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07
1407회. 그 사람 봤어요?
심통이 괜히 딴지를 걸었지만 월아의 혼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스스로 강호를 떠났다 생각하던 연적하는 남궁세가와 의형제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나 혼례식 당일에 석경장은 밀려드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칠파이문과 남맹의 수뇌부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심지어 녹림 총채주 파천마검 석무해와 칠마군까지 왔으니 말 다했다.
무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남직례성 성주는 물론 십대상방의 주인과 그의 대리인들까지 참석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들로 문지방이 닳는다던가.
월아의 혼례식은 오늘날 연적하의 위상을 보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적하는 질색을 했지만 외부인들의 방문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혼례식날 환우검 선우담(선우세가 가주)을 따라왔던 셋째 아들 선우영이 금아에게 반한 것이다.
선우세가의 응원 속에 선우영은 뻔질나게 석경장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석경장에서는 다시 한번 혼례식이 열렸다.
이번에는 월아의 혼례식보다 더 많은 무인과 상방, 관리 들이 참석했다. 신랑 측이 무림의 오대세가 중에 하나인 선우세가니 당연하다.
금아가 시집을 가자 석경장에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적적해진 연지안이 갑자기 약제당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의약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이모인 한채연의 딸 이연지와 놀기 위해서다.
이연지는 연지안보다 한 살 적었지만 몸이 허약해 약제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설상가상 성격마저 내성적인 이연지는 연지안이나 월아, 금아와 맞지 않았다.
이래저래 원기 왕성하던 연지안은 항상 월아, 금아와 어울려 다녔다.
하지만 월아, 금아가 시집을 간 지금 연지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다행히 연지안과 이연지는 성격은 달랐지만 둘 다 성품이 좋았다.
만약 누구 하나 지랄맞았다면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연지안은 새 친구를 사귀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고월각에 홀로 남은 심통이다.
제자라고 하지만 가족처럼 지내던 월아와 금아를 시집보낸 뒤 심통은 부쩍 말이 줄었다.
깊은 주름 속 반짝이던 장난기 가득한 눈도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가을이 끝나 갈 무렵 심통은 감기에 걸렸다.
평소 하루 이틀 훌쩍이다 말았건만 이번에는 열흘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당운망이 특제 약을 지어 주었지만 심통은 좀처럼 털어 내지 못했다.
연적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월각을 찾아갔다.
“심 노인. 소호 얼기 전에 낚시 가야지.”
“그래야지요.”
대답과 함께 심통은 몇 번이나 밭은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던 연적하가 물었다.
“약은 먹었어?”
“예, 싫다고 해도 당가(당운망) 제자들이 강제로 먹이고 있습니다.”
“아니, 무슨 감기가 이렇게 오래가? 감기 맞아?”
“당가가 그러는데 맞답니다.”
“근데 왜 차도가 없어? 이름난 의원들을 좀 불러 볼까?”
“괜찮습니다. 솔직히 합비에서 당가 놈 의술이 가장 뛰어날 겁니다.”
“젠장.”
연적하의 입에서 욕지기가 흘러나왔다.
당운망의 의술로도 안 되는 감기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월아와 금아에게는 알리지 마십쇼. 분명히 한달음에 달려올 텐데, 괜히 그 애들에게 감기를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안 옮아. 옮을 거면 석경장 사람들 다 걸렸어.”
자신은 물론 하소백과 한채연도 하루에 서너 차례씩 들르지만 멀쩡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습니까. 한참 좋을 때를 즐기며 살게 내버려 두십쇼.”
“아이고. 누군 걸려도 되고, 누군 안 되고 그런 거야?”
“장주님도 찜찜하면 오지 마십쇼. 괜히 감기 옮고서 저를 탓하지 마시고.”
“감기가 무슨 역병인 줄 알아? 헛소리 그만하고 몸조리나 잘해.”
연적하가 역정을 내자 심통은 푸들푸들 웃었다.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도 연적하는 처음 오봉산에서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말투뿐 아니라 얼굴도 그랬다.
저 앳된 얼굴이 삼십 대 중반이라니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장주님은 나이를 안 먹습니까?”
“왜 안 먹어? 하루가 다른데.”
“크크큿! 쿨럭! 쿨럭! 쿨럭!”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다가 심통은 그만 기침을 터뜨렸다.
입에서 얼핏 피맛이 느껴졌지만 심통은 뱉지 않았다.
아침부터 격한 기침 끝이면 피가 비쳤기에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장주님도 이제 그만 나가 보십쇼.”
“왜?”
“저도 좀 쉬어야지요. 장주님도 손님이라 오래 있으면 제가 피곤합니다.”
심통은 연적하를 내보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못마땅한 듯 입술을 삐죽이던 연적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내가 천하를 뒤져서라도 구해다 줄 테니까.”
“예, 예. 배웅 안 나갑니다.”
“그래, 쉬어.”
심통에게 등 떠밀려 마루로 나간 연적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약제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제당에 들어서자 어디서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딸과 조카의 목소리다.
얼핏 웃던 연적하는 이내 침중한 얼굴로 당운망을 찾아갔다.
“당 노인.”
연적하가 부르자 당운망은 탐독하던 의서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주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당운망의 몰골을 본 연적하는 일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싹 마른 얼굴에 움푹 들어간 눈, 당운망의 상태도 심통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심통의 상태를 물으려고 왔지만 도리어 당운망이 걱정됐다.
“당 노인, 어디 아파?”
“아뇨? 건강합니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아, 요즘 심가의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나 싶어 의서를 좀 보고 있습니다. 피로가 누적돼서 그런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채연 누이와 소백이가 뭐라고 안 해?”
“정말 괜찮다니까요.”
“하아! 당 노인, 거울 좀 보고 살아. 심 노인 못지않게 얼굴이 상했어.”
“나이가 있는데 당연하지요. 그런데 왜 오셨습니까?”
연적하의 잔소리에 당운망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연적하가 마지못해 말했다.
“심 노인의 증상에 대해서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아니, 그런데 당 노인도 무리하지 마. 빈말이 아니라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
연적하가 복잡한 눈으로 당운망을 보았다.
남궁연의 말에 의하면 심통이 죽은 다음 날 당운망도 죽었다.
참 공교롭다 싶었는데 당운망의 몰골을 보니 왜 그런지 알 것도 같았다.
유명교주를 인연으로 심통과 당운망은 둘도 없는 절친이 됐다.
그래서 자기 몸을 축내 가면서 저러고 있는 것이다.
단지 심통을 잃은 상실감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러니 그렇게 됐지.
“심가의 증상이 어땠는데요?”
“……아까 기침을 하는데 피가 올라온 것 같더라고. 심 노인은 내색을 안 하는데, 피 냄새를 맡았어.”
“피요?”
당운망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밭은기침을 오래하는 게 영 신경 쓰였는데 피를 토했다니?
“안 좋은 거지?”
“속에서 올라온 피는 객혈이 아니면 토혈입니다. 객혈은 폐에 문제가 생긴 거고, 토혈은 위장에 문제가 생긴 거지요. 그걸 봤으면 객혈인지 토혈인지 알았을 텐데.”
“그 여우 같은 늙은이가 뱉지도 않고 꿀꺽 삼켜 버리더라고.”
“기침을 하다가 나왔으면 객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객혈이면?”
“폐에 아주 큰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심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당운망이 뒷말을 흐렸다.
연적하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고작 감기 두 달 앓았다고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거야?”
“장주님. 사람은 한 자루 초와 같습니다.”
“다 타면 꺼진다고?”
“예, 마지막에 가서 꺼지는 방식이 조금씩 다를 뿐입니다.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꺼질 수도 있고, 미풍이나 강풍에 꺼질 수도 있지요. 심가는 미풍을 만난 겁니다.”
“큰 문제라며 왜 미풍이래?”
“감기로 왔으니까요.”
“당 노인도 못 고쳐?”
“진맥을 다시 해 보겠습니다. 아침에는 큰 차이를 못 느꼈는데……. 하아!”
당운망이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흘렸다.
심통과 같은 무림의 고수가 감기로 두 달이나 골골거리다 객혈이라니?
이건 원기가 다하기 전에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제아무리 무림 고수도 정해진 수명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니까.
‘이 늙은이 입만 열면 반로환동이라고 떠들어 대더니…….’
무슨 반로환동이 머리털만 회춘을 한단 말인가!
당운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겨우내 기침을 하던 심통은 이듬해 봄이 오기 전에 죽었다.
심통이 죽은 다음 날, 당운망이 그를 따라가듯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이승을 떠났다.
연적하는 심통과 당운망의 장례식을 같은 날 치렀다.
이번에는 조용히 월아와 금아만 부르고 다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월아와 금아는 몇 날 며칠을 울었다.
그녀들에게 심통은 스승이자 아버지와도 같았으니 당연하다.
한채연과 하소백도 당운망과 함께 지내며 정이 든 탓에 월아 금아와 더불어 통곡을 했다.
비밀스러운 장례식 도중 ‘석경장에서 곡소리가 난다’는 소문을 듣고 남궁세가 가주 창천검 남궁천이 은밀히 찾아왔다.
그를 통해 천하무림에 구천노도 심통과 삼보절명 당운망의 죽음이 알려졌다.
석경장에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天崩之痛]’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떠들썩하던 월아와 금아의 혼례식을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반응이다.
심통이 녹림 출신이고, 당운망 또한 당가에서 내쳐진 사람이라 그런 것일까?
심통과 당운망이 죽은 뒤 연적하는 온종일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좋아하던 낚시도, 소호 유람도 끊었다.
그는 마치 세상과 담쌓은 사람처럼 석경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가.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중년이 되었으며, 중년은 원로가 되었다.
남맹과 호천맹은 여전히 천하의 패권을 두고 암암리에 경쟁했다.
사대천왕(남맹)과 호천칠군(호천맹)의 별호 앞에 붙어 다니던 ‘신진 고수’ 소리도 떨어져 나갔다.
남맹의 전대 맹주이던 검왕 남궁벽이 사망한 뒤 천하십대 고수라는 명칭은 사라졌다.
이를 두고 호사가들은 ‘포공사에서 천하십대고수 다섯이 남천 대협에게 패한 날, 그 명칭은 수명을 다했다’고 떠들어 댔다.
그렇게 한때 천하를 울리던 ‘천하십대고수’들은 ‘전대 고수’ 중에 하나로 자리매김됐다.
천하십대고수가 사라진 것처럼 무림에도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었다.
남맹과 호천맹의 무림대회로 뽑힌 청년 고수들이 천하를 종횡했다.
하지만 원가산 산자락에 있는 석경장만큼은 그런 세상의 변화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석경장은 언제나 잔잔한 호수 같았다.
어느덧 사십 대 후반에 접어든 남궁연은 대리인에게 합비의 사업장을 맡겼다.
연지안이 장성하여 밖으로 나돌자 연적하는 다시 서호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봄날.
서호에서 낚시를 하다 돌아온 연적하는 마당을 가로지르다 멈칫했다.
사랑채에서 연지안과 이연지가 깔깔거리며 떠들고 있었는데, 그때 한 이름이 귀에 박혔다.
“언니, 오늘 다관에서 그 사람 봤어요?”
“누구?”
“조현덕요.”
“풋! 그 이상한 사람?”
“제가 좀 알아봤는데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월아 이모가 그러는데 조 방주님 셋째 아들이래요.”
“그래서?”
“말 들어 보니까 사람은 착한 거 같더라고요. 관직을 얻으려고 글공부를 한다나?”
“마음에 들면 네가 만나 보든가.”
“아휴! 누가 마음에 든대요? 언니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런 거지.”
거기까지 들은 연적하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조현덕.
그는 몸이 허약해 혼인한 지 이 년 만에 돌림병으로 죽은 미래 연지안의 남편이었다.
이제 보니 벌써부터 딸의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새끼가 죽을라고.’
잔잔한 호수에 돌 한 덩어리가 떨어졌다.
연적하는 들고 있던 낚싯대를 내팽개치고 바람처럼 어디론가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