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41
1441회. 네 번째 하늘로 가고 싶습니다
연적하는 구천현녀의 얼굴을 보았다.
몇 년 전 등선한 남궁연이 현세에 다시 강림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얼굴만 같을 뿐, 자신을 보는 구천현녀의 눈빛은 남궁연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 다시 보니 반가웠다.
연적하는 더 이상 남궁연의 선택을 원망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기로 했다.
신선들의 무한에 가까운 수명을 생각하면 자신과 그녀의 인연은 그야말로 찰나지간이니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있었다.
“구천현녀님. 바라는 것을 말하기에 앞서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허락한다.”
구천현녀의 말투에 연적하는 조금 섭섭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 냈다.
“남궁연은 정말 구천현녀님의 전생(轉生)입니까?”
“그러하다.”
“그럼, 지금의 구천현녀님과 남궁연은…….”
연적하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천현녀가 답했다.
“남궁연은 나의 일부이지만, 전부이기도 하다.”
“아…….”
연적하는 왠지 알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네 번째 하늘에서 경험한, 육화(肉化)한 샤스트라 파라크티와 남궁연의 관계도 그랬다.
구천현녀는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너와의 인연은 찰나지간에 불과하다. 네가 구천검령만 얻지 않았다면, 너와 내가 이런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연적하는 구천현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랬다면 자신도 심통처럼 늙어 죽었을 테니 대화할 기회조차 없었으리라.
“내가 반신의 경지에 올라서 이렇게 복잡해진 거군요.”
“그러하다.”
“남궁연이 구천현녀님의 전생이라면, 나는요? 나도 누군가의 전생인가요?”
무표정하던 구천현녀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너는 보통의 인간이다.”
“너무 단언하시는 거 아닙니까?”
“네가 어느 신선의 전생이었다면, 너 역시 득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구천검령으로 반신은 되었을지언정, 득도와는 거리가 멀다.”
“…….”
연적하는 그 부분에 있어서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이 득도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천검령은 신선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힘이다. 그러니 너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신선도 못 받아들이는 것을 어떻게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것이 유한한 존재만이 가지는 신비다. 인간은 찰나를 살지만 영원에 닿아 있지. 그러나 신선은 불로장생하지만 영원과 멀어졌다. 불로장생과 영생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지. 신선이 되어서도 수도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영생을 위해서다.”
“신이 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나요?”
“그 끝에는 아마도.”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현세’와 ‘왕들의 하늘’과 ‘네 번째 하늘’만 봐도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잠시 침묵하던 연적하가 문득 물었다.
“당신에게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구천현녀님’이라고 부르던 호칭이 ‘당신’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이 질문이 ‘구천현녀’와 ‘남궁연’ 모두에게 던진 질문이라는 뜻이다.
“너는 가족에게 버림받은 가련한 아이이며, 장차 세상을 구원할 영웅이며, 한 여자의 좋은 반려였다.”
“좋은 반려는 못 됩니다. 나는 그녀가 내 품에서 죽기를 바랐으니까요.”
자조적으로 말하던 연적하가 아차 싶은 얼굴로 구천현녀를 힐끔 보았다.
그 부분에 할 말이 없던 구천현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질문이 끝났다면 이제 바라는 것을 말해 보거라.”
연적하는 구천현녀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눌렀다.
구천현녀에게 자신과의 인연은 그야말로 섬광(閃光)에 불과함을 안 까닭이다.
“네 번째 하늘로 가고 싶습니다.”
“왜지?”
“금사가 죽기 전에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네 번째 하늘이 멸망한다면, 그건 제가 금사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습니다.”
구천현녀가 묘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네 번째 하늘이 멸망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그 역시 위험할 터였다.
그런데 자청해서 그곳으로 가겠다니?
“네 말대로라면 네 번째 하늘의 멸망은 창조신과 샤스트라 파라크티도 막지 못한 것이다. 그걸 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저에게는 구천검령이 있으니까요.”
“구천검령이 완벽하게 너를 지켜 줄 수는 없다.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하지만 완벽하게 악신을 죽일 수는 있겠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너는 네 번째 하늘에서 죽을 생각이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살 만큼 살았기에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을 뿐입니다.”
“고작 백 년을 살고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신선도, 신도 아닌, 인간의 삶을 살다가 죽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남궁연의 선택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저처럼 하찮은 인간이 어찌 신선의 전생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인간이여. 너는 남궁연의 고뇌를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구천현녀가 착잡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비록 찰나에 불과한 시간일지언정 최근의 일이라 모든 게 생생했다.
유명교주를 마지막까지 보살폈던 남궁연은, 자신도 그렇게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인간이라면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반신인 반려에게 그런 식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수도를 통해 등선하는 것이었다.
장구한 시간 동안 그를 그리워할지언정, 아름다운 마지막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네 번째 하늘로 갈 수 있습니까?”
“너에게 천문(天門)이 있고, 창조신도 너를 원하니 가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네가 가지 않았으면 한다.”
“전에는 가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상계의 창조신은 권능을 잃어 너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한다. 그리고 샤스트라 파라크티에게 너는 억겁의 세월 속에 잊혀진 사람이고.”
“신들의 도움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신들과 그렇게 좋은 관계로 지내지도 않았고요.”
연적하는 쓰게 웃었다.
자신은 신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살자로 불렸다.
네 번째 하늘의 신들에게도 딱히 기대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건 구천현녀의 아득한 후신인 샤스트라 파라크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상계의 멸망을 막은 뒤에는 어찌할 생각이냐?”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돌아와야죠. 어쨌든 제가 속한 세상은 이곳이니까요.”
“알겠다. 네 바람이 이루어질지 알아보겠다. 기다리거라.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구천현녀는 구름과 함께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적하가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덧 밤이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구천현녀와의 대화를 되돌아보았다.
담담한 척했지만 구천현녀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랐다.
이전에는 단지 아름다운 신선이었다면, 오늘 만난 구천현녀는 언뜻 남궁연 같기도 했다.
대화 도중에 ‘당신’이라고 한 것도 그래서다.
마치 남궁연과 대화를 한 기분이랄까?
“거참! 모르겠단 말이지.”
육화한 샤스트라 파라크티처럼, 구천현녀의 전생이 남궁연이다.
문득 장자몽(莊子夢)이 떠올랐다.
구천현녀가 남궁연의 꿈을 꾼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다시 토지신묘 안으로 들어가려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길도 없는 벌판이니 지나던 행상인은 아닐 테고, 정체를 모르겠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한 무리 거지들이 나타났다.
손에 든 장대를 보니 개방이다.
토지신묘 앞에서 낯선 청년을 발견한 거지들 중에 하나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연적하는 대표적인 강강약약의 사내다.
초면의 거지가 다짜고짜 반말을 하니 그의 입에서도 거친 말이 튀어 나갔다.
“그렇게 묻는 너는 누구냐?”
황당한 얼굴로 청년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거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보다시피 우리는 개방의 호걸들이다. 보아하니 혼자인 것 같은데,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우리 개방이 비록 호천맹에 속해 있지만…….”
“알고 있다. 도덕과 담쌓고 사는 거지들이지. 가끔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장사하는 데 가서 깽판도 잘 치지. 구걸을 본업으로 삼지 않았다면 사파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걸?”
거지, 흑면개는 발작에 앞서 다시 청년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어디 하나 특출 난 곳이 없어 보이는 낙척서생이다.
그런데 놈이 다섯이나 되는 개방도 앞에서 저런 소리를 하다니?
미친놈이 아니면 뭔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때 흑면개와 동행한 거지들이 참지 못하고 벌 떼처럼 일어났다.
“저런 쳐죽일 놈이 있나!”
“개방을 도적이라니! 뒈지고 싶으냐!”
“이제 보니 미친놈이었구나! 미친놈에게는 몽둥이가 약이지!”
조만간 방현 분타주에 오를 흑면개가 장대를 번쩍 쳐들자 거지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거 초면에 실례를 했군.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방현 분타의 흑면개네. 소형제는 누구며,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흑면개가 한발 물러서자 연적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답했다.
“나는 연남천이라 하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중에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었소. 그런데 개방 분들은 무슨 일로 이 외진 곳까지 왔소?”
“분타주님을 찾아다니고 있네. 혹시 이 근방에서 혼자 다니는 개방 고수를 본 적이 있는가?”
“낮에 이곳에서 관산월이라는 노인을 만났소. 그분은 방현분타로 돌아간다며 떠나셨소. 반나절 전의 일이니 지금쯤 도착하셨을게요.”
그러자 흑면개가 아쉽다는 듯 발로 땅을 굴렀다.
“이런! 젠장! 길이 엇갈렸구나!”
흑면개와 거지들은 지금이라도 돌아가느냐, 하룻밤 묵고 가느냐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답은 토론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한겨울에 길을 가는 건 무리인 까닭이다.
결국 다섯 명의 개방도들은 토지신묘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잠시 후 모닥불 앞에 연적하와 거지들이 빙 둘러앉았다.
연적하를 보는 거지들의 눈빛은 사나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적하는 신경 쓰지 않고 불길만 멍하니 보았다.
한 시진(2시간)쯤 지났을까?
흑면개의 오른팔 노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이, 소형제. 불만 쬐지 말고 나무를 좀 구해 오는 게 어때? 개방을 부려 먹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연적하는 묵묵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노진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거지들을 둘러보았다.
한참 지나도 청년이 돌아오지 않자 누군가 말했다.
“이 새끼, 겁먹고 달아난 거 아냐?”
그 말에 흑면개가 노진에게 턱짓을 보냈다.
늘어져 있던 노진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덜덜 떠며 토지신묘 주위를 돌아다니던 노진은 들판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저 새끼가 얼어 죽으려고 작정을 했나. 하라는 나무는 안 해 오고 뭘 멍하니 서 있는…….’
그의 생각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밤하늘 저편에서 하얀 구름이, 마치 꿈인 것처럼 현실감 없게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구름은 청년의 앞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놀랍게도 구름에는 아름다운 여선(女仙)이 타고 있었는데, 여선과 청년이 뭐라고 말을 나누는 것 같았다.
노진은 너무도 신비로운 광경에 여선과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얼마 뒤 여선과 구름이 둥실 떠오르자 노진은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연이어 아홉 개나 되는 거대한 검의 형상이 들판에 흡사 기둥처럼 내리꽂혔다.
문득 뒤를 돌아보던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노진은 땅에 넙죽 엎드렸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노진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들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뒤늦게 여선과 청년이 완전히 떠났음을 알아차린 노진은 터덜터덜 토지신묘로 돌아갔다.
홀로 돌아온 그를 본 흑면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자는?”
“그분은…… 떠났습니다.”
곧이어 노진은 조금 전 얼어붙은 들판에서 자신이 본 것을 상세히 설명했다.
반신반의한 흑면개와 개방의 거지들이 토지신묘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이미 사라졌다는 여선과 청년이 보일 리 없다.
일각 후, 거지들은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다시 토지신묘로 돌아갔다.
노진의 목격담은 방현 분타에 오래도록 전설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