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21
1421회. 팔왕의 시대
모든 일은 치매에서 시작됐다.
십 년 전.
호광성.
여산현 광명촌.
천산을 떠난 마교가 대륙에 진출하려다가 남천 연적하에게 당해 되돌아간 후, 명왕교는 광명촌에 틀어박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백두마군이던 혼세천마 척진경, 혼천혈귀 강상피, 악불 방천각은 모든 미련을 버리고 죽으면 마물이 되고 마는 자기들의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교주가 천두마왕이 될 수 있는 구결을 전하지 않고 죽었으니 백두마군이 끝인 까닭이다.
설사 천두마왕이 된다 해도 남천 연적하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 그것에 미련을 두는 백두마군은 없었다.
그에 앞서 그들은 자신들이 애써 만든 십두마병들을 모조리 죽였다.
십두마병들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백두마군에 반기 들 여지를 없앤 것이다.
나머지 명왕교도들은 무림의 잡배들이라 그냥 금제한 뒤 종처럼 부렸다.
하지만 문제 해결은 요원했다.
유명교주처럼 태상정일강림신주(太上正一降臨神呪)를 아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맨땅에 머리를 부딪쳐 답을 구하는 꼴이다.
장장 이십 년을 참오 했으나 백두마군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 과정에서 더 큰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두고 이 짓 저 짓을 반복하다가 그만 척진경과 강상피가 주화입마에 들고 만 것이다.
광명촌에 무슨 천하의 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척진경과 강상피는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주화입마를 감내해야 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백두마군이 되면서 얻었던 초능을 상실하고, 더불어 머리에 이상까지 찾아왔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그들은 어느 날 홀연히 광명촌에서 모습을 감췄다.
광명촌에 홀로 남겨진 방천각은 극도로 몸을 사렸다.
그는 일체의 잡스러운 시도를 중지하고 초심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제 막 출가한 중처럼 매일 불경을 읽던 그에게 예기치 않은 운명이 찾아왔다.
백십이 세가 되던 해에 그만 치매에 걸리고 만 것이다.
방천각의 시중을 들던 사람이 셋 있는데 육자강, 진주희, 구사천이다.
그들 모두 광명촌에서 태어난 사람들로 강호의 사정에 무지했다.
물론 부모들에게 과거 잘나가던 유명교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힘이 있다면 이런 산골짜기에 숨어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유명교주, 백두마군, 십두마병, 천하십대고수, 남천 연적하에 관한 이야기는 아득한 과거이자 꾸며낸 무림의 전설에 불과했다.
당장 광명촌에서 제일가는 싸움꾼도 여산현에서 삼류 취급 받는데 무슨 얼어죽을 무림의 지배자란 말인가.
그들은 삼십 대가 될 때까지 모든 걸 구세대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여겼다.
광명촌의 유일한 종교인 명왕교에는 명왕의 부름을 받은 삼제(三帝)가 있다.
척진경, 강상피, 방천각이 그들이다.
그러나 척진경과 강상피는 오래전 명왕의 부름을 받고 사라졌다.
실제가 뭔지 모르지만 명왕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쳤다.
육자강, 진주희, 구사천은 어릴 때부터 삼제의 한 분인 방천각을 섬겼고, 그것은 나이가 삼십 줄에 들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마을 원로들은 방천각이 ―다른 삼제들처럼― 명왕의 부름을 받아 사라질 때까지 모셔야 한다고 했다.
세 사람은 마을에 하나뿐인 삼제 방천각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을까?
치매에 걸린 방천각이 세 사람에게 ‘십두마병이 되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십두마병은 마을의 전설이자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명왕의 부름을 받는 방법은 어렵지도 않았다.
그저 팔주령 앞에서 수도자의 머리를 자르며 짧은 주문을 외우면 됐다.
정말 그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명왕의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세 사람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수도자들을 은밀히 납치했다.
그렇게 오 년 동안 야금야금 오십여 명의 수도자를 납치했고, 세 명은 명왕의 초능을 받았다.
셋이 명왕의 힘을 얻자, 사라진 이제(二帝)를 봉양하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몰려왔다.
이제를 봉양하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병사하고 다섯이 남았는데, 셋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다섯에게 ‘십두마병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호광성에서 오 년 동안 백여 명의 수도자가 실종됐고, 다섯명의 십두마병이 늘어났다.
십두마병들은 스스로를 ‘팔왕’이라 칭하고 삼제의 아래임을 자처했다.
비록 아직은 광명촌 한정이지만 삼제가 가고, 팔왕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전쟁이다 뭐다 해서 유랑인들이 늘어 세상은 도사들의 실종을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초절정 고수가 된 팔왕은 발칙한 생각을 하게 된다.
‘십두마병의 숫자를 늘려 일단 호광성부터 접수하자’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십두마병의 숫자가 늘면 호천맹의 견제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방천각이 치매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
현재.
형산파.
팔왕의 하나인 천산왕, 적면귀 육자강은 호천맹 조장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은 조금 놀란 상태였다.
아무리 호천맹이라도 일개 조장의 무위가 예상을 뛰어넘은 탓이다.
그는 상대가 거리를 벌리려 하자 재빨리 칠성검법 일 초인 탐랑격(貪狼擊)을 날렸다.
탐랑격은 굶주린 늑대가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기세에서 따온 이름이다.
쐐애애액―!
검 끝에서 일어난 섬뜩한 검기가 비룡검 풍자운에게 몰아쳐 갔다.
풍자운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쳐 내며 조원들에게 힘껏 소리쳤다.
“모두 물러나라!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모인다!”
현무대는 작전을 나가기 전에 항상 후퇴할 장소를 지정해 둔다.
이번 경우는 장사였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조원들에게 ‘장사로 달아나라’고 명한 것이었다.
난생처음 조장이 밀리는 모습을 본 조원들은 지체하지 않고 달아났다.
대주급인 조장이 밀린다는 것은 현무대 본대가 상대해야 할 적인 까닭이다.
명왕교 수뇌부들이 달아나는 현무대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장내에는 감로왕과 잔월왕만 남았다.
감로왕, 요마 진주희는 육자강과 호천맹 조장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광명촌을 나선 이래 저런 고수와 만나기는 처음이다.
‘제법이군.’
그러나 천산왕의 상대는 아니었다.
광명촌에서 가르치는 그저 그런 검법으로도 호천맹 조장을 압도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들이 칠파이문의 무공을 배우면 얼마나 더 강해질까를 상상하다가 무심코 말했다.
“우리가 칠파이문의 무공을 배운다면 더 강해지겠지?”
그러나 잔월왕, 사군자 구사천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느 세월에? 그냥 지금 배운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저 조장이라는 놈을 봐. 호천맹의 간부지만 칠성검법도 당해 내지 못하고 있잖아.”
“칠파이문의 장문인들이나 호천칠군은 다르지 않을까?”
“겉모습만 따라 해서는 의미 없다. 무공의 오의를 모르는 한 칠파이문의 무공은 그림의 떡이야.”
“알아. 아쉬워서 해 본 소리야.”
그러는 동안 천산왕과 호천맹 조장의 싸움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콰창―!
강하게 날붙이가 맞부닥치는 소리와 함께 풍자운이 뒤로 날아갔다.
철퍼덕!
땅바닥에 나뒹굴던 풍자운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그의 검은 반토막이 나 있었다.
‘울컥!’ 피를 게워 내는 그에게 육자강이 달려가며 검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풍자운이 반토막 난 검으로 상대의 검을 막았다.
순간 천산왕의 검이 영활하게 반토막 난 검을 피해 안으로 파고들었다.
풍자운은 급히 상체를 틀었지만 자신에게 날아드는 검을 피하지 못했다.
검끝이 오른쪽 어깨를 길게 가르고 지나갔다.
상대의 한쪽 팔이 거지반 잘려 덜렁거렸지만 육자강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연이어 상대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칠성검격을 날렸다.
촤촤촤촥―!
날카로운 파육음과 함께 풍자운의 상체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마지막 일격을 날린 후 육자강은 과장된 몸짓으로 빙그르르 돌아서며 납검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우두커니 서 있던 풍자운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이윽고 육자강이 진주희와 구사천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고작 조장에게 너무 힘을 뺐군.”
진주희가 으쓱거리는 육자강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왜?”
“베였어.”
“진짜? 언제 당했지? 아! 씨브럴. 조장 따위에게 상처를 입다니 자존심 상하네.”
말과 함께 육자강은 찢어진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뒤늦게 화끈거리는 작열감이 느껴졌다.
조금만 깊었으면 내장이 주르륵 흘러나왔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처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육자강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체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호천맹을 쫓아갔던 수뇌부들이 우르르 돌아왔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육자강을 대신해 구사천이 물었다.
“어떻게 됐느냐?”
초로의 사내 하나가 머리를 굽실거리며 답했다.
“산 아래까지 뒤쫓았지만 놈들의 경신술이 너무 빨라서 모두 놓쳤습니다.”
“쯧!”
구사천은 혀를 찼지만 수뇌부를 탓하지 않았다.
조장의 무위를 볼 때 저들이 조원들을 놓친 건 어쩌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진주희가 헝겊을 길게 찢어 육자강의 허리를 칭칭 감싸 주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둘 사이가 끈끈하더니 커서도 저러고 있다.
시린 눈으로 진주희를 보던 구사천이 수뇌부들에게 턱짓을 했다.
“가서 도사 놈들 생포하는 걸 도와라. 호천맹에서 알게 됐으니 우리도 서둘러야 한다.”
“예!”
수뇌부들은 큰 소리로 답한 뒤 형산파 도사들을 포위한 교도들에게 달려갔다.
잠시 시끌벅적한 싸움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잠시 후 삼왕과 그들의 수하들은 생포한 도사들을 끌고 형산파를 떠났다.
다음 날.
사시 말(오전 11시) 즈음, 한 초로의 무인이 형산에 들어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랴부랴 석경장을 나선 운중룡 풍운비다.
그는 형산현의 객점에서 ‘어제 호천맹 무인들이 형산으로 간 뒤로 다시 보지 못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었다.
산문에 도착한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파리 떼가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것은 난도질 당한 도사의 시체였다.
‘호천맹 무인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는 점소이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설마…… 아니겠지.’
자신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풍자운은 후기지수들 중에 최강이다.
어지간한 사파는 그를 당해 내지 못할 터였다.
어쩌다 운 나쁘게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만날 수 있겠지만 그때는 달아나면 그만이다.
당금 무림에 아들이 달아나지도 못할 정도로 강한 상대는 많지 않았다.
그들이라면 석경장의 무공을 알아볼 테니 적당한 선에서 멈추리라.
풍운비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빠르게 산을 올랐다.
형산파의 문을 넘자 살풍경한 광경이 펼쳐졌다.
태청전 앞에 수십 명의 도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불길한 느낌에 숨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던 풍운비가 멈칫했다.
일반 무인 복장을 한 시체의 뒤통수가 눈에 익었다.
옷은 낯설었지만 체형과 뒤통수는 아무리 봐도 아들을 닮았다.
‘그럴 리가. 아닐 거야.’
그는 저 참혹한 시체가 아들이 아니기를 바랐다.
주춤주춤 시체에게 다가간 풍운비는 한순간 돌처럼 굳었다.
파리 떼에 가려져 있었지만 옆엎굴만 봐도 알 수 있다.
상체가 난도질당한 저 무인은, 자신의 외동아들인 풍자운이다.
“자운아…….”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던 풍운비는 시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석경장에서 일하다가 황화란을 만나 혼인한 후에 얻은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그 착하고 바르게 자란 아들이 형산에서 난도질당해 죽다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풍운비는 아들의 시체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인다.
아들의 죽음과 관계된 모든 이들을 죽여 없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