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50
1450회. 텔레마에 비하면 운명은 깃털처럼 가볍다
생각에 잠긴 엘리오의 귓가로 마나 프트라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검은 태양이 사라지면 당신과 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건가요?”
―당신이 원한다면요. 나는 당신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맞습니다.”
솔직히 이세계로 향할 때 엘리오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이세계에서 죽는다 해도 딱히 미련은 없었다.
그러나 구천현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돌아가야 구천현녀를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천현녀를 만나 묻고 싶었다.
왜 천겁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내 바람을 들어주었느냐고.
―당신은 텔레마에 대해 알고 있나요?
“신을 가리키는 고대어로 ‘불멸의 의지’라 들었습니다.”
―텔레마에 비하면 운명은 깃털처럼 가볍죠. 이제 그만 가세요. 티탄족 전사의 이능이 당신에게 깃들었으니, 도움이 될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엘리오가 물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초록빛 문양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처럼― 몸의 감각이 빠르게 사라졌다.
곧이어 엘리오의 벌거벗은 몸뚱어리는 고운 입자로 변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똑.
차가운 물방울이 이마에 떨어지자, 그 충격에 엘리오는 눈을 번쩍 떴다.
“어?”
엘리오의 입에서 의문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폭발과 불멸의 사다리에서 마나 프트라스를 만난 일들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 없다는 자각을 했다.
자신이 알몸으로 좁고 어두운 공간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젠장. 묻혔나 보네.”
분위기를 보아하니 운 좋게 무너진 동굴의 빈 공간에 사출(瀉出)된 것 같았다.
나온 자리가 흙 속이었다면 한가하게 상황을 판단할 시간도 없었으리라.
“와아! 생매장당할 뻔했네?”
그때 또 한 방울의 물이 이마로 떨어졌다.
이마를 닦던 엘리오는 무심코 뒤통수로 손을 가져다 댔다.
뒤통수 닿은 바닥이 척척한 걸 보니 물 떨어지는 자리였던 모양이다.
엘리오는 조심스럽게 앉아 주위를 살폈다.
불멸의 사다리가 흡사 기둥처럼 떠받치고 있는 좁은 틈에 자신이 있었다.
사라진 옷을 찾아보았지만 대폭발에 날아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무심코 몸을 더듬다 공허의 검도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폭발로 파괴될 검이 아니니 땅 밑 어딘가에 파묻혀 있으리라.
하지만 공허의 검을 되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는 즉시 득물(得物)로 공허의 검을 다시 불러냈다.
‘공허의 검’ 역시 과거 ‘여동빈의 천둔검’처럼 원형이 파괴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다시 불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허의 검을 손에 들자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밀려왔다.
불멸의 사다리가 놓인 자리를 확인한 엘리오는 검 끝으로 사선 방향을 겨누었다.
동굴에서 수직으로 파고 올라가면 산을 뚫어야 하니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동굴 밖이라면 무너져 내린 눈더미를 파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단단한 흙보다는 눈이 쉽겠지?”
듣는 사람도 없는데 엘리오는 의견을 구하듯 중얼거렸다.
정오 무렵.
발도 디아노 협곡이라 불리던 고지대 설원.
고요하던 눈밭이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돌연 설원 속에서 강맹한 회오리바람이 솟구쳤다.
휘우우우우―!
용오름(mesocyclone)은 거대한 양의 눈을 하늘로 토해 낸 뒤에 스르륵 사라졌다.
이윽고 용오름과 함께 생겨난 구멍 속에서 대검을 든 알몸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엘리오였다.
“마족 새끼 어디 갔지?”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베리스부터 찾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죽이려 한 베리스에 대한 복수밖에 없었다.
토르누비스(운종술)까지 동원해 사방 십 킬로미터를 뒤졌지만 허사였다.
엘리오는 별수 없이 에스카토스 왕국군 진영으로 방향을 돌렸다.
길눈이 어두운 그였지만 하얀 설원에서 대군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마하담에서 천때기를 꺼내 몸에 둘둘 말고 바람처럼 자신의 막사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여벌의 옷이 없었기에 결국 참모를 불러 속옷과 북부 기사 특유의 갬비슨(누비 갑옷)을 구해야 했다.
옷가지를 건네는 참모, 기욤 샤르트 남작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어렸다.
“사령관님, 그런데 어디다 옷을 벗어 두신 겁니까?”
남자든 여자든 불륜 현장을 급하게 빠져나갈 때를 제외하면 알몸으로 다닐 일이 없다.
오래전 베르나르도 후작군에서 함께 지낸 인연으로 참모에 발탁된 샤르트 남작은 사령관의 상대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런 거 아니야.”
사령관이 시치미를 뗀다고 생각한 샤르트 참모는 입술을 삐죽였다.
변명하기 귀찮아진 엘리오는 손을 휘저어 참모를 내보냈다.
그러다 문득 마나 프트라스의 말을 떠올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텔레마에 비하면 운명은 깃털처럼 가볍죠. 이제 그만 가세요. 티탄족 전사의 이능이 당신에게 깃들었으니, 도움이 될 거예요.
‘운명이 깃털처럼 가볍다’는 말은 뭐며, ‘티탄족 전사의 이능’은 또 뭐란 말인가?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려 봤지만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이다.
그때 조금 전 내쫓은 샤르트 참모가 허겁지겁 찾아와 말했다.
“사령관님! 정찰대가 마족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엘리오는 튕겨나듯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어디서!”
“시에라 산맥 너머 알레크스 왕국 국경 마을입니다.”
“종족은?”
“아스타로이드가 마을 상공을 선회하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순간 엘리오의 눈이 빛났다.
아스타로이드라면 발도 디아노 협곡에 나타났던 마족들이 분명했다.
한 손이 열 손을 당해 내지 못한다더니 역시 다수가 좋긴 좋다.
토르누비스까지 사용해도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이렇게 찾아내다니!
곧이어 서부군은 정찰대를 앞세워 알레크스 왕국 국경 마을로 진격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서부군은 마족 군단과 조우할 수 있었다.
같은 시간 마족 군단.
헬무트의 군주인 베리스도 ‘인간족 군대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베리스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마족 군주가 지휘하는 군단에게 인간족 군대란 먹잇감에 불과한 까닭이다.
비록 발도 디아노 협곡에서 많은 마족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단이 인간족 군대보다 약하지는 않았다.
인간족 군대는 소드마스터를 제외하면 마물보다 못했기 때문이다.
소드마스터가 조금 거슬리지만, 그것도 군주가 없을 때의 일.
군주들에게 소드마스터는 불면 날아갈 먼지에 불과했다.
베리스는 친히 마족을 이끌고 미물에 불과한 인간족 군대를 향해 나아갔다.
‘헬무트의 군주’를 상징하는 찬란한 금관이 그려진 깃발이 마족 진영에서 펄럭거렸다.
그것에 비하면 급조한 티가 나는 인간족의 깃발은 볼품이 없었다.
베리스는 인간족 군대를 앞에 두고 서두르지 않았다.
오만한 눈으로 인간족 군대를 쓸어보던 베리스가 손을 까딱였다.
기다렸다는 듯 중급과 하급 마족들 속에서 백여 명의 아스타로이드들이 설원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스타로이드들은 마치 독수리처럼 인간족 군대의 머리 위를 선회했다.
그 장엄한 광경에 베리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활공하는 아스타로이드들의 모습은 인간족에게 공포 그 자체일 터였다.
그러나 베리스는 혼자만의 감상에 빠져 인간족 군대의 분위기가 자기 예상과 많이 다름을 미처 알지 못했다.
퍼퍼퍼펑―! 퍼펑―!
북부군은 이미 오래전에 마력총으로 개편을 마친 상태였다.
수백 개의 파란 빛줄기가 아스타로이드를 향해 날아갔다.
제국의 엑시티움을 본따 만든 왕국의 신무기 타나토스다.
타나토스에 맞았는지 수십 명의 아스타로이드들이 휘청거렸지만, 아쉽게도 추락하지는 않았다.
아스타로이드들은 인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 높이 비상했다.
그걸 본 베리스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비록 추락한 아스타로이드는 없었지만 인간의 전투 의지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베리스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하찮은 것들이 감히……. 죽여라!”
베리스의 명에 마족들이 막 휘하의 마물들을 전진시키려는 순간이다.
돌연 인간족 군대의 머리 위에 수백, 수천 개의 검영이 나타났다.
베리스와 마족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볼 때, 허공에 둥둥 떠 있던 검영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검영이 공중에서 무력시위를 하던 아스타로이드들을 관통했다.
활공하던 아스타로이드들이 마치 마력탄에 맞은 새처럼 떨어졌다.
퍼퍼퍼퍽―!
백여 명의 아스타로이드들은 지면과 충돌해 피떡이 되었다.
설령 검영에 부상을 입었다 해도 저 정도 충격이면 살아나기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땅에 떨어진 아스타로이드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분노한 베리스는 양손에 거대한 화염구를 생성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죽어라!”
그가 양손을 빠르게 휘젓자 ―두 개의 화염구에서― 초고열의 불길이 인간족 군대를 향해 뻗어 갔다.
헬파이어라 불리는 9서클의 마법 공격이다.
연금술이 마법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베리스의 마법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스타로이드들의 최후에 환호성을 내지르던 인간족 군대가 얼음처럼 굳었다.
그때 인간족 군대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대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대검에서 뻗어 나온 오라 블레이드가 순차적으로 헬파이어를 갈랐다.
콰앙! 쾅―!
마족 군단과 인간족 군대 사이에서 불의 폭풍이 일어났다.
헬파이어와 오라 블레이드의 격돌이 만들어 낸 후폭풍이었다.
불길과 연기가 흩어지자 베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왜 모쿠바스의 군주가 인간족 군대에서 나온단 말인가!
‘설마 나에게 복수를 하려고 인간의 편에 선 것인가?’
그렇다면 정말 미친 거다.
아무리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해도 마족 군주가 인간족의 편에 서는 건, 꿈에서라도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모쿠바스의 군주여! 너는 샤이틴님마저 배신할 셈이냐?”
일대일 승부에 자신이 없었던 베리스는 어떻게든 싸움을 피하려 했다.
“이 개자식아. 감히 나를 죽이려고 동굴을 폭파해? 닥치고 죽어라!”
엘리오가 공허의 검을 던졌다.
대검이 날아오자 베리스는 반사적으로 다크 실드를 펼쳤다.
5서클 흑마법인 어둠의 보호막이 베리스를 둘러쌌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공허의 검이 허공으로 튕겨 났다.
베리스가 막 한숨을 돌릴 때, 대검이 허공에서 선회해 다시 날아들었다.
콰앙!
또다시 대검은 튕겨 났지만 계속해서 다크 실드를 두드렸다.
쾅! 꽈광―!
다크 실드는 네 번째 공격을 막고 파괴됐다.
튕겨 났던 대검이 또다시 날아오자 베리스는 궁극의 방어 마법인 앱설루트 실드를 펼치며 소리쳤다.
“모쿠바스의 군주여! 나는 인간족 앞에서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다. 내가 어떻게 해야 공격을 그만둘 텐가!”
공허의 검이 앱설루트 실드에 닿기 직전 멈춰 섰다.
베리스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앱설루트 실드의 방어력을 믿지만, 모쿠바스의 군주가 계속 때리면 다크 실드처럼 결국은 깨질 게 뻔해서다.
게다가 저 무서운 놈은 지금까지 손가락만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가 작정하고 나선다면 자신은 죽을 게 뻔했다.
격앙된 얼굴로 베리스를 쏘아보던 엘리오가 다가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오만한 태도에 헬무트의 군주인 베리스는 울컥했지만 군말 없이 모쿠바스의 군주 앞으로 다가갔다.
거인족인 베리스를 올려다보던 엘리오가 아래로 손가락질 했다.
머리를 낮추라는 뜻이다.
머뭇거리던 베리스는 마지못해 모쿠바스의 군주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두 군주의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무심한 눈으로 베리스를 응시하던 엘리오가 입을 열었다.
“용서받을 기회를 주지. 불멸의 사다리를 연구했다고 했지? 거기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텔레마에 비하면 운명은 깃털처럼 가볍다’가 무슨 뜻이야?”
그러자 베리스가 황당한 얼굴로 반문했다.
“불멸의 사다리에서 소리가 났다고? 나는 그런 일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본 바가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무슨 뜻이냐는 거야. 모르면 실망인데.”
엘리오의 눈에 살기가 감돌자 베리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건…… 텔레마가 신의 의지, 즉 신을 뜻한다면…… 운명은 깃털처럼 가벼우니까……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게 아니겠느냐?”
초월적 지혜를 가진 마법 군주답게 베리스는 그럴듯한 해석을 늘어놓았다.
알쏭달쏭한 얼굴로 듣던 엘리오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티탄족 전사의 이능이 뭐야?”
집중해서 듣고 있던 베리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첫 번째 질문에는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였지만, 두 번째 질문의 답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