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49
1449회. 검은 태양을 없애는 것까지만입니다
초록빛 문양에 손가락이 닿은 순간, 엘리오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마치 수면에 손가락 끝을 담근 느낌이랄까?
뒤이어 짜릿한 전율과 함께 전신의 감각이 찰나지간에 사라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고운 입자가 되어 사라지는 자신의 손이었다.
대폭발과 동시에 엘리오의 몸은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마족들이 불멸의 사다리라 부르는― 모노리스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뜬 엘리오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여기가 저승인가?’였다.
자기 몸이 사라져 가는 걸 실시간으로 본 탓에 죽었다고 착각한 것이다.
정신을 차린 그는 빠르게 자신의 몸부터 확인했다.
비록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가루가 되었던 몸이 멀쩡하다?
심지어 사라졌던 감각마저 돌아왔다!
자신의 생사부터 확인한 그는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무수히 많은 별들 가운데 둥둥 떠 있다는 게 더 정확하다.
‘뭐지?’
황당한 눈으로 좌우를 살피고 있을 때, 멀리서 별들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모습은 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모노리스에 가까웠다.
깜짝 놀라 피할 곳을 찾았으나 빛나는 별들은 그를 보지 못한 듯 유유히 지나쳤다.
크기나 모양새가 조금씩 다른 별들이 회색 빛깔의 별로 떨어져 내렸다.
엘리오의 몸도 그 거대한 흐름에 빨려들어 아래로 내려갔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뒤덮은 별에서 각양각색의 비공정과 거인 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에 대항하듯 마수, 마물, 마족이 새까맣게 몰려왔다.
뒤늦게 엘리오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싸움이 태고의 전쟁임을 알아차렸다.
‘내가 설마 불멸의 사다리 안에 있는 건가?’
불멸의 사다리가 티탄족이 만든 마공학 장치라면, 눈앞에 보이는 이상한 광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건 과거?’
별들이 자신을 그저 스쳐 지나간 것도, 과거의 기억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
마족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비공정과 거인 들을 당해 내지 못했다.
가장 크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던 곳에 검은 구체가 나타나 마족들을 집어삼켰다.
이윽고 검은 구체는 쪼그라들더니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라졌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대다수의 마족은 북쪽으로 달아났고, 나머지는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회색빛 하늘이 눈에 익은 파란빛으로 물들었다.
마나 프트라스의 권능에 의한 현상이다.
곧이어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던 별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응?’
엘리오는 사라지는 티탄족의 별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탄족은 다짜고짜 상대를 빈사 상태에 빠뜨리고는 미련 없이 떠나 버렸다.
마족과 대화나 협상을 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예고 없이 와서 세계를 뒤집어 놓고, 무심하게 다시 밤하늘로 사라졌다.
‘그럴 거면 왜 왔지?’
하다못해 티탄족이 소수라도 남아서 이 세계를 다스릴 줄 알았다.
하지만 티탄족은 떠났다.
천공성과 불멸의 사다리 따위를 흔적으로 남겨 두고서 말이다.
게다가 마나 프트라스는 티탄족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나 프트라스가 티탄족의 신이냐?’하면 그것도 의문이다.
만약 마나 프트라스가 티탄족 신이라면, 티탄족이 이 세계를 떠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고민하던 엘리오는 문득 자신이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그가 밤하늘을 떠다닐 때 별들 사이에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엘리오 라고아.
“헉! 누구십니까!”
화들짝 놀란 엘리오는 반사적으로 벌거벗은 몸을 웅크렸다.
아무리 그가 백 년을 넘게 살았다 해도 마음은 청춘인 까닭이다.
―나는 마나 프트라스예요.
“이 세계의 창조신인…… 그 마나 프트라스 말입니까?”
엘리오는 연신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심연 같은 밤하늘만 두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래요.
“당신은 잠들지 않았나요? 그래서 검은 태양이 떠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신은 잠들지 않아요. 소멸할 뿐이죠.
“그럼 당신은 소멸했나요?”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엘리오가 그렇게 말한 건 이곳이 불멸의 사다리 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저 소리를 마나 프트라스의 잔류 사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티탄족의 기억이 불멸의 사다리 속에 남아 있는 것처럼, 마나 프트라스도 그럴 거라 짐작한 것이다.
―나는 당신이 본 티탄족의 기억과 달라요. 미약하지만 아직 실재해요.
“소멸하지 않았다는 말이네요?”
―그래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소멸할 거예요. 인간들처럼.
마나 프트라스가 인간의 소멸을 거론하자 엘리오는 흠칫 놀랐다.
자신이 인간 세계의 몰락을 막기 위해 왔지만, 소멸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마나 프트라스는 인간이 소멸할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티탄족은 악신 샤이틴을 이겼는데, 당신은 왜…… 잠든 거죠?”
―나는 티탄족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신이잖아요?”
―힘을 잃은 신이죠. 악신 샤이틴이 티탄족에게 패한 것처럼, 나도 악신 샤이틴에게 눌린 거예요.
“그건 티탄족이 신들보다 강하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나요?”
―당신이 본 그대로예요. 티탄족은 나와 악신 샤이틴보다 강하답니다.
“그렇다면…… 티탄족은 신인가요?”
―그들은 인간의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마공학의 궁극을 초월한 종족이에요.
“허! 신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엘리오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악신 샤이틴은 창조신, 마나 프트라스는 창조신에 버금가는 권능을 가진 신이다.
그런 신들보다 강한 종족이라니?
―마공학의 궁극마저도 초월한 티탄족에게는 신이 없어요. 스스로 신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데, 왜 신을 만들겠어요? 그런 점에서 티탄족은 당신을 닮았어요.
“내가요?”
―당신도 티탄족처럼 신에게 의지하지 않으니까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티탄족과 달라요. 구천현녀와 샤스트라 파라크티, 그리고 마나 프트라스님과 도움을 주고받잖아요.”
―그건 티탄족도 마찬가지예요. 그들도 나에게 이 세계를 부탁하고 떠났으니까요. 나는 티탄족의 호의에 기대어 이 세계를 관리하고 있었어요. 그 덕분에 이렇게 당신과 대화도 가능한 거고.
사실 엘리오가 불멸의 사다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마나 프트라스는 그와 만날 수 없었다.
세상에서는 오래전에 마나 프트라스가 자취를 감춘 까닭이다.
“그렇게 대단한 티탄족은 뭐가 아쉬워서 이 세계를 침공한 건가요? 딱히 마나 프트라스님과 인간을 위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그들은 우주의 기원, 혹은 창조신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신을 안 믿는다면서요?”
―믿지 않는 것과 권능을 인정하는 건 다르죠. 그들도 최소한 창조신의 권능은 인정해요. 그들도 창조신에 버금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권능을 알아보는 거죠.
“그래서 악신 샤이틴이 만든 세계를 찔러 본 건가요? 우주의 기원이 되는 창조신을 찾겠다고?”
―그들은 그들이 미숙하던 시절에 달성한 불완전한 마공학으로 그들의 행성을 파멸로 이끌었어요. 티탄족은 그 행성의 생존자들이죠.
“그게 우주를 돌아다니며 분탕질 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그들은 소멸한 티탄족의 행성을 복원하고 싶어 해요. 원죄를 청산하겠다는 심정으로.
“미친놈들이네요.”
―완전무결한 존재로서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이 세계를 찔러 봤는데, 악신 샤이틴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까……. 떠났다는 건가요?”
―맞아요. 나는 그들의 호의에 기대어, 악신 샤이틴이 잠든 동안 이 세계 질서를 다시 세웠고요.
“검은 태양과 함께 악신 샤이틴이 돌아와서……. 이번에는 마나 프트라스님이 소멸할 위기인 거고요?”
―보다시피 티탄족의 성지(聖地)에서 연명 중이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거예요.
“왜죠?”
―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사라져 가고 있어요. 마나의 축복이 사라진 세상이니 당연하겠죠? 남아 있는 마법사들도 결국은 흑마법으로 넘어갈 거예요.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부정당하면……. 신은 소멸하나요?”
―당신의 세계에 얼마나 많은 신이 있었는지 모를 거예요. 유물 속에나 남아 있는 신의 이름도 많을 테지요? 궁극적으로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아요.
엘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전지전능해 보이는 신에게도 인간의 믿음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런데 왜 내 앞에 나타났습니까?”
―순서가 바뀌었군요. 내 앞에 나타난 건 당신이에요. 이곳은 나의 마지막 안식처였어요.
“아, 그렇습니까? 나는 마나 프트라스님이 나를 이 세계로 인도해서 아직 괜찮으신 줄…….”
―당신을 이 세계로 인도한 건 내가 아니라…… 구천현녀예요. 나는 5년 전부터 이곳에 있었거든요.
“예? 전에 구천현녀가 천문의 안내는 마나 프트라스님만 가능하다고 했었는데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천문의 안내는 하계의 여선(女仙)이 가진 바 도력을 다 써도 될까 말까 한 일이니까. 기적적으로 성공했지만, 구천현녀는 다시 도력을 쌓아야 할 거예요.
“다시 쌓아야 한다고요? 얼마나요?”
―상계 진출의 기회가 짧으면 수천 년, 길면 수만 년 뒤로 늦춰졌을 거예요.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도력만 쌓는 일이면 다행이죠. 하계의 여선이 상계의 일에 관여하면 천겁을 받게 될 수도 있어요. 천겁은 상계의 신들도 두려워 하는 벌이에요.
“천겁은 누가 내리는데요?”
―우주를 관장하는 신적 존재겠죠. 어쩌면 티탄족이 찾아다니는 신일 수도 있어요.
“위험한가요?”
―상계의 신들도 자칫 소멸당할 수 있는 벌이 천겁이에요.
엘리오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요구가 그렇게 위험한 것일 줄은 몰랐다.
구천현녀가 소멸의 위험까지 안고서 부탁을 들어주었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엘리오의 귓가로 마나 프트라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엘리오 라고아. 나는 당신이 왜 이 세계로 돌아왔는지 알아요. 이 세계를 위해서 악신 샤이틴을 죽여 주세요.
“그건 티탄족도 하지 못한 일 아니었나요?”
물론 티탄족의 본심은 알 수 없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랬다.
―악신 샤이틴이 어렵다면, 최소한 검은 태양만이라도 없애 주세요.
“저도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만. 하늘에 떠 있는 검은 태양을 무슨 수로…….”
―검은 태양을 하늘에 떠받치는 힘은 결국 어둠의 에테르예요. 지상에 어둠의 에테르가 결집된 마력석이 있어요. 그걸 깨뜨리면……. 검은 태양에도 영향을 미칠 거예요.
잠시 생각하던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온 목적도 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니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러죠. 다시 말하지만 검은 태양을 없애는 것까지만입니다.”
엘리오는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았다.
티탄족들조차 어쩌지 못한 악신 샤이틴에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없었다.
검은 태양을 없애면, 이전처럼 마나 프트라스가 다시 세상에 나올 터.
‘마나 프트라스의 축복’과 ‘마공학’이라면 인간의 미래도 어둡지만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