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28
1428회. 그동안 고마웠어
호천맹이 달라졌다.
본인들은 부인하겠지만 호천맹은 나약함과 무능의 상징이었다.
호천맹의 전신인 정의맹과 천지맹 시절에도 그랬지만, 칠파이문은 이권과 무관한 일에는 공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큰일이 벌어지면 납작 엎드려 풍파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칠파이문은 그걸 ‘순리에 맡긴다’고 표현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은 토벌대가 호광성으로 갔을 때, 며칠 저러다 말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토벌대는 며칠이 아니라 몇 달 동안 호광성을 이 잡듯 뒤져 명왕교를 찾아냈다.
지금까지처럼 순리에 맡기는 게 아니라, 눈에 불을 켜고 잡으러 다녔다.
토벌대는 명왕교를 뿌리째 뽑아내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구월에 호천맹을 나선 호천칠군들은 십이월이 돼서도 돌아가지 않았다.
십이월 보름.
호광성.
여산현 광명촌.
호천맹 토벌대는 마침내 꼭꼭 숨어 있던 광명촌까지 찾아냈다.
쥐 죽은 듯 숨어 있던 삼왕이 숨지면서, 세 명의 마인이 현세에 강림했다.
호천칠군의 여섯과 세 마인의 혈전은 꼬박 하루를 넘겼다.
새벽이 어스름하게 밝아 올 즈음.
검군 신중낙은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마지막 마인의 목을 베었다.
콰드드득―!
일각마인의 목을 시원하게 가르던 검이 중간에 걸렸는지 멈췄다.
일각마인이 기괴하게 웃으며 칼날 같은 손톱을 휘둘렀다.
절체절명의 순간 하늘에서 검 한 자루가 벼락처럼 일각마인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쩌어어억―!
일각마인의 몸이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검은 지면에 닿기 직전, 부드럽게 반원을 그리며 한쪽으로 날아갔다.
파츠츠츠―.
일각마인의 육신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탈진한 신중낙은 검을 회수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멀리서 이기어검으로 신중낙을 구한 무군 강무혼이 광명정 앞에 떨어져 내렸다.
“늦어서 미안하오.”
그러자 신중낙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무군 덕분에 화를 면했소.”
그러는 동안 호천칠군들이 하나 둘 무군과 검군 주위로 모여들었다.
조군 운예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때맞침 잘 오셨어요. 하마터면 십두마병과 싸우다 검군이 죽었다는 소리가 나올 뻔했네요.”
강무혼은 면목 없다는 얼굴로 딴청을 부렸다.
무군은 호천칠군 중에 최고수로 알려져 있었지만 방랑벽이 심해 남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윽고 기력을 회복한 신중낙이 자리에서 일어나 납검한 뒤 말했다.
“오늘 우리가 처리한 삼왕이 마지막 십두마병이오. 이제 남은 건 백두마군인데…….”
신중낙이 광명정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무혼이 그를 따라 광명정을 보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직접 보시오.”
신중낙의 말에 강무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광명정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광명정 안에는 한 노인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해 나이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승려처럼 맨질맨질한 머리도 주름으로 자글자글했다.
강무혼은 노인을 향해 살기를 흘렸다.
그래도 노인은 힘겹게 색색거리는 숨쉬기만 할 뿐, 기대했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강무혼은 노인에게 이상이 생겼음을 알았다.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이라도 놀라서 벌떡 일어나야 정상이다.
누가 봐도 숨만 붙어 있는 형국에 강무혼은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서 나갔다.
밖으로 나온 강무혼에게 신중낙이 말했다.
“그가 명왕교의 삼제 중 하나인 악불 방천각이오. 명왕교에 남아 있는 마지막 백두마군이라 하더이다. 십 년 전 치매에 들었는데 한 달 전쯤 쓰러졌다 하오.”
“저러다 죽을 것 같지만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 하지 않소?”
“그렇기는 하오만…….”
신중낙이 말끝을 흐렸다.
제정신도 아닌 데다, 자리에 누워 있는 노인을 죽이려니 영 내키지 않았다.
저항이라도 하면 모를까?
지금 이 상태에서 죽이면 악인 처단이 아니라 살인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무혼의 말이 맞다.
방천각의 시체에서 나올 마인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무방비 상태의 적을 죽이는 게 꺼림칙하다면 내가 하리다.”
강무혼의 말에 호천육군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신중낙처럼 누워 있는 노인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아서다.
강무혼은 그런 호천육군을 스윽 둘러본 후 다시 광명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일검에 노인의 목을 날렸다.
으드득! 으윽―!
머리를 잃은 몸통이 부풀어 오르고, 뒤틀리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강무혼은 노인이 변해 가는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탈피의 순간은 짧았다.
노인의 거죽이 찢어진다 싶더니, 십 척(약 3미터) 장신의 마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연히 마인의 머리가 천장을 뚫고 광명정 밖으로 튀어 나갔다.
와르르르―!
광명정이 무너져 내리자 강무혼은 재빨리 밖으로 나가 호천칠군과 합류했다.
마인의 머리에 난 두 개의 뿔을 확인한 신중낙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각마인이로구나.”
오연한 자세로 호천칠군을 둘러보던 이각마인의 눈이 강무혼에서 멈췄다.
곧이어 이각마인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쿨라민! 타파쎄.”
순간 강무혼의 얼굴이 흉칙하게 일그러졌다.
신중낙이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무군, 마인이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그러자 강무혼이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당신들을 죽이라는군.”
“그게 정말이오?”
신중낙이 황당한 얼굴로 강무혼과 이각마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나저나 강무혼은 마인의 말을 어찌 안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신중낙이 재차 물으려는 순간, 강무혼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놀랍게도 강무혼의 검 끝이 향한 곳은 신중낙이었다.
깜짝 놀란 신중낙이 강무혼의 검을 쳐 내며 소리쳤다.
“무군! 정신 차리시오!”
그러나 강무혼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중낙을 몰아쳐 갔다.
차차차창―!
강무혼과 신중낙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의 싸움을 보던 도군 등무령이 다른 호천사군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각마인의 술수에 걸린 것 같소! 이각마인부터 처치합시다!”
곧이어 호천오군들이 이각마인에게 몸을 날렸다.
그에 이각마인도 싸우려는 듯 광명정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호천오군과 이각마인의 싸움이 시작됐다.
각자의 영역에서 천하제일에 이르렀다는 도, 창, 조, 권, 독이 이각마인의 몸에 꽂혔다.
이각마인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이각마인의 장검 같은 손톱이 호천오군을 벼락처럼 쓸어 갔다.
신중낙과 강무혼은 백중지세였다.
본래라면 강무혼이 우세했겠지만, 정신을 조종당한 탓에 강무혼의 검격은 현묘함과 거리가 멀었다.
덕분에 신중낙은 강무혼과 싸우면서도 수세에 몰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몇 번이고 빈틈을 보인 강무혼에게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지만 참았다.
“무군! 강무혼! 정신 차리라고!”
호천칠군은 한 번도 서로를 친구로 여긴 적 없지만, 사십 년이나 함께 지낸 사이다.
자연히 다그치는 신중낙의 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신중낙의 간절한 바람이 닿은 것일까?
미친 듯 신중낙에게 칼을 휘두르던 강무혼이 한순간 멈칫했다.
그틈에 신중낙은 내력을 담아 사자후를 내질렀다.
“갈(喝)!”
도력이 깃든 일갈에 강무혼은 정신을 차렸는지 갑자기 좌우를 살폈다.
이윽고 강무혼이 신중낙에게 물었다.
“내게 뭐라고 했소?”
“정신 차리라고 했소. 무군이 마인의 소리를 들은 뒤에 갑자기 나에게 칼질을 해 댔소.”
“아! 그게 꿈이 아니었군. 미안하게 됐소.”
“꿈에서도 해서는 안 될 일이 아니오?”
그러자 무군이 능청맞은 얼굴로 말했다.
“꿈속에서야 무슨 일이든 못 하겠소? 뭐든 다 할 수 있으니 꿈인 게지.”
신중낙은 꿈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각마인의 처치가 우선인 까닭이다.
“그래서 이젠 괜찮아진 거요?”
“보시다시피.”
말과 함께 강무혼은 들고 있던 검을 이각마인에게 던졌다.
쐐애애액―!
찬란한 빛에 휘감긴 검이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이각마인에게 날아갔다.
빛에 휩싸인 검이 날아들자 이각마인은 날파리를 쫓듯 손을 휘둘렀다.
째앵―!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 났지만, 이각마인의 손톱도 잘려 나갔다.
튕겨 난 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선회해 이각마인을 노렸다.
이각마인은 감히 쳐 내지 못하고 이번에는 상체를 틀어 피했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따라붙은 이기어검이 이번에는 뿔을 요격했다.
콰작―!
뿔 하나가 잘려 나가자 이각마인은 치명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
이각마인이 광포하게 날뛰었지만 손발에 담긴 힘은 이전과 달랐다.
그때부터 호천칠군은 이각마인의 뿔을 노렸다.
호천칠군이 노골적으로 뿔을 노리자, 이각마인은 뿔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혼전의 와중에 창군 고관천의 창이 하나 남은 뿔을 때렸다.
‘짝―!’ 소리와 함께 절반쯤 잘린 뿔이 덜렁거렸다.
이각마인이 또다시 길게 포효하는 순간, 운예지의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뿔을 잡아챘다.
운예지는 뿔을 그대로 뽑은 뒤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쿠어어어―!”
마지막 남은 뿔이 뽑혀 나가자 이각마인이 고통스러운 목울음을 울었다.
이각마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할 때, 무군과 검군의 검이 각각 이각마인의 가슴과 등을 찔렀다.
순간 이각마인은 앞뒤로 무군과 검군을 달고 운예지를 향해 치달렸다.
그리고 자신의 뿔을 전리품처럼 들고 있는 운예지를 덮쳤다.
이각마인의 손톱이 운예지에게 닿기 직전, 무군이 버럭 소리치며 검과 함께 선회했다.
콰드드득―!
신검합일한 무군이 이각마인의 가슴을 뚫고 나갔다.
이각마인의 칼날 같은 손톱이 운예지의 코앞에서 멈췄다.
그중 하나는 운예지의 볼에 닿은 상태였다.
츠츠츠츠―!
이각마인의 몸이 재가 되어 떨어져 내리다, 가벼운 바람에 흩어졌다.
뒤늦게 운예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운예지의 손에 들려 있던 팔뚝만 한 뿔도 이내 고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호천칠군의 주위로 토벌대가 하나 둘 모여들었다.
다들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무려 넉 달간이나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잠시 후 총군사의 명으로 명왕교 경전을 한곳에 모아 불태울 때 누군가 소리쳤다.
“눈이다!”
하나 둘 흩날리던 눈은 이내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펑펑 쏟아졌다.
현무대 조장 풍자운의 죽음으로 촉발된 명왕교 토벌은 그렇게 끝이 났다.
***
새해가 밝았다.
천하는 새해를 맞아 떠들썩했지만 석경장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조용했다.
풍자운의 죽음 이후 연적하가 일체의 외부 손님을 받지 않아서다.
풍자운과 사귀던 옥녀검 여혜진은 돌연 출가를 했다.
인간이 슬픔에 허덕일 때도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십 년이 흘러 풍자운을 잃은 아픔이 무뎌질 즈음, 풍운비의 처 황화란이 잠자듯 눈을 감았다.
그 이듬해에는 풍운비가 부인의 뒤를 따라갔다.
혈혈단신이던 풍운비는 죽기 전에 연적하에게 물려받았던 재산을 돌려주었다.
연적하는 남궁연과 상의 후 풍운비에게 돌려받은 재산을 여혜진이 출가한 사찰에 기부했다.
연적하와 남궁연의 자손들은 풍족하게 살아 더 챙겨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십 년이 지나 연적하의 나이 아흔하나, 남궁연은 아흔셋이 되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이십 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느 해 겨울.
저녁 식사 후 연적하와 함께 차를 마시던 중에 남궁연이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예?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그동안 내가 서각(書閣)에서 뭘 했는 줄 알아?”
“책을 읽었잖아요.”
“훗! 책도 읽었지.”
“뭘 또 했어요?”
“반신(半神)인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지.”
“에이, 뭘 또 새삼스럽게.”
“그리고, 이제는 네 인생을 살아.”
“언제는 내 인생을 안 살았어요? 내가 제멋대로 사는 건 온 천하가 다 아는데.”
“젊어서는 남궁세가가 네 발목을 잡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내게 붙잡혀 있었잖아. 이제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라고.”
“왜 그런 소리를 해요? 그리고 누님을 붙잡고 있는 건 나라고요.”
“풋! 그래, 우리는 서로를 꽉 잡고 있었어. 그랬다고 하자.”
“하자는 또 뭐예요? 아니, 그보다.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건데요?”
“이제는 나도 탈각(脫却)을 할 때가 된 것 같아. 미루고 미루었는데……. 더는 힘들 것 같아서.”
“무슨 탈각요? 설마 금선탈각(金蟬脫殼)을 말하는 거예요? 우화등선(羽化登仙) 같은 거?”
“그래,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했잖아. 설마 내가 네 앞에서 늙어 죽기를 바란 건 아니겠지?”
“저, 정말이에요?”
남궁연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어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연적하는 황망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