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44
1444회. 그래서 살아 있잖아
남작의 과도한 인사에 엘리오는 계면쩍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존안은 무슨. 저 소대장은 야인 새끼라고 하면서 총까지 겨누던데. 라미노프 왕국의 제3총병대라고 했지? 기억해 둘게.”
라고아 백작의 말에 골란 밀로스 남작은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각하! 그건 미드에지가 모르고 한 소리일 겁니다. 미드에지 소위! 뭐 하나! 각하께 용서를 빌지 않고!”
밀로스 중대장이 졸라트 미드에지 소위에게 눈을 부라렸다.
졸라트 미드에지는 미드에지 백작의 삼남으로 아직 작위도 받지 못한, 단지 귀족가의 일원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북부의 영웅이자, 에스카토스 왕국의 백작에게 욕을 한 것이다.
왕국 간 외교적인 분쟁은 둘째치고 당장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법과 질서가 엉망이 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랜드 마스터가 자신을 모욕한 총사 하나를 죽인 걸 가지고 뭐라 할 사람이 있을까?
아니 오히려 북부 귀족들은 졸라트 미드에지의 어리석음을 욕할 터였다.
그러나 밀로스 중대장은 미드에지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 또한 미드에지의 상관으로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혼이 나간 얼굴로 서 있던 미드에지가 라고아 백작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배, 백작 각하! 중대장님 말씀처럼 모르고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가타부타 말없이 듣고만 있던 엘리오가 밀로스 중대장에게 물었다.
“남작, 모르고 사람을 죽이면 죄가 아닌가?”
“죄……가 됩니다.”
“그런데 나는 소위에게 귀족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랬음에도 소위는 나에게 ‘야인 새끼’라고 욕을 했지. 야인이면 설사 상대가 그랜드 마스터라도 ‘야인 새끼’라고 부르나? 그것이 너희 라미노프 왕국의 법인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전적으로 미드에지 소위의 잘못입니다.”
엘리오가 미드에지 소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위, 들었지? 너희 중대장이 그렇다는데 할 말 있나?”
“각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미드에지 백작가를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소위의 입에서 한 번만 더 미드에지 백작가의 이름이 나오면, 미드에지 백작가를 모두 죽일 것이다.”
라고아 백작의 협박에 미드에지 소위는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각하!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십쇼! 살려 주십쇼!”
미드에지 소위는 눈물 콧물을 쏟으며 연신 땅에 머리를 박았다.
그는 자신이 남에게 지랄맞은 짓을 하기에 알 수 있었다.
이 그랜드 마스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은 물론 미드에지 백작가까지 몰살시킬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보는 미드에지 소위의 비굴하면서도 애절한 모습에 중대장은 물론 총병들과 사르냑까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누구도 감히 그랜드 마스터와 미드에지 소위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그랜드 마스터의 분노가 자신에게 미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엘리오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소위, 살고 싶으냐?”
“예! 예! 흑, 흑…… 제발 한 번만…… 흑, 살려 주십쇼.”
“라미노프 왕국에 북부 왕국 연합군이 있다고 들었다. 맞나?”
“흑, 흑…… 맞습니다.”
“울지 마! 이 새끼야! 소위씩이나 되는 놈이 어린애처럼 처울어? 한 번만 더 울면 진짜 죽여 버린다.”
“끅…….”
미드에지는 이를 악물고 흐느낌을 참았지만,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그런 미드에지를 보며 엘리오가 말을 이어 갔다.
“북부 왕국 연합군에 합류하기 위해 가는 중이다. 그때까지 종자(從者)가 되어 나를 섬겨라. 종자 노릇을 잘해 내면 살려 주지.”
“예! 잘해 내겠습니다!”
소대장인 미드에지는 중대장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 꼴을 보고 고개를 젓던 엘리오가 밀로스 남작에게 물었다.
“남작, 소위를 내 종자로 쓰겠다. 그래도 되겠지?”
엘리오는 종자를 강조했다.
제3총병대에서 그럴싸한 명칭을 붙이는 걸 막기 위해서다.
“물론입니다. 백곰 중대는 조금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미드에지 소위는 백작 각하의 종자로 파견 보낸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북부 왕국이 연합한 지금 소위 하나를 그랜드 마스터에게 딸려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소위가 종자 노릇을 한다는 게 좀 민망하지만, 그건 미드에지 백작가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대충 이야기가 정리되자 엘리오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곳은 어딘가?”
“라미노프 왕국과 프리치아 왕국의 국경 지대입니다.”
“말했다시피 나는 북부 왕국 연합군 사령부를 찾아가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되나?”
“백작 각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 백곰 중대가 사령부까지 안내를 하겠습니다.”
“작전 중이 아니었나?”
“일상적인 수색 중이었습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는 불곰 중대와 교대하면 됩니다.”
“괜히 길 안내 때문에 임무 수행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대에 일이 생기면 종종 그런 식으로 임무를 교대하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작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이겠다.”
“아닙니다. 백작 각하를 모시는 것은 오히려 저희들에게 영광입니다. 그럼 불곰 중대와 임무를 교대하는 즉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세세한 건 남작이 알아서 처리해라. 나는 그저 동행하는 것으로 족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불곰 중대에 연락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밀로스 중대장은 라고아 백작에게 군례를 올린 뒤 총병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잠시 후 엘리오가 미드에지 소위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기수 사르냑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큰 소리로 답했다.
“미드에지 소대의 기수인 사르냑입니다!”
중대와 달리 소대의 명칭은 소대장의 성을 따랐다.
“아하.”
엘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소위부터 시작했기에 지금 사르냑이 어떤 상황인지 알았던 것이다.
더불어 그가 조금 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르냑?”
“예! 각하.”
“너는 소대로 돌아가라. 미드에지 소위는 당분간 내 종자로 지내야 하니까. 소대장 부재 시 기수가 소대장 역할을 해야 하는 건 알고 있지?”
“예!”
“미드에지가 돌아갈 때까지 너는 가서 네 일을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사르냑은 라고아 백작의 말에 군례를 올린 뒤 떠났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백곰 중대는 라미노프 왕국의 왕도인 드라고트를 향해 출발했다.
국경 지대에서 왕도까지의 거리는 대략 300킬로미터.
백곰 중대의 이동 속도로 칠 일쯤 걸리는 거리다.
이동하는 동안 밀로스 남작의 백곰 중대는 마물을 만나면 ―이전처럼 우회하는 게 아니라― 섬멸했다.
물론 마물과의 전투에서 선두는 항상 라고아 백작의 차지였다.
사실상 백곰 중대는 중상을 입은 마물의 뒤처리를 담당했지만, 어쨌든 백곰 중대의 전투로 기록되었다.
크고 작은 전투 보고서만 무려 70여 장이나 됐다.
급속 행군을 하는 와중에도 하루에 열 번 꼴로 싸운 셈이다.
그러면서도 가벼운 경상자만 나왔지 중상자는 없었다.
누가 봐도 거짓말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전설적인 전과(戰果)였다.
***
라미노프 왕국.
왕도 드라고트.
정오 무렵, 중무장한 일 개 중대가 왕도의 정문을 통과했다.
밀로스 남작의 백곰 중대다.
피로 얼룩진 백곰 중대원들의, 그러나 군기가 충만한 질서 정연한 행군에 왕도 거주민들이 와글와글 몰려들었다.
선두에 선 밀로스 중대장의 목은 어느 때보다 빳빳했다.
라고아 백작과 함께 싸웠다는 것도 명예로운 일이지만, 전설로 남을 전과를 보고할 생각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왕도 우측의 대로를 따라 걷던 백곰 중대 앞에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라고아 백작과 나란히 걷던 밀로스 중대장이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각하, 저곳에 북부 왕국 연합군 사령부가 있습니다. 검은 태양이 뜨기 전에는 왕도의 중앙 청사였습니다.”
“에스카토스 왕국군 지휘부도 저곳에 있겠지?”
“그럴 겁니다. 북부 왕국의 군사령관들이 모두 저곳에 있으니까요.”
백곰 중대가 정문에 멈춰 서자 초병들이 우르르 나왔다.
초병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밀로스 남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라미노프 왕국군 제3총병대 백곰 중대장 골란 밀로스 남작이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 각하를 모시고 왔으니 문을 열어라.”
밀로스 중대장의 말에 초병들은 황급히 정문을 개방했다.
백곰 중대가 보무도 당당하게 사령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뒤를 따라왔던 왕도 사람들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 각하를 모시고 왔다’는 말에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제국에 크나우프 대공이 있다면 왕국에는 라고아 백작이 있다.
하지만 제국에서 괴물을 상대로 맹활약하는 크나우프 대공과 달리 라고아 백작은 행방불명 상태였다.
그런 라고아 백작이 라미노프 왕국을 찾아온 것이다.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던 왕도 드라고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엘리오는 드라고트의 북부 왕국 연합군 사령부에서 에스카토스 왕국군 사령관인 에스카토스 공작과 재회했다.
그리고 에스카토스 공작에게 베르나르도 후작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베르나르도 후작님이 전사하셨다고요?”
“하아! 그렇소. 베르나르도 후작령도 마족에게 점령당했소. 지금은 장자인 샤를이 작위를 이어받아 베르나르도 후작군을 이끌고 있소.”
“아…….”
탄식하는 라고아 백작에게 에스카토스 공작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베르나르도 후작령만 빼앗긴 건 아니오. 우리 에스카토스 공작령도, 왕도도 전부 비우고 떠났으니까. 사실상 라미노프 왕국 북쪽은 전부 마족 손에 넘어갔다고 보면 되오.”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은 어떻게 됐습니까?”
“슬래시 랜드의 영주를 말하는 거라면, 그는 무사하오. 슬래시 랜드 영지병과 함께 베르나르도 후작군에 있소. 소속만 그렇지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영주라서 독립된 부대를 이끌고 있소. 클라우드 남작을 만나러 가겠다면 안내자를 보내 주리다.”
에스카토스 공작은 라고아 백작과 클라우드 남작의 특별한 관계를 알기에 ‘안내자를 보내 주겠다’ 말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고요.”
엘리오는 공작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은 에스카토스 왕국의 대귀족이라 그 정도 대우는 받아도 됐다.
에스카토스 공작과의 대화가 끝나자 북부 왕국의 대귀족들이 차례로 몰려와 알은체를 했다.
그들 중에는 베일럼 왕국의 왕족도 있었다.
엘리오는 그를 통해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소식을 접하고 안도했다.
다행히 오마르 백작의 영지는 마물의 침공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물론 마족이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테지만 말이오.”
운 좋게 마족들이 아직 베일럼 왕국까지는 진출하지 않은 것 같았다.
원하는 정보를 얻은 엘리오는 미드에지 소위와 함께 작전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복도를 걷던 미드에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각하, 사령부에 오셨는데…… 저는 어떻게…….”
그동안 그는 귀족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라고아 백작에게 헌신했다.
여느 종자들처럼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잡일은 물론 잔심부름까지, 정말 개처럼 일했다.
라고아 백작이 북부 왕국 연합군에 합류했으니 자신도 이제는 슬슬 원대 복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살아 있잖아.”
“…….”
종자 노릇을 더 하라는 소리다.
미드에지 소위는 감히 반발하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때마침 두 사람에게 에스카토스 왕국 기사 복장의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라고아 백작 각하.”
“누구?”
“에스카토스 왕국군 참모장 메토 로베르트 자작입니다. 베르나르도 후작군 진영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엘리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에스카토스 공작이 보낸 길 안내자가 왕국군 참모장일 줄이야.
소위로 영지군 생활을 시작한 엘리오는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쯧! 미안하게 됐습니다. 안내자를 보내 주신다고 해서 부관이 올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제가 사령관님께 부탁해서 나온 자리입니다. 한 번쯤 백작 각하를 가까이서 모시고 싶었거든요.”
그건 사실이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대한 경외의 감정과 별개로 ―참모장으로서― 북부 최고의 전력인 라고아 백작과 안면을 트는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참모장의 안내로 사령부 건물을 나서자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잠시 후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베르나르도 후작군 주둔지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