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42
1442회. 어디 깊은 산속에라도 있다가 나왔소?
텅 빈 허공에 마력장이 휘몰아치더니 이내 한 남자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가볍게 착지한 남자는 연적하였다.
“……히르헤라인가?”
낯익은 설원 풍경이 기억 속의 히르헤라를 닮았다.
그런데 북쪽에 장성처럼 늘어져 있어야 할 빙벽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던 연적하는 설원을 찬찬히 살폈다.
평평한 설원 곳곳에 움푹 파인 구덩이들은 분명히 메테오 스웜(Meteor Swarm)의 흔적이었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이내 정면의 언덕을 천천히 올라갔다.
역시나!
언덕 아래 히르헤라 주둔지에 만들어진 도시가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도시의 흔적이다.
목조 건물은 완전히 파괴됐고, 석조 건축물만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너머로 마치 띠처럼 길게 설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은 빙벽의 잔재였다.
완전히 무너진 빙벽과 파괴된 히르헤라 주둔지.
그것은 인간의 몰락을 의미했다.
탄식하던 연적하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옆에, 마치 낮달처럼 검은 구체가 나란히 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과거에는 없던 현상이다.
불현듯 우샤스 운드라의 말이 떠올랐다.
―검은 태양이 떠오르면 마나 프트라스는 잠들고, 이 세계는 태고의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다. 마나 프트라스에게는 그 변화를 막을 힘이 없다.
연적하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모든 게 우샤스 운드라의 허장성세이기를 바랐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마나 프트라스가 잠들었다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빙벽이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인간 세계는 폐허로 변한 히르헤라 주둔지처럼 멸망했을까?
‘아닐 거야.’
자신이 아는 이세계 인간은 마족들에게 멸망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마탑이 만들어 낸 무기를 떠올린 그는 애써 불안을 떨쳐 냈다.
연적하는 히르헤라 주둔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서진 건물의 잔해만 봐도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히르헤라 주둔지에 진입할 때다.
갑자기 석조 건축물 뒤에서 케르베로스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
“컹! 컹!”
마물들이 개처럼 짖어 대며 연적하를 덮쳤다.
연적하는 오히려 앞으로 달려나가며 케르베로스들에게 발길질을 가했다.
‘퍽! 퍽!’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케르베로스들이 석조 건축물로 날아가 처박혔다.
비칠거리며 일어난 케르베로스들은 겁을 먹었는지 부리나케 달아났다.
연적하는 달아나는 마물의 뒤를 굳이 쫓지 않았다.
“어디서 개새끼들이…….”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새삼 상계의 힘을 실감했다.
분명히 죽일 작정으로 걷어찼건만 케르베로스들은 죽지 않았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마하담에서 ‘공허의 검’을 꺼내 등 뒤에 대각선으로 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눈에 익숙한 숙영지가 나타나자 연적하의 걸음이 느려졌다.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다.
그는 과거 자신이 지휘하던 루퍼스 중대를 찾아갔다.
역시나 루퍼스 중대의 숙영지 역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어쩐다.”
하늘을 보니 슬슬 어두워지는 게 곧 완전히 해가 질 것 같았다.
당장 갈 곳이 떠오르지 않자 그는 마하담에서 천막을 꺼냈다.
막상 천막을 설치하려니 파비안과 하워드의 부재가 너무 아쉬웠다.
연적하는 오랜만에 자기 손으로 천막을 완성했다.
간이침대에 침구까지 들여놓자 비로소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냥 자도 되려나?”
전에는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세웠지만 지금은 자신밖에 없으니 고민이다.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짜던 연적하는 일단 천막 앞에 파이어 스톤으로 불을 피웠다.
그는 이 불빛을 보고 근처의 마물이 몰려와 주기를 바랐다.
잠들기 전에 마물을 싹 다 정리하면 불침번이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능력이 없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괴랄한 한 수였다.
생각대로 불나방처럼 마물이 몰려왔다.
변변한 먹잇감도 없는 설원에서 불빛을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연적하는 거침없이 공허의 검을 휘둘렀다.
구천검은 사용하지도 않았다.
사실 구천검은 소요종에서 천산검영을 익힌 뒤로 사용하지 않은 지 꽤 된다.
그렇다고 지금 천산검영을 쓰는 건 아니었다.
초식을 초월한 검격 앞에 마물들이 픽픽 쓰러졌다.
지능이 뛰어난 마물은 동족의 죽음을 보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연적하는 달아나는 마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아니어도 그가 죽여야 할 마물은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두 시간쯤 지나자 마물의 습격도 뜸해졌다.
연적하는 공허의 검을 회수한 뒤, 불 앞에 나무 의자를 꺼내 앉았다.
천막 안에 안락한 잠자리를 마련했지만 지금은 이 자리가 더 좋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처음 이세계에 왔을 때는 빨리 석경장으로 돌아갈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불 앞에 앉아 있는 지금, 허술한 천막이 마치 집처럼 아늑하다.
‘돌아가 봐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연적하는 불 앞에서 석경장에서도, 소호에서도, 맛보지 못한 안온함을 즐겼다.
“좋구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던 공자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지금 같아서는 당장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남궁연을 잃은 뒤 축 처져 있던 마음도 이 순간 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언덕 너머 멀리서 정체불명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구천기는 허무한 가운데 오니 허심으로 기다리라’고 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단전에서 일어난 영기인지 구천기인지 모를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곧이어 연적하의 머리 위로 칠색의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연적하는 자신이 새로운 경지로 들어섰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하려 하지 않고 기운이 스스로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꽃은 아홉 번 피고 진 뒤로 더는 피어나지 않았다.
문득 연적하가 날숨을 길게 내뱉었다.
뭐랄까.
이제야 뒤죽박죽이었던 이전의 삶이 깨끗하게 정리된 느낌이다.
불이 가물거리자 그는 다시 파이어 스톤 한 조각을 꺼내 던져 넣었다.
수그러들었던 불길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맹렬하게 일어났다.
연적하는 마하담에서 의자 하나를 더 꺼내 발을 올렸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발까지 뻗고 있으니 간이침대는 저리 가라다.
그러나 모처럼의 안락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눈송이가 흩날리는가 싶더니 곧 폭설이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파이어 스톤이 폭설을 이기지 못하고 꺼졌다.
아무리 연적하가 한서불침의 몸이라 해도 감당해 낼 수 있는 정도라는 게 있다.
파이어 스톤이 꺼지자 천하의 연적하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섬주섬 의자를 마하담에 던져 넣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눈과 바람만 막아 줘도 연적하 정도 되면 추위를 이길 수 있다.
그는 간이침대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다행히 갑작스럽게 퍼붓는 폭설로 인해 마물의 습격도 없었다.
다음 날.
느지막이 자리에서 일어난 연적하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밖으로 나갔다.
밤새 내린 눈에 그 많던 마물의 시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연적하는 다시 파이어 스톤에 불을 붙인 뒤, 그 위에 솥단지를 걸었다.
눈을 퍼다가 솥단지에 넣자, 이내 물로 변해 갔다.
그가 마하담에서 쌀과 육포 따위를 꺼내 솥단지에 넣고 끓일 때다.
멀리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명의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의 남자는 마법사인 듯 스태프를, 뒤따르는 사람들은 마력총을 들고 있었다.
낯선 복장의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마법사, 스테마 그리프 자작이 말했다.
“우리는 북부 왕국 연합 피닉스 부대네. 자네는 누군가?”
“에스카토스 왕국의 기사입니다.”
“혼잔가?”
“그렇습니다.”
“혼자서 히르헤라를 돌아다니다니 대범한 사람이군. 식사를 준비하는 것 같은데, 잠시 실례해도 되겠나? 우리도 옆에서 좀 쉬었으면 해서.”
“그러십쇼.”
연적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세계에 와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라 물어볼 게 많았다.
그리프 자작 일행이 파이어 스톤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리프 자작이 청년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히르헤라에는 언제 왔나?”
“어제요.”
“운이 좋은 친구로군. 밤새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가 아니라 마물과 만났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던 연적하가 지나가듯 물었다.
“북부 왕국 연합이라고 하셨죠? 제국과의 전쟁은 어떻게 됐습니까?”
순간 그리프 자작이 수상쩍다는 눈으로 청년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연적하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나 돌이켜 보았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대답은 그리프 자작이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총사, 얀 콘래드 남작의 입에서 나왔다.
“어디 깊은 산속에라도 있다가 나왔소? 제국과의 전쟁이 끝난 지 언젠데 그런 소리를 하게.”
“아, 제가 아주 먼 곳을 다녀오느라 그렇게 됐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까?”
“오 년 전, 저 빌어먹을 검은 태양이 뜨던 날 끝났소.”
콘래드 남작이 턱짓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연적하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족과 싸워야 하니 인간들끼리의 전쟁을 멈춘 것이리라.
“빙벽이 사라진 것을 봤습니다. 타메이온의 마족들이 침략했습니까?”
“그렇소.”
“제국에서 북부를 지원해 주던가요?”
“황제가 착해서 종전(終戰)에 합의한 줄 아시오? 제국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는데 지원은 무슨.”
“발등에 불요?”
“대수림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와 제국을 휩쓸고 있소.”
“마물이 아니라요?”
뜻밖의 말에 연적하는 얼빠진 얼굴로 연신 되물었다.
어비스의 마물이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괴물이라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북부에 있는 게 마물이고, 제국을 침공한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생명체라 하더이다. 자작님은 그것에 대해 아십니까? 저는 딱 거기까지만 들어서요.”
연적하와 콘래드 남작의 눈이 그리프 자작을 향했다.
그리프 자작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제국을 침공한 괴물은 이제까지 나타난 적이 없는 생명체라네. 괴물은 크기도 생김새도 종류마다 다른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네. 그건 그들이 인간을 닮았다는 거야. 물론 얼굴이 아니라 하는 짓이. 사람처럼 두 발로 걷고, 손으로 도구를 사용하기까지 한다네. 검과 방패까지 쓸 줄 안다니 말 다했지.”
“놀랍네요.”
연적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그리프 자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놀라기는 이르네. 사람과 하는 짓만 닮았지, 번식 속도가 쥐들 만큼이나 빨라. 태어난 지 일 년 만에 성체가 되는데, 암컷이 일 년에 다섯 번이나 출산을 한다네. 대수림이 포화 상태라 제국으로 진출한 것 같다더군.”
“…….”
연적하는 물론 콘래드 남작까지도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연적하가 물었다.
“그렇다면 대수림의 마물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먹이가 됐겠지. 괴물들은 육식이라……. 살아 움직이는 건 뭐든 잡아먹는다니까. 그런데 아까부터 탄내가 나는 것 같은데, 음식이 타는 거 아닌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연적하는 황급히 솥단지를 들어냈다.
얼마나 졸았는지 잡탕죽이 시커멓게 타 있었다.
연적하는 숯덩이가 된 잡탕죽을 버리고 육포로 허기를 달랬다.
맥 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청년의 옆으로 콘래드 남작이 자리를 옮겨 말했다.
“나는 얀 콘래드 남작이오. 보다시피 총사고. 혼자서 북부를 돌아다닐 정도면 실력이 있어 보이는데, 입대할 생각은 없소? 우리 부대에 기사 자리가 남는데.”
“그렇지 않아도 에스카토스 왕국군을 찾아가던 중입니다. 혹시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아, 그렇소? 북부 연합군 사령부가 라미노프 왕국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면 될 게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청년이 에스카토스 왕국군으로 간다니 콘래드 남작은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잠시 후 몸을 녹인 그리프 자작 일행은 조용히 떠났다.
천막을 철거한 연적하는 답설무흔의 신법으로 설원 위를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