홧김에 모용각을 때려죽였다 해도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대화에 진전이 없자 남궁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연적하가 말했다.
“장인어른. 저는 남궁세가의 의협심 앞에 늘 부끄러움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나무를 보려 하지 말고 숲을 보거라. 심통을 만나러 가니 배웅할 것 없다.”
말을 마친 남궁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객청을 나선 남궁벽은 곧장 심통의 거처인 고월각으로 향했다.
때마침 제자들을 지도하던 심통이 그를 보고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 남궁벽이 슬쩍 운을 뗐다.
“내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 왔네. 주변을 좀 물렸으면 하는데.”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심통은 월아와 금아를 안채로 보냈다.
둘만 남게 되자 남궁벽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림대회 전날 밤에 자네가 남맹의 총사에게 손을 댔다지?”
“모용각이라는 놈이 자꾸 헛소리를 하기에 그리했습니다.”
“전후 사정은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모용각의 행동은 총사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네. 물론, 나도 개인적으로는 자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네. 하지만, 총사부의 지시에 따른 모용각에게 손을 댄 것은 과했네.”
“…….”
심통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어쨌든 상대는 남맹의 맹주이자, 연적하의 장인인 때문이다.
“적하를 만나기 이전에 자네의 별호가 구밀복검이었다지? 그렇게 불릴 정도로 심계가 깊다면, 내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네.”
“예…….”
심통이 맥 풀린 음성으로 답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남맹의 선택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석경장의 일을 석경장이 알아서 하듯, 남맹의 일은 남맹에 맡겨 두게. 남맹을 욕보이려는 게 아니라면 말일세.”
“남맹을 욕보이려고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말았지.”
그 바람에 정파가 좀처럼 하지 않는 음험한 짓까지 벌여야 했다.
남궁벽이 대총사 반천일검 모용문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이후에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떤 이유로든― 심통이 남맹의 일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 점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심통은 사과에 선을 그었다.
노련한 남궁벽은 심통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누구라도 자기 기분을 건드리면 손쓰겠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확실히 이런 건 적하를 닮았군.’
그렇다고 아무나 그의 흉내를 내도 되는 건 아니다.
하물며 남맹의 맹주이자, 검왕의 앞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네에게 석경장이 소중하듯, 나에게도 남맹이 소중하네. 누구라도 남맹을 욕보이면 내가 용서하지 않아.”
“맹주님.”
문득 심통이 심유한 눈으로 남궁벽을 응시했다.
“할 말이 있나?”
“맹주님은 따님이신 십전무후보다 남맹이 더 소중하십니까?”
“걱정해 주는 척하지만 흉중에 칼을 숨겼다. 과연 구밀복검답군. 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지. 내가 그따위 말장난에 넘어가 줄 성싶은가?”
스스로 찔리는 바가 있던 남궁벽은 도리어 심통의 약점을 후벼 팠다.
차라리 칼부림을 할지언정 비난받고 싶지 않아서다.
돌연 심통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탁하게 웃었다.
“흐흐흐!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실로 가관이군. 그런데 당신은 나의 장인도 아니면서 뭘 믿고 도발을 하지?”
“후후.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사람은 고쳐서 쓰는 법이 아니라 들었다. 그대 같은 독버섯이 석경장에 어울린다 생각하나?”
“독버섯이라고? 흐흐흐! 흐하하핫!”
한참 동안 큰 소리로 웃던 심통이 웃음을 뚝 그치고 말했다.
“내가 독버섯같이 살았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세를 넓히기 위해 온갖 잡놈들을 다 끌어모으는 당신은 뭐지? 파리들이 꼬이는 걸 보면 딱 똥 덩어리인데. 그래도 똥보다는 버섯이 조금 낫지 않나?”
남궁벽이 쓰게 웃으며 심통과 거리를 벌렸다.
비록 자신이 먼저 도발했지만 똥 덩어리는 좀 심했다.
“세상 많이 변했군. 구밀복검 따위가 검왕의 면전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제아무리 석경장의 일원이라도 용서받기 어렵다는 것은 알겠지? 적하를 생각해 팔 하나만 거두어 가겠다.”
말과 함께 남궁벽이 고색창연한 검을 천천히 뽑았다.
심통 역시 박도를 뽑더니 칼끝을 지면으로 향하게 했다.
두 사람의 몸에서 일어난 태산 같은 기파가 한가운데서 맞부닥쳤다.
쿠쿠쿠쿠―!
집채만 한 맷돌을 갈면 이런 소리가 날까?
하늘이 울리고, 땅이 진동했다.
드드드드―!
왈그락! 덜그럭―!
기파에 휘말린 고월각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삐그덕거렸다.
남궁벽은 ―상대를 무시하던 것과 달리― 생사대적을 만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단 한 번이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남궁벽은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단 일검에 승부를 보지 못하면 상대에게 농락당할 뿐이라는 것을.
어차피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이상 죽을 때까지 싸울 일은 없다.
단 일검.
일검으로 승패를 가르기만 하면 된다.
극한으로 집중을 한 탓일까? 문득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꿀꺽!’ 하고 목울대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오감과 기감이 확장되어 천지 속에 완전히 녹아든 기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기혈경(意氣血勁)의 사관(四關)―창궁대연신공의 성취 단계―마저 뛰어넘은 의기교태(意氣交泰)의 경지.
천운이 닿아 한순간 유명교와 싸울 때도 이르지 못한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다.
검왕 남궁벽의 검이 영원 같은 찰나의 순간을 가로질렀다.
파앗―!
정지한 시간 속을 남궁벽의 검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이건 검강이 아니라 그 어떤 초월적 수법으로도 막지 못한다.
연적하라고 이걸 당해 낼까!
득의양양한 남궁벽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 반짝였다.
그것은 처음에는 너무 미미해 은가루가 빛을 반사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티끌 같던 빛은 거대한 벼락이 되어 검끝을 강타했다.
번쩍―!
꽈르르릉―!
죽음의 충격이 이러할까?
남궁벽은 찰나지간에 육과 혼이 분리되는 경험을 했다.
싸움은 남궁벽의 바람대로 단 일격에 끝났다.
남궁벽이 석상처럼 굳자 심통은 천천히 박도를 거두었다.
복사꽃 향기 머금은 바람이 고월각을 스치고 지나갔다.
숯가마에서 막 기어 나온 것 같은 몰골로 서 있던 남궁벽이 물었다.
“이것은 무슨 수법이오?”
무공광답게 남궁벽은 이런 순간에도 상대의 도법에 관심을 보였다.
“뇌천대암(雷天大巖).”
구주 천뢰종의 무공이지만 심통은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훌륭하군. 조금 전 선배에게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소.”
심통을 부르는 남궁벽의 호칭이 ‘자네’에서 ‘선배’로 변했다.
사실 나이를 생각하면 남궁벽보다 심통이 위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가? 나는 진심 아닌 적이 없었네.”
심통이 지금까지 했던 말을 떠올리던 남궁벽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선배. 이 몸이 고월각에서 잠시 쉬었다 가도 되겠소?”
다리도 후들거렸지만 까맣게 그을린 옷을 갈아입고 씻어야 했기에 한 소리다.
남궁벽의 몰골을 살피던 심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까지만이라면 허락하지.”
“감사하오.”
남궁벽이 힘겹게 걸음을 옮겨 고월각으로 들어갔다.
남궁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심통은 조심스럽게 호흡을 조절했다.
폭발할 것처럼 끓어오르던 내부가 겨우 가라앉았다.
안도의 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는 심통의 귓가로 전음이 들려왔다.
―심 노인, 무리하지마. 그러다 수명 줄어.
“흐흐.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검왕을 이겨 보겠습니까?”
―장인어른 분해서 잠 못 이루시겠네.
“바로 말투 바뀌는 거 보셨습니까? 검왕도 같은 사람이었네요. 흐흐흣! 으윽!”
웃다가 말고 심통은 가슴에서 밀려오는 격통에 신음을 흘렸다.
―장인어른 미워하지 마. 장모님 살아 계실 때는 저러지 않았어.
“저보다 약한 사람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흐흐.”
―어휴. 헛소리 말고 조용한 데 가서 진기요상이나 해.
연적하는 전음을 끝내고 안채로 돌아갔다.
딸과 시간을 보내던 남궁연이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됐어?”
“심 노인이 아슬아슬하게 이겼어요.”
심통이 이겼다는 말에 남궁연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가 구주에서 천뢰종 제자로 있던 걸 알아서다.
“다친 사람은?”
“두 사람 다 가벼운 내상만 입었어요. 하루 정도 정양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런데…….”
“왜?”
“뇌기에 장인어른이 좀 탔어요. 특히 머리카락과 의복이.”
“옷가지를 챙겨 드려야겠네. 고월각에 계신 거지?”
“예.”
아까만 해도 부친에게 냉랭하던 남궁연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가족의 연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밤이 깊어지자 남궁벽은 심통과의 약속대로 고월각을 떠났다.
그 뒤로 오랫동안 심통은 얼굴에 웃음을 달고 살았다.
당운망이 구천노소(九天老笑)로 별호를 바꾸라고 할 정도였다.
오월이 되자 남맹의 ‘청명절 무림대회’에 맞서 이번에는 호천맹의 ‘단오절 무림대회’로 천하가 들썩거렸다.
칠파이문의 제자, 속가제자, 혹은 이번 기회에 칠파이문과 연을 맺으려는 무인들이 하남성으로 몰려갔다.
그 인원수는 남맹의 무림대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즈음 절강성에서 기이한 소문이 나돌았다.
남맹 무림대회에 참가한 황룡방주와 방도들이 실종됐다는 것이다.
그 일을 두고 남맹의 짓이니, 호천맹의 짓이니, 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혀 다 빠져 죽었느니 하는 말들이 무인들 사이에 떠돌았다.
절강성 방파들은 대체로 남맹과 관계됐다고 믿는 추세였다.
호천맹에서 손을 썼다면 황룡방만 실종됐을 리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남맹과 호천맹은 서로 상대의 짓이라 주장했다.
비방의 끝은 무력 충돌이다.
남맹이 먼저 ‘황룡방의 복수를 하겠다’며 들고일어났다.
남맹의 사신대(四神隊)가 하남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무림대회에 참가하려는 방파들을 말로 설득해 돌려보냈다.
돌아가기를 거부하면 칼부림이 일어났다.
그에 대응해 호천맹에서 수호대라는 이름으로 무인들을 파견했다.
그렇게 황룡방의 복수를 핑계로 남맹과 호천맹 간에 전쟁이 재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