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45
1445회. 오늘 저녁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게 사실입니까?
슬래시 랜드 영지군 숙영지.
에스카토스 왕국군 참모장 메토 로베르트 자작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의 재회를 성사시킨 뒤에도 자리를 지켰다.
눈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공적으로 처리할 일이 남아 있어서다.
라고아 백작은 슬래시 랜드의 영주였다.
그것을 과거로 표현하는 것은 라고아 백작의 실종 이후 클라우드 남작이 슬래시 랜드를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아 백작이 실종된 지도 어언 5년.
어떤 이는 백작이 산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죽었다고 했다.
왕국법에 의하면 실종 신고 후 3년이 지나도 찾지 못하면 사망 처리가 된다.
그에 따라 2년 전 백작의 양자인 클라우드 남작이 슬래시 랜드의 영주가 되었는데, 돌연 사망 처리된 라고아 백작이 돌아온 것이다.
로베르트 참모장은 라고아 백작과 클라우드 남작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5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날 듯 끝날 듯 하면서 끝나지 않았다.
“……제 취임식이 있고 얼마 안 돼서 하워드와 크레아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둘은 용병이 됐어?”
“처음에는 그랬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만두었습니다.”
“왜?”
“마물이 너무 기승을 부려서요. 용병단에서 하루에도 서너 명씩 죽어 나갔습니다. 계속 용병단 생활하게 두면 둘 다 죽을 것 같아서, 제가 기사단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잘했다.”
“지금은 하워드가 기사단장입니다. 크레아 씨가 부단장이고.”
“인맥으로 나눠 먹기 한 거야?”
“인맥이 아니라 인재입니다. 슬래시 랜드에 기사가 몇이나 있는 줄 아십니까?”
“몇이나 있는데?”
“없습니다. 슬래시 랜드를 베르나르도 후작령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이 사는 게 용할 정도로 춥고 척박한 곳입니다. 사람도 몇 없는데 기사가 있겠습니까? 참모장님, 슬래시 랜드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십쇼.”
웃으며 듣고 있던 로베르트 참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클라우드 남작의 말대롭니다. 인재가 없습니다. 그래도 클라우드 남작과 하워드 남작 덕분에 슬래시 랜드군이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시면 됩니다. 이제 백작 각하께서 돌아오셨으니 많은 부분에서 달라질 테지만요.”
로베르트 참모장의 말에 파비안이 뒤늦게 생각난 듯 물었다.
“참! 라고아 백작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어떻게 해?”
“마족들에게 영지를 빼앗겼는데 참전하셔야죠? 설마 또 어비스에 가야 한다고 나 몰라라 하지는 않으시겠죠? 이번에도 그런다면 저는…….”
“너는 뭐?”
“어비스로 안 가고 북부에서 마족들과 싸울 겁니다.”
“아주 용사 났네.”
로베르트 참모장은 클라우드 남작의 말에 깜짝 놀라 라고아 백작의 눈치만 살폈다.
지금까지 라고아 백작을 어디에 꽂아야 할지를 두고 고민했는데, 만약 클라우드 남작의 말처럼 된다면 모든 게 한바탕 꿈이 되고 마는 까닭이다.
파비안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당연히 마족과 싸워야지.”
“어비스로 안 가시는 거 맞죠?”
클라우드 남작의 말에 로베르트 참모장이 슬쩍 끼어들었다.
“어비스는 안 가시는 게 아니라 못 가실 걸세.”
“예? 왜요?”
“검은 태양이 어비스의 입구였잖은가. 저길 무슨 수로 가냐 이 말일세.”
“…….”
그러나 파비안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면 라고아 백작은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오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얼굴의 파비안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비스에 가야 할 일이 생긴다면 가겠지. 하지만 지금은 마족과 괴물에게서 사람들을 지켜 내는 게 우선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라.”
그제야 파비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라고아 백작이 저렇게 말한다면 북부를 되찾는 건 시간문제인 까닭이다.
로베르트 참모장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라고아 백작 각하, 그러시다면 저희 에스카토스 왕국군 서부군 사령관을 맡아 주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
엘리오가 바로 답하지 않자 로베르트 참모장이 설명하듯 말했다.
“현재 에스카토스 왕국군은 동부군, 중앙군, 서부군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슬래시 랜드군이 속한 베르나르도 자작군이 서부군에 편성되어 있습니다. 베르나르도 후작의 전사 이후 서부군 사령관이 공석이라……. 서부군을 지휘할 대귀족이 필요합니다.”
“왕국에 부대를 지휘할 대귀족이 그렇게 없어요?”
“마족과의 전투에서 베르나르도 후작 각하처럼 유능한 대귀족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라미노프 왕국에 재집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대귀족들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엘리오는 선선히 로베르트 참모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몇 안 되는 슬래시 랜드 영지군을 이끌고 싸우느니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로베르트 참모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그렇게 알고 돌아가서 발령 조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백작 각하, 오늘 날짜로 발령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어차피 맡을 거 미룰 필요 없지.”
“예! 그럼 저는 먼저 사령부로 돌아가 국왕 전하께 상신(上申)을 하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국왕의 상신은 요식 행위에 불과하지만 생략할 수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베르트 참모장은 라고아 백작에게 군례를 올린 뒤 떠났다.
둘만 남게 되자 파비안이 웃으며 말했다.
“서부군 사령관이 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라고아 백작이 기사일 때부터 함께 지낸 파비안으로서는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다행이다. 나한테 슬래시 랜드군 맡으라고 했으면 곤란할 뻔했는데.”
“뭐가 곤란합니까? 제가 참모가 되면 되죠.”
“내가 구질구질하게 줬던 거 뺏는 사람이 돼야 좋겠냐?”
“그렇긴 하네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슬래시 랜드는 기억에서 지워 버리십쇼. 이번에 전공을 세우면 더 크고 비옥한 영지를 내려 줄 겁니다.”
“왜? 그 정도로 엉망이야?”
“땅덩어리는 큰데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베르나르도 후작령의 한 개 도시 정도만큼 사람들이 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실망했냐?”
“그럴 리가요? 저는 봉토를 얻은 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슬래시 랜드가 백작 각하에게 어울리는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슬래시 랜드 영주 자리를 도로 내놓게 될까 봐 그런 건 아니고?”
“전혀요. 마족들에게 다 빼앗겼는데 뭘 도로 내놓습니까?”
“그럼 내가 다시 영주 해도 되겠네?”
“에이, 왜 그러십니까? 백작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나마 가지고 있던 거도 다 나눠 주고 온 사람이다.”
“그럼, 백작님만 믿겠습니다.”
파비안의 말에 엘리오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끝까지 아니라고 하더니 백작님만 믿겠단다.
그래도 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파비안이 슬래시 랜드의 영주 자리에 욕심을 내서 고마웠다. 그거야말로 자신이 그에게 좋은 것을 주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슬래시 랜드 영지군 진영.
저녁 식사 배급 중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점심 때까지 벽돌 같은 빵 한 덩어리에 건더기 하나 없는 스프가 전부였다.
그런데 저녁이 풍성했다.
벽돌 같은 빵은 여전했지만 버터가 추가됐고, 스프에는 고기 조각이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라미노프 왕국군의 식단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식사가 형편없는 것은 비단 슬래시 랜드 영지군의 상황만이 아니다.
나라 잃은 왕국의 군인들에게 보급된 것은 오래된 빵과 건더기 없는 스프였다.
아직 영토를 가지고 있는 북부 왕국들이 식량을 지원했지만, 몰려든 북부 왕국군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딱딱한 빵과 스프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점심 때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저녁에 돌연 바뀌었으니 놀란 것이다.
슬래시 랜드 영지군들은 빵과 버터, 풍성해진 스프를 먹으며 떠들어 댔다.
“무슨 일이래?”
“죽기 전에 잘 먹으라 이건가?”
“씨발, 이런 게 최후의 만찬이라고? 아니야, 절대 아닐 거야.”
“우리만 특식이라더라.”
“뭐야? 그럼 우리만 위험한 작전에 투입한다는 소리잖아. 진짜 마지막 만찬인가 보다.”
모처럼 좋아진 식단을 앞에 두고 죽네 사네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기가 뚝뚝 떨어지다 못해 탈영하자는 말이 나올 즈음, 부대장이 식당 막사를 방문했다.
갑작스러운 하워드 솔론 부대장의 등장에 병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솔론 부대장이 묻자 용병 출신의 노병, 클라크가 용기 있게 나섰다.
“부대장님! 오늘 저녁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게 사실입니까?”
“응?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갑자기 치즈는 뭐고, 멀겋기만 하던 스프에 고기까지 들어 있습니다. 이게 최후의 만찬이 아니면 뭡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쇼.”
용병 일을 했던 하워드는 용병 출신 병사들과 가까이 지냈고, 그러다 보니 이런 식의 질문도 가능했다.
뒤늦게 클라크의 말을 이해한 하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러니까 돼지를 잡기 전에 많이 처먹이듯 하는 것 같다 이거지?”
“아닙니까?”
“전혀 아니다.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앞으로 매일 조금씩 더 좋아질 거다.”
“에이, 거짓말하지 마십쇼. 어떻게 매일 조금씩 좋아질 수 있습니까? 북부 왕국들이 마족들에게 영토를 계속 빼앗기고 있는데.”
“어이, 클라크. 언제 내가 거짓말 하는 거 봤나?”
“못 봤습니다만……. 이번에는 솔직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북부 상황이 나아질 건덕지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클라크는 귀족 상관에게 조금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병사들 입에서 탈영하자는 말까지 나온 터라 물러서지 않았다.
대충 덮고 넘기면 진짜 탈영하는 병사가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낮에 우리 서부군에도 드디어 사령관님이 부임하셨다.”
“그건…….”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끝까지 들어라.”
부대장이 윽박지르자 살짝 기대했던 클라크는 실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쯧! 오늘 밤부터 탈영병이 생기겠구나.’
병사들을 보니 다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들이다.
“북부의 수호자,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 라고아 백작 각하께서 우리 서부군 사령관으로 오셨다. 마족들은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
“…….”
한순간 식당이 침묵에 잠겼다.
곧이어 죽은 눈으로 앉아 있던 병사들이 벌떡 일어나 ‘와아아!’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음 날부터 북부 왕국 연합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패잔병에서 복수를 다짐하는 눈빛으로 돌변했다.
모두 북부의 희망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나타난 때문이다.
특히나 서부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과거 라고아 백작의 히르헤라 전투가 다시 병사와 기사 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잊혀졌던 글라체스 요새전이 다시금 조명받았다.
북부의 어린아이들은 라고아 백작과 마족 군주들의 전투를 흉내 내며 놀았다.
라고아 백작과 함께 북부 왕국은 대반격을 준비했다.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북부 왕국 연합군의 선봉에 배치됐다.
북부 왕국의 군수품은 에스카토스 왕국군, 그중에서도 서부군에 우선적으로 지급됐다.
당연하게도 서부군에 배급되는 음식의 양과 질은 조금씩 나아졌다.
덩달아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의 전사(戰死) 후 찬밥 신세이던 베르나르도 후작군의 위상도 올라갔다.
한 달 동안의 준비가 끝나자, 북부 왕국 연합군은 라미노프 왕국 국경선을 넘었다.
마침내 인간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